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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표절 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주안점

“지적 착취의 상황에서는, 연구 활동에 대한 적절한 공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체제전복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아래 글은 호주 울롱공 대학교(University of Wollongong)  사회과학과 브라이언 마틴(Brian Martin) 교수의 논문 Plagiarism : a misplaced emphasis를 원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진실성검증센터가 번역해 공개하는 것이다. 

브라이언 마틴 교수는 ‘권력’과 ‘제도’가 빚어내는 폐해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아나키스트로서의 노선을 갖고 있다. 아래 논문은 브라이언 마틴 교수의 그러한 노선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논문으로, 이에 특히 여기서 논의된 ‘제도화된 표절(Institutionalized plagiarism)’ 개념의 경우는 그 한국적 수용과 관련해서는 일부 논란도 있을 수 있다.

다만, 권력화, 제도화의 부산물로서 나타나는 상당수 연구부정행위 문제와 사이비과학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브라이언 마틴 교수와 같은 아나키스트들(극좌파형이건 극우파형이건)의 권력저항적, 체제저항적 시각이 큰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연구진실성검증센터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브라이언 마틴 교수의 아나키즘적 시각이 드러나는 논문들도 적극 소개할 계획이다.

이 논문은 일부 편집이 이뤄진 상태로 ‘정보윤리학저널(Journal of Information Ethics)’에 발표됐다(Vol. 3, No. 2, Fall 1994, pp. 36-47).  아래 논문은 편집이 가해지기 전의 제출 원본이다. 사진과 캡션, 일부 소제목은 연구진실성검증센터가 덧붙인 것이다.





요약 abstract

표절은 전통적으로 상아탑과 같은 ‘경쟁적인 지적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지적인 공헌을 앗아가는 매우 심각한 학계의 윤리 위반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와 같이 표절 문제의 주안점을 경쟁적인 학계에서의 그것으로만 두는 일은, 대필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관료 엘리트들에게 저자로서의 영예를 상납하는 문화와 같은 이른바 ‘제도화된 표절(Institutionalized plagiarism)’의 많은 문제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제도화된 표절’을 노출시키고 이에 대해서 도전장을 던지는 동시에 ‘경쟁상황형 표절‘에 대해서는 사회적 낙인을 비교적 줄여주는 일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문제 The problem as normally conceived

지식인들 사이에 논문 표절은 일반적으로 가히 통탄할만한 죄악처럼 여겨지고 있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연마시켜주고 고용도 시켜주는 대학교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에서는, 표절을 형사범죄와도 같은 심각한 문제로 다루면서 이를 경계한다. 

어떤 교수들은 표절을 적발할 수 있는 복잡하거나 수고로운 방법을 개발해냈다. 이 주제를 다룬 어느 논문의 저자들은 표절을 적발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 문헌을 네 번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있다(Bjaaland and Lederman,1973). 한편, 컴퓨터과학자들은 표절을 적발하기 위해서 복잡한 알고리즘을 연구하기도 했다(Faidhi and Robinson, 1987). 

다른 대안으로,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글쓰기 과제에 자신의 경험을 반영토록 하는 등 평가 절차를 적절하게 설계하여 표절 문제를 미리 차단할 수도 있다(Carroll,1982). 교수들은 자신의 강연을 준비하고 강연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인용처리를 함으로써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Alexander, 1988). 각 교육기관들이나 연구기관들의 경우에는 비위 문제에 대한 징계와 같은 공식적인 정책을 통해 표절 문제에 대처한다(Thomley, 1989). 

표절 문제에 대처하는 또 다른 접근법은 ‘명예규약제도(아너 시스템, honor system)’를 만들어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선서를 하도록 만들고, 또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다른 학생을 신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Fass, 1986). 표절 문제는 교육 철학에 대한 재고를 불러올 수도 있다(Malloch,1976).


교수들이 진지하게 학생들의 표절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Baird, 1980; Connell, 1981; Galles, 1987; Stavisky, 1973), 이를 단속하려는 그들의 집단적인 노력도 실제로 발생하는 표절 문제의 규모에 비해서는 충분하지 않은 듯 하다(Karlins, Michaels, and Podlogar, 1988). 

