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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2)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1)





   8.2 도쿄재판

        8.2.1 판결

        8.2.2 ‘인도에 대한 죄’와 소인


9 일본과 중국의 전후처리와 전쟁 배상

   9.1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9.2 일화평화조약(1952)

   9.3 일중공동성명(1972)


10 명칭의 종류와 변천

   10.1 도쿄재판

   10.2 연구서 등의 표기

   10.3 교과서 속의 표기

   10.4 일본 국외에서의 표기


11 역사상의 ‘난징대학살’


12 난징사건을 다룬 작품

   12.1 소설

   12.2 영화

         12.2.1 전시중의 기록영상을 사용한 영화

         12.2.2 일본영화

         12.2.3 중화권영화

         12.2.4 구미영화

   12.3 만화

   12.4 음악


13 참고문헌




‘난징사건(南京事件)’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2)

 



8.2 도쿄재판(東京裁判)

1946년 5월 3일에 개정한 도쿄재판에서는 ‘제2류 살인죄(第二類殺人の罪)’ 소인(訴因, 소를 제기한 이유) 45로서, 피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하시모토 긴고로(橋本 欣五郎), 하타 슌로쿠(畑俊六), 히라누마 이치로(平沼騏一郎), 히로타 고우키(広田弘毅),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기도 고이치(木戸幸一),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무토 아키라(武藤章), 스즈키 데이이치(鈴木貞一),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에 대해 소(訴)가 제기됐다. 1937년 12월 12일 이후, 소인(訴因) 2로서, 조약을 위반하고 난징을 공격하여 국제법에 반한 주민 학살을 일본군에게 불법명령하고 이를 허용함으로써 불법적으로,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만명의 중화민국 일반인 및 무장병을 살해 및 살육했다는 내용이다. 

그 외 1938년 10월 21일 이후의 광동(広東) 공격(소인 46), 1938년 10월 27일 전후의 한커우(漢口) 공격(소인 47), 1944년 6월의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에서의 호남성 장사(長沙), 형양(衡陽) 공격, 11월의 광서성 구이린(桂林), 류저우(柳州)에 대한 공격과 살육에 대해서도 소가 제기됐다. (소인 48-50)


‘제3류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第三類通例の戦争犯罪及び人道に対する罪)’ 소인(訴因) 55에서는 피고 도이하라, 하타, 호시노, 이타가키, 가야, 기도, 기무라,고이소, 나가노, 오카, 오오시마, 사토, 시게미츠, 시마다, 스즈키, 도고, 도조, 우메즈가 일괄적으로 소추되었다.

1941년 12월 7일에서 1945년 9월 2일까지 미국, 영국연방, 프랑스, 네덜란드, 필리핀, 중화민국 (1931년9월18일 이후)의 수만명의 포로와 일반인에 대하여 전쟁의 법규관례상 의무를 무시하여 전쟁법규에 위반했다는 내용이다.

다만,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소추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황족이기 때문이다. 황족의 전쟁범죄는 묻지 않겠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방침에 의거한 것이다.

1947년 11월 24일, 피고 전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었다.

검찰측 증인(検察側証人)

- 미국인 선교사 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는 일본병에 의한 살해, 강간, 강도에 대하여 증언했다.

- 재판개시전인 1946년 3월 31일의 선서구술서에서 틸만 더딘(Frank Tillman Durdin) 뉴욕타임스 기자는 함락 2,3일후에 중국병 40~50명이 단체로 끌려나가 양자강 근처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총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다만 한커우에서 잔학사건이 있었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자신은 목격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나 검찰 측이 이 증언을 제출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변호측 증인(弁護側証人)

도쿄재판에 출정한 일본인 증언은 선서한 후에 증언했으며 검찰관에 의해서 반대심문이 진행되었다. 다만 중국인 증인에 대해서는 반대심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상하이파견군 법무관 겸 검찰관인 츠카모토 고지(塚本浩次)는 담당한 안건의 대부분이 산발적 사건이며 살인은 2~3건, 방화범은 집단적 학살범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당시 정보수집이 주요 업무였던 중지나(中支那) 방면군 참모 나카야마 야스히토(中山寧人)는 부녀자에 대한 폭행 및 약탈은 소규모로 발생하였으나 시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은 절대로 없었다고 선서공술서에서 증언했다.

