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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징용노동자들 “일본인은 매우 친절… 차별 느낀 적 없어” 육성 고백, 日 슈칸포스트 특종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대하는 일은 없었다”...“일본인 쪽이 한국인보다, 좋은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

일제시대 조선인 출신 징용노동자로 일했던 고령의 당사자들로부터 강제연행 등 현재 한국 종북좌익 세력이 주장하는 ‘노예노동’을 전면 부정하는 목소리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의 유력 주간지 ’슈칸포스트(週刊ポスト)‘는 12월 20·27일 합본호 “한국 전 징용공의 육성(肉声), 진정으로 돈에 의한 해결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韓国元徴用工の肉声 本当に金による解決を望んでいるのか)” 제하 기사를 통해, 기존에 우리 한국인들의 인식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제시대 일본에서의 징용노동 실상을 알리는 육성 고백을 가감없이 소개했다.


“징용공들이 진정으로 돈에 의한 해결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이날 인터뷰는 저널리스트인 아카이시 신이치로우(赤石晋一郎) 씨가 한국에서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이뤄졌다. 먼저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기사의 서두에서 “일·한 정상 회담을 앞두고 징용공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며 “'전 징용공(元徴用工)'들의 육성은 듣는 이에 따라 다른 핵심이 보이는 것”이라며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징용공 문제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말에 전 징용공이 일본 기업을 제소한 재판에서 한국 대법원은 닛폰 제철(日本製鉄, 전 신닛테츠스미킨(新日鉄住金))과 미츠비시 중공(三菱重工)에 대해서, 잇따라 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어 “이 판결을 계기로 한국 내에서는 징용공 문제가 ‘노예노동’의 역사였다는 논의가 들끓어, 서울 용산역 앞 등의 각지에 징용공 상(像)이 잇따라 건설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며 “그러한 상황의 해결을 목표로, 11월 말에 문희상 국회의장은 ‘기억·화해·미래 재단’의 설립을 제창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한 서울특파원을 인용해 “이 문 의장 안(案)은 일·한 기업과 개인에 의한 자발적 기부금을 베이스로 해서 재단을 설립한다는 것이었지만, 전 징용공에게 고액의 위자료를 지불한다는 방침을 둘러싸고는, 이론(異論)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서울특파원)고 덧붙였다.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한국 대법원에서는 일본 기업이 전 징용공에 대해서 1억 원(약 910만 엔)의 위자료를 지불하는 판결이 나왔다”며 “더욱이 문 의장 안에서는 전 징용공을 대상으로 1억~2억 원(약 910만~1,820만 엔)을 지불할 예정으로 알려져 위자료는 상승 일로를 걷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과연 당사자인 전 징용공들은 진정으로 돈에 의한 해결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인보다 일본인 쪽이 좋은 사람 많았다”

먼저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15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던 최한영(崔漢永) 씨(91)의 사연을 전했다. 

고령의 당사자인 최 씨는 슈칸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인 쪽이 한국인보다, 좋은 사람이 많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내가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던 시절, 일본인은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추억이 있어”, “나는 일본인이 좋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의지로 일본에 갔어. 당시, 부친이 상하이 사건을 일으켜서 체포돼, 징벌로서 일본에서의 강제노동을 명령 받았거든. 그러나 우리는 9명의 대가족이므로 아버지를 잃으면 곤란했어. 그래서 내가 대리로서 ‘일본에 간다’라고 손을 들었던거야. 연령도 18살로 속였지. 일본에서의 일했던 곳은, 후쿠오카 현(福岡県) 이이즈카 시(飯塚市)에 있는 미츠비시 탄광(三菱炭鉱)이었어. 탄광에는 나 이외에도 몇 백명이나 동원된 조선인이 있었어.” (최 씨)


최 씨는 일본 탄광에서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상황이 좋지는 않았지만 조건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일했다는 것이 최 씨의 고백이다.


“나는 갱도를 만드는 일을 주로 했었지. 현장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일하고 있었어. 휴식은 한 달에 하루 아니면 이틀이었지만, 일본인도 조선인도 같은 노동 조건에서, 같은 임금을 받고 있었어. 조선인이기 때문이라고 차별이나 폭행을 받았던 일도 없었어. 특히 나는 15살로 어렸던 점도 있어서 상사인 사키야마(サキヤマ; 경험이 풍부한 탄광 작업원) 씨(일본인)가 매우 귀여워했어. ‘내 딸과 결혼하지 않을래?’라고 말을 들은 적도 있어."(최 씨)


즉 최 씨는 자신이 일을 할 때에 일본인으로부터 차별을 느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 최 씨는 자신은 일본인에게 악감정이 없다고 말하면서, “징용공에게 위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전 징용공이) 재판을 제기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이 고령으로 돈을 손에 넣어도 어쩔 수 없을 거야. 나는 돈도 필요 없고, 보상을 하길 원하지도 않아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상 이상의 답변에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그 분명한 말씀은, 위자료 있는 징용공 문제를 말하는 문재인 정권에, 조용히 이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며 본인의 감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대하는 일은 없었다”

한편,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20살 때 여수군청으로부터의 징용 명령을 받고 사가 현(佐賀県)으로 건너갔던 김병철(金炳鐵) 씨(96)의 사연도 같이 전했다. 