의심할 여지없이, 학생들이 저지른 표절 중 일부만이 적발되고, 또 표절이 적발된 학생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의 일부만이 중징계를 받는다. 만약 부정행위를 엄격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단속한다면 학생들의 낙제율은 아마도 폭등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럴 일은 없다.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해 표절은 오늘날 더욱 쉬워졌고 적발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컴퓨터를 통해 타 아티스트의 음원 샘플링을 베껴오는 일이 이미 난무하고 있으며 이는 신용 상의 문제와 저작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Keyt, 1988).

표절의 종류

이쯤 되면 표절을 몇 가지 종류로 구분해주는 것이 유용하겠다(Martin,1984:183-184). 

제일 눈에 띄고 적발되기 쉬운 표절은 타인의 문헌에서 단락이나 문장을 인용부호(quotation mark, 쌍따옴표)를 하지 않고 베껴오거나, 출처표시를 하지 않고 베껴오거나, 또는 인용부호와 출처표시를 둘 다 하지 않고 베껴오는 경우다. 이는 '텍스트 표절(word-for-word plagiarism)'이라고 칭할 수 있다. 

다른 문헌에서 단락이나 문장을 베껴오면서 단어의 일부만 바꿨을 때는 '말바꿔쓰기 표절(paraphrasing plagiarism)'이라고 칭할 수 있다. 만약 출처표시를 하지 않았다면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할 수 있는 이 말바꿔쓰기 표절은 (표현을 그대로 베끼는 텍스트 표절보다도) 더욱 심각한 표절로 여겨진다. 

이보다 좀 더 적발하기 어려운 표절은 얼핏 출처표시는 되어있는 듯 보이지만 그 출처가 아닌 다른 출처에서 표절을 한 경우로, 사실은 2차 출처에서 1차 출처의 내용과 서지정보를 참조해왔으면서도 1차 출처만 표시하고 2차 출처에 대해서는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경우다(Bensman, 1988:456-457). 이는 ‘2차 문헌 표절(plagiarism of secondary sources, 재인용 표절)’이라고 칭할 수 있다.  ‘2차 문헌 표절’은, 표절자가 (애초 1차 출처에는 없는) 2차 출처에 있는 ‘구두점’이나 ‘인용처리’와 관련한 사소한 실수들도 모조리 베끼다가 적발되곤 한다. 

가장 적발하기 힘든 표절은, 다른 출처의 ‘논증의 구조(structure of the argument)’를 적절한 인용처리 없이 사용하는 경우이다. 만약 표절자가 1차 출처를 실제로 살펴보긴 했지만, 사실은 여러 1차 출처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놓은 2차 출처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인용처리를 하지 않는 것도 역시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출처 형상에 대한 표절(plagiarism of the form of a source)’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일반적인 표절은 ‘아이디어 표절(plagiarism of ideas)’인데, 이는 분명 타인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베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구체적인 ‘표현’이나 ‘출처에 대한 형상’은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연구에 무단으로 올리는 경우가 있고 이는 ‘부당저자형 표절(plagiarism of authorship)’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학부생들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표절은 텍스트 표절이다. 텍스트 표절이 가장 많이 확인되는 것은, 가장 적발하기 쉽고 증명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표절 중 하나인 ‘부당저자형 표절’은 다른 사람을 시켜 대필을 할 때 발생하지만, 적발하고 증명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표절에 대한 우려 중에서 대부분이 가장 덜 심각한 종류의 표절(텍스트 표절)에 집중되도록 한다. 

사실 학생들이 범하는 텍스트 표절이 고의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들은 단순히 인용규칙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전혀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의 경우는 심지어 고등학교 때부터 그냥 출처표시 없이 쓰라고 배운 경우도 있는데(Dant, 1986;Schlab, 1972), 이로 인한 문제는 대학 교육에서도 지속된다. 학생들은 말하자면 도제(徒弟, apprentices)이며, 그 중 일부는 학계라는 업계의 관례를 느리게 배운다.