- 나카자와 미츠오(中澤三夫) 제16사단 참모장은 조직적 집단약탈 및 강간은 없었으며 약탈명령을 내리거나 묵인한 적도 없다고 증언했다. 산발적 풍기범은 있었지만 처벌을 받았으며 약탈과 파괴는 대부분 퇴각하는 중국군과 침입한 궁민(窮民, 빈민)의 상투수단이었다는 말을 난징시민한테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피고의 진술(被告の陳述)

피고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전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은 검찰측이 주장하는 대규모 학살은 종전후에 미군 방송을 통해서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했으며 그러한 사실은 결코 없었다고 증언했다. 일부 젊은 장병들에 의한 폭행이 있었으나 즉각 처벌하였으며, 전란 속에서 중국병사 및 일부 불령(不逞)한 민중이 폭행과 약탈을 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악행을 일본군의 죄행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실에 반한다고 진술했다. 

판결(判決)

판결은 1948년 11월4일, ‘제2장법(第二章法, C) 기소장’, 11월11일에 ‘제8장 통례의 전쟁범죄, 난징에서의 학살(The Rape of Nanking)’, 11월12일 ‘제10장 판정’이 낭독되었다.

기소장(起訴状)

‘기소장’에서는 소인 45에서 소인 50까지(소인4 4는 제외)의 소인은 공격의 불법성인지 전쟁법규 위반인지 소추하는 부분이 명확하지 않고 애매하다, 전쟁법규 위반은 소인 54, 55에서 중복되고 있다, 소인 39에서 소인 52까지(소인 44는 제외)에 대해서는 판정할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일본군의 전쟁범죄(日本軍の戦争犯罪)

 ‘통례의 전쟁범죄(잔학행위)(通例の戦争犯罪(残虐行為)’로서는 아래와 같은 사실이 인정되었다.

1937년 12월 아침, 일본군이 난징시에 접근하자 100만주민의 절반 이상 및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를 제외한 중립국인들이 시외로 피난했다. 약 5만명의 잔류군 이외의 중국군은 철퇴했다. 12월 12일 밤, 일본군이 남문으로 다가오자 중국군은 북문과 서문을 통해 시외로 도망가거나 무기와 군복을 포기하고 안전구로 피난했다. 12월13일 아침, 일본군이 입성할 때, 모든 저항은 멈춘 상태였다. 목격자에 의하면 일본병은 시내에서 남녀노소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으며 강간,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 일본점령후 2~3일동안에 12000명의 중국인 비전투원이 사망했다.

- 점령 직후 한달동안 약 2만건의 강간사건이 발생했다. 희생자와 가족들이 반항하자 살해했다. 어린 소녀와 늙은 노녀까지 강간당했으며 비정상적인 가학성욕에 의한 강간사례가 다수 있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강간후에 살해당했으며 시체는 절단되었다.

- 일본병은 원하는 물건을 모두 약탈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일반인을 불러서 멈춰 세워서 가치있는 물건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은 사살했다. 많은 주택과 상점을 약탈했으며 트럭에 물건을 실어 가져갔다.

- 일본병사들은 점포 및 창고를 약탈한 후 방화했다. 상점가인 태평로, 상업구역, 일반인 주택을 병사들이 불태웠다. 방화는 6주간 지속되었으며 난징시 전체의 약 3분의 1이 파괴되었다.

- 중국병사가 군복을 벗어던지고 주민들속에 숨어 들어갔다는 이유로 조직적인  대량살육을 저질렀다.

- 중국의 일반인은 성밖으로 연행되어 기관총과 총검으로 살해되었다. 징병연령대의 중국인 남성 피해자는 2만명 이상이다.

- 난징시의 주위 200 중국리(200中国里, 66마일, 약1만km) 이내의 부락에서 유사한 폭행이 발생했다.

- 피난민 5만7천명 이상이 수용되었으며 수용중에 기아와 고문으로 다수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중 대부분은 기관총과 총검으로 살해되었다.

