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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제22차 위안부상 철거촉구 집회, “위안부 증언 번복, 윤미향은 해명하라”

취업사기를 거론했던 위안부의 증언, 20여년 뒤 은근슬쩍 강제연행으로 뒤바뀐 이유는? 윤미향이 해명해야

제22차 위안부상 철거 촉구 정기집회 및 기자회견이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및 위안부인권실천연대(이하 위인연) 주최로 5일 정오,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이날 김병헌 공대위 공동대표는 취업사기 등을 거론했던 주요 위안부들의 증언이 전 정의연(정대협) 대표인 윤미향 씨 등에 의해서 지난 20년 사이 강제연행으로 조작된 것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최덕효 공대위 공동대표, 위인연 박세원 대표 등도 정대협의 극단적 여성주의 지향과 역사왜곡 문제를 규탄하는 자유연설을 했다.

정대협이 매주마다 수요집회를 주최하는 위안부상 바로 근처에서 열린 이날 집회는 폴리스라인을 사이에 두고 위안부상을 에워싼 ‘반일행동’ 운동권 학생들과 대치전선을 형성, 내내 긴장감이 조성됐다. 반일활동가 백은종 씨, 오천도 씨, 홍정식 씨 등도 총출동, 집회장소 주변을 멤돌며 집회참가자에게 욕설, 야유 등을 퍼붓기도 했다. 다행히 경찰의 강력한 질서유지로 이날 집회는 별탈없이 마무리됐다.  (이하 사진은 공대위 제공)









[기자회견문] 위안부 증언 번복, 윤미향은 해명하라!


1991년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이 자신의 위안부 이력을 폭로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불씨를 당긴 후 오늘날까지 30년 동안 ‘위안부’는 국내로는 갈등과 대립의 원인으로, 대외적으로는 한•일 외교의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김학순씨의 위안부 이력 폭로를 기념하여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라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전국 도처에는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이름의 위안부상이 무려 125기나 세워졌다. 반만 년 역사에 명멸하였던 수많은 위인들 중에 위안부처럼 동상을 세워 추앙한 적이 있었던가? 위안부가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무슨 일을 하였기에 온 세상을 위안부상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인가?


위안부상으로 대변되는 반일감정몰이는 마침내 대일 외교를 파탄지경으로 몰아갔고,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려는 지식인이 상아탑에서는 친일 망언자로 핍박을 받고, 거리에서는 백주 대낮에 테러를 당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은 ‘친일망언처벌법’을 들먹거리며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다. 위안부는 이제 5.18, 세월호와 함께 성역이 되고 금기어가 되었다. 目下 대한민국은 이들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아야 하는 동토(凍土)의 왕국이 되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가 국내외에 갈등과 분열을 초래한 데는 1990년대 초부터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을 이끌어온 윤미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윤미향의 저서 『25년간의 수요일, 2016』에는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식민지 조선과 대만, 중국 등 일본군의 점령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위안부 모두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로 일관되게 기술되고 있다. 이는 대다수 위안부의 초기 증언과 상반된 것으로 어떤 연유로 증언이 번복되었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여성인권과 평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위안부 김학순, 김복동, 길원옥, 이용수 등 위안부의 증언 번복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바이다.


1991년 위안부 김학순은 언론에 나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폭로하여 위안부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한 김학순(1924~1997)씨에 대해 윤미향은 “김학순씨가 열일곱 살 때 중국 베이징에서 납치되어 일본군 300여 명이 있는 소부대로 끌려갔다.”<25년간의 수요일 p.138>고 하였다. 이 글대로라면 김학순씨는 베이징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어 일본군 부대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3년에 발행된 『[증언집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하 정대협 증언집으로 약칭)』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1924년에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김학순씨는 생후 백일도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열 네 살 되던 해에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열다섯 살 때 기생을 키우는 양아버지에게 40원에 팔려갔다. 양아버지 집에는 이미 먼저 온 또래의 양녀 한 명이 더 있었다. 김씨는 다른 양녀와 함께 평양기생권번에 보내져 2년 동안의 기생 교육을 마친 다음 국내 영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19세라는 나이 제한에 걸려 국내영업이 좌절되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양아버지는 중국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며 두 여인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게 된다.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김학순씨는 별을 두 개 단 장교와 군인들에게 납치당했다고 증언하였으나 김씨를 데리고 간 곳이 군부대가 아닌 중국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빈 집이었다는 점, 거기에서 두 여인을 강간했다는 점, 다음날 아침 김학순씨가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자 장교라는 남자가 ‘이제 그런 옷은 여기서 입지 못한다.’고 한 점, ‘우리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을 일본군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1991년 폭로 당시 김씨는 “나를 데리고 갔던 양아버지도 당시 일본 군인들에게 돈도 못 받고 무력으로 나를 그냥 빼앗기는 것 같았다.”<1991. 8. 15. 한겨레>, “양녀들을 이용해 일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했던 양아버지는 일본군의 총칼에 돈한 푼 받지 못하고 이들을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1991. 8. 15. 동아일보>는 당시 보도를 보더라도 김씨를 끌고 간 인물은 군인이 아니라 인신매매범 또는 포주임이 분명하다.