교육 기관들은 학생 표절자들을 낙제시키거나 퇴학시킬 권리가 있지만 이 권리가 실제로 행사되는 경우가 드물다(Mawdsley,1986; Reams,1987). 그러나 동료 학자들의 경우는 또한 전혀 다르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표절은 완전히 부당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지만, 그에 대해 대처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학생들의 표절 경우에서 봤듯, 텍스트 표절은 가장 증명되기가 쉽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골적인 표절자들은 전문적인 학자가 되기 전에 이미 학생 시절에 적발되어 걸러내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 표절을 범한 표절자들이 적발되고 징계 받는 극적인 사례가 있기는 해도, 반대로 표절자들이 성공적으로 경력을 이어나간 사례도 많다(Broad and Wade, 1982; Mallon, 1989; Spender, 1989:140-194).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표절 문제는 목사와 사회운동가로서 킹의 경력관리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거졌던 킹의 표절 문제는, 킹의 민권 운동가로서의 업적에 호의적이었던 학자들조차 결국 그를 부정적으로 재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Thelen,1991). 





마틴 루터 킹의 사례는 표절자가 쉽게 적발이나 징계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과 표절이 폭로되어 처벌의 일환으로써 그 사람의 평판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는 사실(이 경우는 사후에) 양쪽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아이디어를 표절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조치를 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많은 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부도덕한 경쟁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둑맞을까봐 불안해한다. 이는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으려는 풍토를 야기한다.

표절에 대한 정통주의적 관점과 수정주의적 관점

표절 문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정통주의적 관점(The standard view)’은, 표절이 학문의 숭고성, 고결성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며 이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학생들이 표절을 저지르는 일을 강하게 저지한다. 또한 이 관점에서는 학자들 사이에서의 표절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표절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수정주의적 관점(The revisionist picture)’에 의하면, 표절은 실제로 알려진 것보다 학생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훨씬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처벌받는 경우도 드물다. 정통주의적 관점이건 수정주의적 관점이건 양쪽 다 표절의 심각성과 그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또한, 정통주의적 관점이건 수정주의적 관점이건 양쪽 다 표절의 주원인이 집필 경험의 부족 또는 개인의 일탈 때문이며(표절자의 심리는 쇼(Shaw, 1982)의 통찰력 있는 연구를 확인할 것), 그에 대한 처벌과 대책이 개개인들로 하여금 표절을 꺼리게 하는 쪽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데도 의견을 같이 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의 주장은 표절에 대한 정통주의적 관점과 수정주의적 관점, 양쪽 모두가 상아탑을 개혁하는데 있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관점 모두 다, 아이디어에 대한 공헌의 인정이 지위와 승진에 무척 중요시되는 학계에서, 그저 특정한 한 가지 종류의 표절에 대한 문제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표절 Institutionalized plagiarism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 하에서, 어떤 종류의 표절은 묵인되고 만연되어 있어 우려되거나 언급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표절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논하기 이전에 먼저 여기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해보겠다.

대필은 대중적 글쓰기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Posner, 1988). 정치인, 스포츠인, 기업 중역, 영화배우가 연설을 하거나 책을 쓰거나 신문에 기고를 할 때 실제로 원고를 작성하는 일은 흔히 다른 사람이 한다. 

“말콤 X(Malcolm X)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도움을 받아서 썼던” 책인 ‘말콤 X의 자전(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의 경우처럼 때때로 대필자가 드러대놓고 언급이 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X, 1965). 이 사례에서도 실제 책을 쓰지도 않은 사람(말콤X)이 실제 책을 쓴 사람(알렉스 해일리)의 이름보다도 선행해서 기재되어 있다. (헤일리는 나중에 그의 책 ‘뿌리(Roots)’의 표절 문제로 고발되었다. 확실히 저자자격 문제가 단순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실제 집필을 한 저자의 이름은 ‘감사의 말’ 부분에 작게 적혀 있거나,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대필은 ‘부당저자형 표절’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글쓴이의 지적 공헌을 정당하게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표절 중에서 제일 이상하게 발전한 경우는 유명한 기자들조차 바쁘다는 이유로 남에게 대필을 시키는 경우이다(Posner, 1988).