- 항복한 중국병사들을 72시간 이내에 양자강(揚子江)변에서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포로 3만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며 재판조차 거치지 않고 학살당했다.

- 일본군이 점령한 후 첫 6주간에 난징과 그 주변에서 살해된 일반인 및 포로의 총수는 20만명 이상. 매장대원의 기록에 의하면 155,000구라고 하는데 이는 불태워버린 시체나 양자강에 버린 시체를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 일본의 대사관원은 12월 14일에 “군은 난징공격을 결정했으나 대사관은 말릴 예정이다”라고 난징 국제안전지대 위원회에 통고했다. 질서유지를 위한 일본군 헌병은 17명이라고 전했다. 일본대사관의 군을 향한 항의에는 아무 결과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대사관원은 선교사가 일본내에서 선전하여 여론을 통해 일본정부와 군을 억제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마이너 설 베이츠의 증언에 의하면, 함락후 2주반 내지 3주간에 걸쳐 폭력이 아주 심했고 6주~7주 동안 심각했다. 안전구 비서인 스마이스는 최초 6주간은 매일 2통의 항의를 제출했다.

- 피고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는 18일, 전범자 위령제 성명에서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명의 강절(江浙)지방의 무고한 민중들이 입은 손해에 대하여 깊은 동정의 마음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잔학행위에 대하여 들었다는 것은 마츠이 이와네도, 무토 아키라(武藤章) 대좌도 인정했다. 잔학행위에 대하여 각국 정부가 항의한 사실도 마츠이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구제를 위한 대책을 취하지 않아 마츠이 이와네의 입성후에도 몇주간은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

- 난징의 외교단, 신문기자, 일본대사관원은 난징학살사건을 보고했다. 일본 공사 이토 노부후미(伊藤述史)는 난징의 일본대사관 및 외교단의 보고를 받아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広田弘毅)에게 보고했다. 히로타 고키는 육군성(우메츠(梅津) 차관)에게 그 내용을 보내고 일본수뇌부 연락회의에서 이 문제가 토의되었다. 잔학행위에 대한 신문보도가 확산되어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도 신문을 통해 읽었다고 한다. 전세계에서 보도된 내용과 여론의 영향을 받고 일본정부는 마츠이 이와네 등을 소환했으나 처벌은 하지 않았다. 마츠이 이와네는 하타 슌로쿠(畑俊六)와 교대한 것은 난징에서의 잔학행위때문이 아니라 군무종료로 은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 일본군의 폭행은 고생 끝에 함락시킨 후의 일시적 행위로 보고 면책할 수가 없다. 강간, 방화, 살인은 공략후 6주간, 마츠이와 무토의 입성후 4주간 대규모로 계속되었다.

- 1938년 2월 5일, 수비대 사령관 아마야 소좌는 잔학사건이 해외에서 보도됨으로써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외국인이 선동하고 있다며 외교단을 비난했다. 이 성명은 일본정부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8.2.1 판정(判定)

피고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소인(訴因) 1, 27, 29, 31, 32, 35, 36, 54, 55에 의하여 소추되었으나 공모죄를 구성하는 공동모의에 관한 증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 1937년과 1938년의 중국에서의 마츠이 이와네의 군무(軍務)를 침략전쟁으로 간주할 수 없다. 소인 27에 대해서 검찰은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중국군이 철퇴하여 무방비가 된 도시를 점령후, 일본군은 무력한 시민에 대한 끔찍한 잔학행위(atrocities), 대량학살, 살인, 강간, 약탈, 방화를 장기간 실시했다. 잔학행위는 일본인 증인이 부정했으나 다양한 국적의 중립국 목격자에 의한 증언 및 기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뢰성은 압도적이다. 