비교적 늦게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하였지만 노래를 잘 불러 음반까지 내고, 자신의 이름을 건 길원옥평화상의 주인공인 길원옥(1928~ )에 대해 윤미향은 길씨의 증언이라며 “제 나이 열세 살에 일본은 저를 공장에서 기술 가르쳐 주고, 돈도 벌게 해 준다며 속여서 부모한테 말도 못하게 하고 바로 끌고 갔습니다.”<25년간의 수요일 p165>라고 하였는가 하면,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길원옥 할머니 같은 경우 13살에 평양에서 끌려가셨다.<2020. 4. 3. 오마이뉴스>”고 하였다. 윤미향의 말대로라면 길원옥은 13살 때에 평양에서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때 평양기생권번을 다녔던 길원옥은 열세 살에 감옥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푸줏간에 20원에 팔렸다가 돈을 번다고 푸줏간 아주머니 소개인지 친구 소개인지 모르지만 다시 팔려서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길씨가 성병에 걸려 더 이상의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주인[포주]은 한국 사람을 딸려 귀국시켰는데, 이때가 15세 무렵으로 이미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귀국한 길씨는 군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권번 친구들을 만나 ‘중국에 가면 편안하고 돈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함께 평양역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북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술집에서 노래나 하고 술을 파는 줄 알았을 뿐 위안소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길씨의 증언에 따르면 13세에 만주로 갈 때나 15세 무렵에 중국으로 갈 때나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것이지 누구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다.


‘김복동’이라는 영화와 김복동 센터 건립으로 널리 알려진 김복동(1926~2019)에 대해 윤미향은 김씨를 강제로 끌고 간 사람을 ‘한 일본군과 마을 이장’<25년간의 수요일 p43>, ‘일본 군복을 입은 군속’<2020. 3. 11. 수요집회 발언>이라 하였다.


하지만, 김복동씨는 증언집에서 “어느 날 우리 동네의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 사람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정대협 증언집2 p85>고 하여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이라고 하였을 뿐 그 신분을 밝힌 바가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증언에서 김씨는 “결국 그러게 해서 나는 끌러가게 되었다. 그 일본 사람은 나를 버스에 태워 부산까지 데려갔다.”, “부산서 배를 탈 때부터 나를 데려갔던 일본 사람과 부산에서 우리를 지킨 조선인 남자가 우리를 인솔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간 일본사람과 조선 사람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관리인은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일본에서 자란 40대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는 이 사람을 ‘니상(오빠)’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마음에 드는 위안부를 골라 데리고 자기도 했으며,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고 욕을 했다. 위안소에서는 항상 일본말을 썼다.<이상 정대협 증언집2 p84~p99>”고 증언했다.


김복동의 구술 자료 어디에도 일본군이나 군속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증언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양산에서부터 부산, 시모노세키, 대만, 광동,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홍콩 등지를 이동하면서 계속 김복동씨를 비롯한 위안부들을 끌고 다닌다. 결국 김복동을 끌고 간 사람은 ‘정신대’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공무(公務)를 사칭한 일본인과 조선인 포주였던 것이다.


이용수(1928~ )는 2017년 5월 성주 미군의 성주 사드 기지 설치에 반대하며 ‘어떤 미국 연놈이 우리 대한민국에다가 사드,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일갈했으나 그로부터 6개월 뒤 내방한 트럼프 미대통령과 포옹한 위안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윤미향은 이용수를 언급하며 “나는 밤에 자다가 강제로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닌 이용수입니다.<25년간의 수요일 p48>”라는 발언을 인용했다.


하지만, 이용수는 1993년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 남자가 건네준 옷 보퉁이 속에 있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마음이 혹해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증언집1 p124>’고 증언하였다.


이상 상기 4인의 증언을 보면 애초에 양아버지에 의해(김학순), 공무를 사칭한 사기범에 의해(김복동), 중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유혹에 의해(길원옥),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에 홀려서(이용수)라고 하였으나 20여 년 사이에 모두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고 바뀌었다.


이에 우리는 윤미향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윤미향은 상기 4인의 증언이 20여 년 사이에 왜 바뀌었는지 해명하라!

2. 윤미향은 상기 4인의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는 증거를 제시하라!



2020. 5. 5.


위안부상 철거와 수요집회 중단을 촉구하는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 위안부인권회복실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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