과학 연구에서 명예저자(honorary authorship)는 흔한 현상이다. 전형적인 사례들로서,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도교수나 연구소장이 연구논문의 공동저자로 기재되는 경우들이 많다(LaFollete, 1992:91-107). 몇몇 교과서들의 경우, 공식적인 저자는 그들의 높은시장 가치에 따라 선택되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별로 기여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식적인 저자가) 감독한 교과서들”의 내용을 실제로 작성한 이는 그 공헌을 거의 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다(Coser, Kadushin, and Powell, 1982; Fischer and Lazerson, 1977).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거의 모든 서적들이 출판되기 이전에 사실상 내부의 편집인들로부터 재작성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또 다른 형태의 대필은 정치 연설에서의 원고 대필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스스로 연설원고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연설원고를 연설작가에게 의존한다. 그런데 이런 연설작가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공개적으로 그 공헌을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똑같은 상황은 대본에 의존하는 유명한 코미디언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이보다도 더욱 흔한 저자 표기상의 ‘오도(誤導, misrepresentation)’는 정부, 기업, 교회, 노동조합 같은 관료조직에서 관찰된다. 하급자가 처리한 업무를 상급자 자신이 처리했다는 식으로 서명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것이 정당화되는 이유는 서류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조직상 그 업무의 책임자라는 사실 때문인데, 그 업무에 대한 공헌 또한 그의 것이 된다(특히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런 현상은 너무나 만연한 것이어서 표절 또는 관료제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다.(대학 당국자들과 관련한 솔직담백한 논의를 읽고 싶다면 무디의 문헌(Moodie, 1993)을 확인하라.) 

관료제의 하급자들과 대화를 해본다면, 이와 같은 부당저자 문제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일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개 그들은 형식상으로 저자로 기재되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직 내에서 자기들이 한 업무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분개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로서의 자격을 보호하지 못하는 시스템에서 상급자들이 하급자들이 수행한 일에 대한 공헌을 너무나 쉽게 가로챌 수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외부인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공적인 구조의 외관(外觀)이 기저(基底)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장관이 국회의원들 중에 임명되며 정부의 부처를 책임진다. 만약 누군가가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실제로 장관이 그 편지를 읽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고 항상 부처의 누군가가 장관의 이름으로 답장을 써서 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편지를 부친 사람은 실제로는 하급 관료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모를 수 있다.

‘부당저자형 표절’은 관료 조직의 구조와 운영에 내재되어 있기에 이는 표절이라고 거의 분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부당저자형 표절’도 표절의 일반적인 형식상 정의를 모두 충족한다.

관료 조직에서 널리 퍼져있는 표절과 다양한 분야에서 일반화된 대필 문화는 ‘제도화된 표절(institutionalized plagiarism)’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제도화된 표절’은 학계에서의 ‘경쟁상황형 표절(competitive plagiarism)’과는 구별된다. ‘경쟁상황형 표절’에서는 아이디어에 대한 공헌을 차지하는 것이 지위와 출세의 기반이 되는데, 이는 시스템이 자율적이고 개인적인 지적 생산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경쟁적인 지적 산업에서 부당한 공헌을 얻는 표절은 결국 게임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제도화된 표절’은 공식적인 계급 체계의 특징이다. 계급 시스템에서는 어떤 지적 작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는 것이 권력과 지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은 권력과 지위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관료제에서 직원들은 독자적인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시스템 상의 톱니바퀴 중 하나로 인식된다. 그들의 작업은 개개인의 생산물이 아닌 관료제의 생산물로 귀속되며, 이 귀속 과정은 생산물에 관료제 엘리트들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공식화된다. ‘제도화된 표절’은 특히 매스컴과 같은 대규모 기관이 빚어내는 ‘체계적 오도(systematic misrepresentation)’의 한 측면으로도 분류될 수 있다(Mitroff and Bennis,1988).

‘경쟁상황형 표절’과 ‘제도화된 표절’은 다른 말로 각각 ‘소매상형 표절’과 ‘도매상형 표절’로 칭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촘스키와 허만(Chomsky & Herman, 1979)이 ‘소규모 그룹이 저지르는 소규모 살인’과 ‘정부가 저지르는 대규모 살인’을 각각 ‘소매상형 테러’와 ‘도매상형 테러’로 분류해 비유한 것을 따온 것이다. 