잔학행위는 1937년 12월 13일에서 1938년 2월초까지 계속되어 수천명의 부인이 강간당했으며 10여만명의 사람들이 살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잔학행위가 최고조로 치닿은 12월17일에 입성한 마츠이 이와네는 이러한 폭행을 알고 있었다. 헌병대와 영사관원의 보고를 받았다고 마츠이 이와네도 인정하고 있다. 마츠이 이와네는 사건을 알고 있었으나 폭행을 멈추게 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점령전에 엄정(厳正)을 명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지휘관인 피고에게는 사건의 책임이 있으며 군을 통제하고 난징시민을 보호할 의무와 권한이 있었다. 의무의 불이행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이 있으며 소인 55에 대하여 유죄, 소인 1, 27, 29, 31, 32, 35, 36, 54에 대해서는 무죄로 한다.


1948년 12월 23일,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처형되었다. 같은 날 난징사건 당시의 외무대신 히로타 고우키(広田弘毅)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부작위로 처형되었다(A급전범). 그 후 마츠이 이와네에 대한 판결 및 도쿄재판과 난징재판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의문점을 다수의 연구자가 제출했는데 검찰측 주장 및 판결에서의 사실인정에 대한 의의(疑義)도 나와 논쟁이 되고 있다.

이상 난징재판과 도쿄재판의 문제점과 비판에 대해서는 '난징사건 논쟁 # 전후 전범재판의 검증'을, 또한 여러 연구를 통한 피해사실과 관련해서는 '난징사건 논쟁 # 주요논점'을 참조하라.

8.2.2 ‘인도에 대한 죄’와 소인(「人道に対する罪」と訴因)

뉘른베르크 재판의 기본법인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서 처음으로 규정된 ‘인도에 대한 죄(人道に対する罪)’가 난징사건에 적용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난징사건에서 연합군은 어디까지나 교전법 위반으로 피고를 문책한 것이며 ‘인도에 대한 죄’가 적용된 것은 아니다.

도쿄재판의 소인(訴因, 소를 제기한 이유)에는 ‘살인’이 있다. 뉘른베르크, 극동헌장에는 기재가 없으나 이는 맥아더가 “살인과 동등한” 진주만 공격을 추궁하기 위한 독립소인으로서 검찰측에 요구하여 추가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인도에 대한 죄’는 이 재판의 소인으로서 단독적인 의미가 없어졌다고도 말한다. 게다가 1946년 4월 26일의 헌장개정으로 ‘일반주민에 대한’이라는 문언이 삭제되었다. 최종적으로 ‘인도에 대한 죄’가 기소방침으로는 남은 이유는 연합국 측이 뉘른베르크재판과 도쿄재판간의 통일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며 법적근거가 없는 소인인 ‘살인’의 보강근거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소방침에 대하여 네덜란드와 필리핀(전후 미국의 식민지에서 독립) 및 중화민국 측에서는 앵글로색슨 색깔이 너무 강하다고 비판했다. 중화민국측 검사인 샹저쥔(向哲濬)은 난징사건의 살인 소인뿐만이 아니라 광둥, 한커우에서의 잔학행위를 추가시켰다. (소인 46-50)

도쿄재판에서의 소인은 총 55개 항목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4개 항목) 크게 나누면 제1류 ‘평화에 대한 죄’ (소인 1-36), 제2류 ‘살인’ (소인 37-52), 제3류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 (소인 53-55)의 세 종류로 분류되며, 난징사건은 이 중에서 제2류 ‘살인’(소인 45-50)으로 취급되었다.


9 일본과 중국의 전후처리와 전쟁배상(日中の戦後処理と戦争賠償)

9.1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

조선전쟁(朝鮮戦争,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하여 연합국은 모든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국공내전(国共内戦)의 패배로 인해 장제스(蒋介石) 등 중화민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대만으로 이전했으며 그와 동시에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한 상태였다. 두 개의 국가로 갈라진 양국은 미국이 중화민국을, 영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따로따로 승인한 결과 불참했다. 일본은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연합국에 아래와 같이 배상했다.