"내가 파견된 곳은 사가 현 니시마츠우라 군(西松浦郡)의 우라사키(ウラサキ) 조선소였지. 나는 자재과에 속해, 공장 내에서 나오는 고철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었어. 모은 고철은, 철 공장으로 수송돼 다시 제철(製鉄)되는 것이지. 조선소에서 일하는 2,000명 중, 700명이 조선인이었어. 아침 9시부터 4~5시 경까지 일했고, 일요일마다 휴식은 있었어."(김 씨)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우라사키 조선소란, 당시, 사가 현에 존재한 카와나미 공업(川南工業)의 우라사키 조선소(浦崎造船所)라고 생각된다”면서, “군수 공장이었던 우라사키 조선소에서는 2등 수송함이나 인간 어뢰 카이류우(海龍) 등이 대량 건조되고 있었다”고 설명헀다.

김 씨는 당시가 전쟁 말기였기 때문에 일본의 식료 사정이 어려웠다고도 전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을 뿐 조선인이어서 특별히 어려웠던 적은 없었으며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폭력과 학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거기는 부식이 좋았기에 빈번히 맛있는 방어라든가 날치가 1~2마리 나왔어. 그래도 원칙은 쌀과 보리를 섞은 밥을 한 그릇밖에 먹을 수 없었어. 그래서 배가 고팠어. 어느 날, 밥을 훔쳐 내 산속에서 먹었어. 그것이 들켜, 일본인 관리인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었어. 그래도, (룰을 깼던 것이므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대하는 것 같은 일은 없었어”(김 씨)


이에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김 씨의 증언 또한, 한국 내에서 말하고 있는 '피해자 상(像)'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징용 현실이 노예노동과는 거리가 있음도 지적했다.

“나는 노동이 강제적이었다거나, 노예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때는 (식민지 시대이므로) 일본인의 명령이 전부이기 때문에, 말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어. 징용공 시대가 좋은 추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어로 직원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 하지만 카고시마(鹿児島)나 미야자키 현(宮崎県) 사람들은 방언이 심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웃음)."(김 씨)


“왜곡된 역사 논쟁 속에서 당사자들의 소리는 감쪽같이 지워지고 있다”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강채구(姜彩九) 씨(92)와 손의봉(孫義奉) 씨(91)와의 인터뷰 내용도 전하면서 “파견된 장소에 따라 노동 환경이나 실적이 다르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강 씨와 손 씨는 동향으로 10대 무렵에 징용 명령을 받아, 함께 오오사카(大阪)의 쿠보타 철공소(クボタ鉄工所)로 보내진 것으로 전해졌다. 

“500명 정도의 조선인이 쿠보타 철공소로 보내졌어. 일본인으로부터의 차별이라든가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는 기억은 없어. 쿠보타에서의 일은 철재를 나르는 일 뿐이었어. 그보다도 무서웠던 것은 미군의 공습이었어. 밤에 미국 비행기가 모습을 보이면, 공습 경보가 울려 모두 도망치려고 허둥댔지. 도저히 일을 배운다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어"(손 씨)


이번 슈칸포스트의 인터뷰에 응한 고령의 징용노동자들은 위자료가 화두가 되고 있는 한일간 징용 문제와 관련, 언급되고 있는 위자료 액수가 고액이어서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다는 심정도 고백했다.


“공습이 심해지고 나서는, 공원(工員)은 뿔뿔이 흩어져, 나는 효우고 현(兵庫県)의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노숙 생활을 보내야 했어. 그래서 대법원 판결로 전 징용공에 대해서 위자료 1억 원의 지불 명령이 나왔다고 들으면, 나는 그 금액을 받을 만한 일을 일본에서 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보상은 하길 원하지만, (고액의 보상금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돈을 빨아들이는 청소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지(웃음)."(강 씨)


아카이시 신이치로우 씨는 “전 징용공의 입에서는, 모든 사람이 ‘노예노동’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다”며 “왜곡된 역사 논쟁 속에서 당사자들의 소리는 감쪽같이 지워지고 있었다”고 기사를 마무리 했다. 


* 본 기사의 내용은 페이스북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회원 강성표)에 올라온 해당 기사 번역 자료를참고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그동안 한국의 좌우파 언론들은 중국과 북한의 갓끈전술 또는 이간계에 넘어가 늘상 일본의 반공우파를 극우세력으로, 혐한세력으로만 매도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공우파는 결코 극우나 혐한으로 간단하게 치부될 수 없는 뛰어난 지성적 정치집단으로, 현재 문재인 정권을 배출하며 중국과 북한에 경도된 한국이 경계하거나 대비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국외자와 제 3자의 시각(또는 devil's advocate의 입장)에서 한국의 그 어떤 언론보다도 도움이 되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일본에도 아사히와 마이니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디어워치는 한국 외신 시장에서 검열되어온 미국의 자유보수 세력의 목소리는 물론, 일본의 자유보수 세력의 목소리도 가감없이 소개해 독자들의 국제감각과 균형감각을 키워드릴 예정입니다. 한편, 웹브라우저 구글 크롬은 일본어의 경우 사실상 90% 이상 효율 수준의 번역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의 고급시사지라도 웹상에서는 한국 독자들이 요지를 파악하는데 전혀 장애가 없는 번역 수준입니다. 미디어워치는 한국 독자들이 일본쪽 외신을 접하는데 있어서, 편향되고 무능한 한국 언론의 필터링 없이 일본 언론의 정치적 다양성(특히 자유보수 세력의 목소리)과 뛰어난 정보력(특히 중국과 북한, 동아시아 문제와 관련)을 가급적 직접 경험해볼 것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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