(편집자주 : 여기서 브라이언 마틴 교수가 얘기하는 ‘경쟁상황형 표절’은 동료 또는 경쟁자의 작품에서 표절을 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표절’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소매상형 표절’은 한 번에 소규모의 사람들의 지적 노동 결과물을 착취하는 것이고, ‘도매상형 표절’은 표준적인 절차로써 많은 수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테러에 대한 연구는 ‘소매상형 테러’를 중시하고 ‘도매상형 테러’는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한다. 표절에 대한 연구들도 이와 유사하게 오직 다양한 ‘경쟁상황형 표절’에만 집중되고 있으며, ‘제도화된 표절’은 무시된다. 조셉 바이든(Joseph R. Biden Jr.)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바이든은 미국의 대권 후보가 되기를 지망했었는데 1987년에 그가 영국 노동당 당수였던 닐 키녹(Neil Kinnock)을 비롯한 다른 정치인들의 연설을 표절해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적발됐었다. 이는 언론으로부터 도덕성 논란을 불러일으켰고(연설 중 일부는 물론 대필됐었다), 바이든이 대권 경쟁에서 탈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력 정치인들이 의존하는 대필 연설작가들의 문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바이든은 다른 정치인들의 연설을 표절(경쟁상황형 표절)한 죄로 지탄을 받았으나, 반면에 다른 정치인들이 대필작가들이 쓴 연설을 표절(부당저자형 표절)하는 것은 하급자로부터의 표절(제도화된 표절)이라는 이유로 당연시되고 용인되었다.

실제로 바이든이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의 연설문을 표절했을 때, 그가 표절한 문장들은 케네디 자신의 글이 아니라 바로 케네디의 연설작가 아담 웨인스키(Adam Walinsky)의 글이었다(Posner, 1988:19).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경쟁상황형 표절’과 ‘제도화된 표절’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기보다는 겹치고 일관성 없는 부분들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대학교 산하 연구소들의 책임자들 중 일부는 발표되는 모든 논문에 자신의 이름이 공저자로 기재되기를 요구하는 반면(경쟁상황에서의 제도화된 표절), 일부 기업과 정부의 관료조직은 오히려 개인적 저자자격을 인정하거나 심지어 이를 독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절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가 경쟁 상황에서의 에티켓 위반 사례에만 집중하고, 계급주의 하에서의 조직적 표절 문제는 경시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경쟁상황형 표절’에만 몰두하는 한 가지 이유는 표절에 대하여 연구를 하는 학자들 자신이 경쟁적 영역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경쟁상황형 표절’에만 몰두하는 것이 관료, 정치인, 기타 다른 이들과 같이 ‘제도화된 표절’을 통해 이익을 보는 엘리트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범죄’의 경우처럼(Collins, 1982:96-118), 한 사회에서 ‘규율 위반(offense)’이란 바로 특정 집단의 이익과 관계된 정치의 한 형태이다. 이는 단순 좀도둑을 범죄자라고 강하게 낙인을 찍음으로써, 진짜 범죄자인 조직폭력배에게는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것과 같다.

때때로 이런 이중잣대 문제가 일반인들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나고, 표절에 대한 관심이 결국 엘리트들에게 위협이 될 때가 있다. 가령, 이런 문제가 대학 당국자들에게도 끼치는 영향은 다음 인용문에서도 드러난다: 

더 넓은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정치 영역에서 오랫동안 행해져온 관습인 대필 문제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게 한다. 본 연구와 관련하여 한 학생이 평하기를, ‘만약 [대학] 총장이 대필 작가를 쓸 수 있다면 나는 왜 안 되는가?’ 이는 타당한 문제제기다. 학생들에게는 특정한 잣대를 적용하면서 대학 당국자들에게는 또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학술적 정직성의 개념 전체와 관련하여, 비뚤어진 상황적 윤리를 강요하는 짓이다.(Hawley,1984:35).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학 총장들은 연설 작가들의 글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표절할 수 있다. 그들이 비난 받는 유일한 경우는 오직 다른 학자의 작품을 표절할 때만이다(e.g., Piliawsky,1982:13-15). 즉 ‘경쟁상황형 표절’을 할 때만이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Does it matter?

사회학자 디나 웨인스타인(Deena Weinstein)과의 서신교환을 하면서, 언젠가 필자는 다른 학자가 그녀의 아이디어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이용하고도 인용처리를 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디나 웨인스타인과의 개인적인 대화, 7 October 1982) 

“내가 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한, 나는 내가 그 (아이디어를 누가 먼저 생각해냈는가에 대한) 선취권에 대해 쥐뿔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어요. 아이디어는 재산이 아니니까 훔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여기서 쉼표도 그녀가 쓴 것이다.)