- 필리핀에 5억5천만 달러
- 베트남에 3900만달라 상당의 역무(役務) 및 생산물
- 연합국 영역내의 약 40억달러(일본엔화로 1조4400억엔, 1951년의 일반회계세입은 약 8954억엔)의 일본인 자산은 연합국이 몰수하여 수익을 각국 국민들에게 분배.
- 중립국 및 연합국의 적국에 있는 재산과 그 등가의 자금으로 450만 파운드를 적십자국제위원회에 인도하여 14개국 합계 20만명의 일본군의 전 포로들에게 분배.
- 일본의 재산은 조선에 702억5600만엔, 대만에 425억4200만엔, 중화민국 동북에 1465억3200만엔, 화베이(華北)에 554억3700만엔, 화중(華中)과 화난(華南)에 367억1800만엔, 기타 가라후토(樺太, 사할린),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에 280억1400만엔, 합계 3794억9900만엔이 연합국에 인도되었다.

1945년 8월 5일의 외무성 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재(在)중화권 자산은 중화민국에 921억5500만엔, 만주에 1465억3200만엔, 대만 425억4200만엔으로 합계 2812억2900만엔이며 이는 현재 가치로 56조2458억엔이 된다. (기업물가지수 전전(戦前)기준)


이처럼 연합국 국내뿐만이 아니라 중국, 대만, 조선에 있었던 일반국민의 재외자산까지 접수되었으며 중립국에 있었던 일본국민의 재산까지 배상을 위한 원자(原資)로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가혹한 부담에 대한 보답’으로서 대상국의 청구권은 포기되었다.

9.2 일화평화조약(1952)(日華平和条約)(1952)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의 다음 해인 1952년 4월 28일에는 타이페이에서 일화평화조약(日華平和条約)이 조인되어 중화민국이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를 포기했다. 교환공문에서는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하에 현재 있거나 또는 향후에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영역’이 적용범위로 규정되었다.

9.3 일중공동성명(1972)(日中共同声明)(1972)

1971년 10월 25일, 유엔에서 ‘알바니아 결의’가 채택되어 중화민국이 중국에 대한 대표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박탈당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대표권을 얻었다. 1972년 2월에 닉슨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실현되어 미중 접근과 병행한 일중국교정상화도 진전했다.

1972년 9월에는 일중공동성명(日中共同声明)이 저우언라이(周恩来) 국무원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내각총리대신에 의해 조인되었다. 성명 제5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국과 일본,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청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The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declares that in the interest of the friendship between the Chinese and the Japanese peoples, it renounces its demand for war reparation from Japan.)’라고 선언했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일전쟁배상청구를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1978년 8월 12일에는 일중공동성명에 의거하여 일중평화우호조약(日中平和友好条約)이 체결되었다. 제1조에서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에 대한 상호불간섭’을, 제2조에서 아시아, 태평양지역 이외의 지역에서 패권을 요구하지 않을 것을 규정했다. 1979년에는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일본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하여 정부개발원조(政府開発援助, ODA)를 실시하여 1979년부터 2013년까지 유상자금협력(엔 차관), 약 3조 3164억엔, 무상자금협력 1572억엔, 기술협력 1817억엔, 총액 약 3조 6553억엔의 ODA를 실시했다.

일본정부는 이들 3개의 조약 및 성명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4조b, 일화평화조약 제11조, 일중공동성명 제5항)에 의하여 일중간의 청구권은 개인청구권 문제까지 포함하여 소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장쩌민(江沢民)도 1992년 4월 1일, 일본의 침략전쟁에 관한 진실을 추구할 것이며 엄숙히 대처하겠으나 일중공동성명의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또한 화인(華人, 중국인) 노무자에 대한 개인배상이 쟁점이 된 니시마츠건설(西松建設) 회사 사건에 관한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2007년 4월 27일)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전쟁중에 발생한 개인 청구권을 포함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으며, 일중공동성명도 마찬가지라고 판결했다.*

[*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은 “(일중공동성명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과 다른 처리가 이루어진 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한편,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34조에서는 제 3국의 의무와 권리를 해당국의 동의가 없이는 창조할 수 없다고 하고 있으며, 35조에서는 해당국이 서면으로 해당 의무를 명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 한하여서만 이를 의무로 정한다고 하고 있다. 중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일중공동성명의 틀을 긍정하고 그 외 의무를 서면으로 확약한 적이 없다.]