이후 그녀는 다른 학자들이 어떻게 그녀의 아이디어에 재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런 경우는 일반적인 딜레마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관념적인 지식의 발전(advancement of knowledge)이라는 차원에서는, 표절 문제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는 어떤 지식의 생성에 대한 공헌을 누가 가져가던 간에 어쨌든 그 지식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기만 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타인의 인정은 자신의 경력관리에 있어서도 생명줄이고, 특히 지식인의 자아상(自我像, self-image)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

크롤(Kroll)은 대학 1학년생을 상대로 한 연구에서, 표절에 반대하는 주장 중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논점들이 저자들과 다른 학생들에 대한 공명정대한 대우, 독자적인 연구를 하여야 하는 학생들의 책임, 그리고 소유권(저작권)에 대한 존중(Kroll, 1988:203)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저자들에 대한 공명정대한 대우’, 그리고 ‘독자적인 연구를 하여야 하는 책임’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도덕적인 논점이다. ‘소유권(저작권)에 대한 존중’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표절 적발을 통한 저작권 침해 상의 금전적 이득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점 중에서 어떠한 것도 표절이 “진리 탐구(quest for truth)”의 심각한 방해물이 되므로 적대시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표절을 적대시하는데 있어서 실용적인 논의 중 하나는, 2류 지식인들이 표절을 통해 자기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Cranberg, 1992).

그 결과로 표절자들은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자금 지원을 받게 되지만, 표절자들은 자신들이 표절했던 우수한 지식인들에 비해 많은 지적 성과를 내지 못함으로써 지식의 발전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럴 듯 해 보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오류가 있다. 표절이라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재능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D.H.로렌스(D.H. Lawrence)가 여러 여성작가들의 문헌을 표절한 사건이 그러하고(Spender, 1989:151-160), 이보다 평범하게는, 학자들이 자신들이 지도하는 학생들의 작품을 표절하는 경우가 그렇다. 

게다가, 표절자들이 피표절자들보다 대학 당국자나 학계 지도자로서 능력이 떨어진다는 증거는 없다. 아무리 봐도 이 주장(표절이 2류 지식인에게 출셋길을 열어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거의 없다. 이런 주장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표절을 단순히 ‘나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쁜 것이니까 당연히 나쁜 효과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편집자주 : 브라이언 마틴 교수는 권력에 의해 그 문제가 은폐되고 있는 부조리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이에 그는 ‘경쟁상황형 표절’이나 ‘텍스트표절’보다는 ‘제도화된 표절’에 더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브라이언 마틴 교수의 문제의식 자체는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를 한국에 적용할 때는 고민이 필요해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조국 교수와 JTBC 손석희 사장 등의 사례를 보더라도 누가 봐도 명백한 ‘경쟁상황형 표절’이나 ‘텍스트표절’조차도 은폐하고 왜곡하는 학계 실력자, 고위공직자, 특히 학교 연구진실성위원회의 행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와 그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브라이언 마틴 교수의 논의 핵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표절을 우려해야 할 어떤 실용적인 이유가 없는 데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지금까지 표절 문제를 둘러싼 모든 논점들이 (‘제도화된 표절’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드물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비난은 더 많이 받아온 ‘경쟁상황형 표절’에만 집중되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올 수 있다. 아예 표준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제도화된 표절’에는 전혀 다른 사고틀이 적용되어야 한다. 

‘제도화된 표절’의 문제점에 대해서 적어도 두 가지의 중요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제도화된 표절’은 엘리트들의 권력과 지위를 공고화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성과물에 대해 공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들의 신분과 권위는 강화된다. 반면에서 실제 작업을 한 하급자들은 그에 대한 공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신분과 권위도 향상이 되지 못한다.

만약 대통령이 연설을 “저는 지금부터 000가 작성한 원고를 읽을 것입니다”라고 시작한다면 이는 당연히 대통령의 아우라와 정권의 권위를 추락시킬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만약 기관이 제정한 중요한 정책이 사실은 하급자들의 성과라는 것이 공개된다면, 사람들은 왜 그 하급자들이 직접 정책을 설명하고 또한 집행하지는 않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둘째, ‘제도화된 표절’은 하급자들의 책임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급자들이 자신들의 성과물의 허점이나 부적절함에 대하여 공식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성과물에 대한 공식적인 책임은 어차피 타인이 진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자신들이 하는 일에 아주 진지하게 신경을 쏟을 가능성이 낮아진다.

성과물에 부족한 점들이 있을 때 그 책임은 당연히 공식적인 책임자인 상급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런 책임 기반 시스템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관료제의 엘리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보통 그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불평등한 권력의 구조에서는 하급자들과 고객들은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과 대적하는데 있어 자원이 부족하다. 웨인스타인(Weinstein, 1979)은 관료제를 전체주의적 정치 체제라고 규정하면서, 관료제에 대한 저항이나 반대는 탄압을 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본질적으로, 이 시스템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엘리트의 압박이 있어야만 반응한다. 관료제의 근로자들은, 아무 다수의 지적에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관료제 하의 직속상관들에게만 반응하게 되어있다.

그밖에도 ‘제도화된 표절’이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다른 비판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제도화된 표절이 혁신을 가로막고 사회적 소외를 조장하며 인재들의 재능을 비효율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일단 ‘제도화된 표절’이 계급구조를 강화하며 개인의 책임의식을 없앤다는 근거만으로도 이를 비판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다음 질문은 이렇다: ‘제도화된 표절’이 계급구조와 개인의 책임의식 부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이는 물론 정부나 기업과 같은 거대 사회적 기관들에 대한 개개인들의 평가에 달려있다. 

제도권 기관들의 기능이 사회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본다면 ‘제도화된 표절’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반면에 제도권 기관들이 사회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제도화된 표절’ 또한 바람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의 표절 Plagiarism in a self-managed society

공식적인 계급구조가 소멸된, 자주·자립·자치 공동체(self-managed)를 한번 상상해보기 바란다(Benello and Roussopoulos, 1971; Burnheim, 1985; Herbst, 1976; Ward, 1982). 

(편집자주 : 자주·자립·자치 공동체는 아나키스트의 이상향이다.)

이러한 사회 조직의 기반은 소규모의 투표나 합의제 하의 직접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한 지역 사회나 직장에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들은 관계된 당사자들이 총괄적으로 직접 내릴 것이다. 더 높은 단계의 조직체계는 대표자들과 연맹들을 통해서, 또는 임의적으로 선발한 기능적 단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세부사항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는 보다 민주적이고, 주민에 요구에 즉각 반응하는 사회적 체계가 국가와 대기업, 또는 정부의 관료조직을 대체하리라는 것이다.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는 권력은 분산될 것이고, 이를 개개인들이 평등하게 나눠 갖게 될 것이다. 또한 부의 불평등은 보통 권력의 불평등과 연관되어 생기므로, 권력이 분산된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는 심각한 부의 불평등은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도 표절은 존재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부분의 ‘제도화된 표절’이 애초에 이를 낳은 관료적 기관들과 함께 소멸할 것은 이미 명백하다. 공동 사업체에서, 가령 운송 체계를 고안하고 제조하는 공동 사업체에서, 공헌을 할당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디어에 대한 공헌 인정이 중요하기나 할까?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도 개개인의 공헌을 바르게 할당하는 것은 미래의 업무를 위해서 합리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공을 이어나가고 또 실패로부터 배우는데 있어 누가 무엇을 개발하고 검증했는지 아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이는 실용적이고 공리적인 공헌의 인정을 뜻한다. 누군가에게 단순히 명예를 주거나 입신(立身)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최대한의 이익을 위해서 각 개인의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 ‘제도화된 표절’의 문제는 감소할 수 있어도 ‘경쟁상황형 표절’의 문제는 지속될 수도 있다. 사회에 대한 개인의 공헌을 인정받는 것, 그리고 공정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에 대해 인정을 받는 일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창의성을 인정해주는 “자유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누군가 좋은 음악을 창작했을 때 설사 그에게 사회적 특권을 주지는 않더라도 그 창의성을 인정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회 말이다.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에서도 표절은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표절 문제가 어떤 심각한 윤리위반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에티켓 위반 문제로 인식될 것이다(‘매너의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보라. Elias, 1978). 

아이디어에 대한 인정이 경력의 개선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고, 공동체의 안녕에 대한 공헌이 더욱 중요시되기 때문에 창의적인 일꾼들이 자신들의 성과물에 대한 공헌을 챙기길 거부할 수도 있다. 이는 표절이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일부러 저지르는 일이 아닌, 체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단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주·자립·자치 공동체의 지지자들은 흔히 사회생활의 집단적인 성격을 지적한다. 어떠한 개인도 이전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타인의 성과에 기대지 않고는 성과를 낼 수가 없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일이 교육 및 운송 체계, 과거의 발명품, 시장 등에 의존하는 것처럼, 지적 창조력도 항상 이전의 아이디어, 문화, 소통 미디어, 청중 등으로부터 비롯해 나오며, 또 이로부터 확장된다.

지적재산권을 포함한, 독창성에 대한 독점적인 공헌을 인정해주는 일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시스템 하의 특질이다. 완전히 독자적인 생산이란 것이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에서의 신화는 자주·자립·자치 공동체 아래에서는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에는 단지 실수로 인한 표절 문제도 극도의 망신을 당할 수 있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Perrin, 1992). 허위중상 형태의 표절 혐의 제기는 피고발자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다(Klass, 1987). 그리고 (연구진실성 준수의 원칙을 세우자는 이유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들을 갖고서 하는 표절 검증은 자신과 적대적인 학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St.Onge, 1988). 

반면에 표절은 매우 심각한 형태의 고발이기에, 타당한 의혹제기를 피하기 위해서 고발을 당한 이가 고발자를 공격하는 경우도 빈번하다(Adnavourin, 1988; Mazur, 1989:190). 

‘경쟁상황형 표절’이 가지는 낙인의 효과를 줄임으로써 생길 수 있는 한 가지 이점은, 바로 이렇게 발화성이 높고 파괴적 결과를 낳게 되는 표절 고발의 문제점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논의한 가상의 사회인 자주·자립·자치 사회에서의 표절의 역할은 오늘날의 표절 문제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이 깊다. 이는 표절 문제가 당연히 중요한 문제는 맞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유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분석에 따르면, 현재 우리 사회가 ‘경쟁상황형 표절’에 관심이 지나치게 집중되어있고, 과도할 정도로 여기에만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표절의 만연함을 고려한다면, 표절 문제는 도로에서 과속운전을 한다거나 소득세를 탈세한다거나 하는 일과 같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면서 대체로 부주의로 인해서 일어나는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 옳다. 

대부분의 표절 사건은 “도둑질” 문제가 아니라 학적 예의범절 문제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표절 혐의 제기가 (연구진실성 준수의 원칙을 세우자는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다른 이유로서 대상화된 누군가를 점증적으로 무원칙하게 공격을 가하는 수단으로서의 위험한 무기가 되어버린다.

‘경쟁상황형 표절’의 경우와는 반대로, ‘제도화된 표절’ 문제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 ‘제도화된 표절’이야말로 권력의 불평등과 지적 착취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표절(plagiarism)이라는 용어는 아예 대필이라든지 상급자 관료들에게 저자 자격을 상납하는 일과 같은 관행을 묘사하는 용어로써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관행들에 대적하기 위해서다.

지적 착취의 상황에서는, 연구 활동에 대한 적절한 공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체제전복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계급화되고 관료화된 사회의 업무 구조는 ‘제도화된 표절’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개개인의 공헌에 대한 정당한 인정의 요구는 바로 이러한 구조에 대한 폭로요, 도전이기 때문이다.


감사의 말 Acknowledgments

필자는 본문 내용과 관련하여 랜달 콜린스(Randall Collins), 알 히긴스(Al Higgins), 개빈 무디(Gavin Moodie), 디나 웨인스타인(Deena Weinstein)으로부터 유용한 고언을 얻은 점에  대해서 감사함을 전한다. 또한 이 논문 작업을 가능하게 한 문화적 배경을 만들어준, 여기서 이름을 언급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역시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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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표절 문제를 다룬 어빙 헥삼 교수의 논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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