또한 ‘충칭대공습(重慶爆撃)’ 소송에 관한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2015년 2월 25일)은 국제법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이며, 국가조차 전쟁피해에 관해서는 국가책임을 규정하는 국제법만에 의거하여 배상을 받을 수 없으며 배상에 관한 국가간 외교교섭을 통하여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개인이 입은 전쟁피해에 대해서는 국가간의 처리가 원칙이라고 했다. 또한 헤이그육전조약 제3조도 국가간의 배상책임을 규정하는 것으로 개인에게 배상청구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고 판결했다.


10 명칭의 종류와 변천(名称の種類と変遷)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난징대학살사건(南京大虐殺事件)’ ‘난징학살사건(南京虐殺事件)’ ‘난징잔학사건(南京残虐事件)’ ‘난징폭학사건(南京暴虐事件)’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난징폭행사건(南京暴行事件)’ ‘난징 애트로시티(Atrocity)’ ‘난징대학살사건(南京大残虐事件)’ 등 다양한 표기와 호칭이 있다.

단, 1913년의 청조부활(清朝復活)을 기도한 장쉰(張勲)에 의한 제2혁명에서 난징사건이 ‘난징학살사건’으로 당시 보도되었다.

또한 1927년 난징에서 중국국민군이 일본인 등 외국인에게 폭학행위를 가한 사건은 ‘난징사건 (the Nanking Affairs)’, ‘난징오욕사건(南京汚辱事件)’이라고도 표기했다.

이 논쟁의 역사에 대해서는 일본 위키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항목도 참조하라.*

[* 편집자주 : 역사적 사건의 명칭과 관련해 정치적 입장차에 따라서 논란이 있는 것은 난징사건만이 아니다. 미국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됐다고 알려진,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이라고 호칭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영국은 ‘킹 거리 사건((incident on King street)’이라고 호칭한다. 사실, 이 사건의 희생자 숫자는 사망자 5명, 사상자 6명으로 많지 않다. 하지만 미국은 무장 군인의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영국은 미국 시민들이 먼저 영국군에 대해서 공격을 시도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각자의 관점에서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10.1 도쿄재판(東京裁判)

1946년 4월 29일에 기소되어 5월 3일에 개정한 도쿄재판에서의 호칭은 ‘소인(訴因) 제45’이며 그 속에서는 오살(鏖殺), 살육(殺戮)이라고 기술되었다.*

[* 오살(鏖殺)은, 모두 죽여 버리는 것. 영문으로는 slaughter the inhabitants, unlawfully killed and murdered 이라고 되어있다. A급 극동국제군사재판기록 아지력(アジ歴) 레퍼런스 코드 일본어 A08071274100 영문 A08071243700. ]

재판이 열리고 일주일 후에 아사히(朝日)신문은 ‘난징대학살사건’이라고 보도했다.*

[* “난징대학살사건의 책임을 추궁받은 다니 히사오(谷寿夫) 전 중장과 이소가이 렌스케(磯谷廉介) 전 중장은, 가까운 시일 내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호송되어, 국방부 군사 법정에서 재판에 회부된다", 1946년(쇼와 21년) 5월 10일 아사히(朝日)신문]

같은해 10월 9일의 귀족원제국의회(貴族院帝国議会)에서 호시시마 니로(星島二郎)가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 호칭했다.

검찰은 ‘난징잔학사건(南京残虐事件)’ ‘난징사건(南京事件)’ ‘난징강간(南京強姦)’, 불제출서류에서는 ‘난징에 있어서의 학살(南京ニ於ケル虐殺)’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변호단은 ‘난징약탈폭행사건(南京略奪暴行事件)’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1948년의 일본어(和文)로 된 판결에서는 ‘난징폭학사건(南京暴虐事件)’, 영어(英文)로 된 판결에서는 ‘THE RAPE OF NANKING’이라고 표기되었다.


10.2 연구서 등의 표기(研究書などでの表記)

- 1956년 ‘세계역사사전(世界歴史事典)’, 1961년의 ‘아시아역사사전(アジア歴史事典)’에서는 ‘난징사건’으로 표기했다.

- 1966년에는 고시마 코사쿠(五島広作)와 시모노 잇카쿠(下野一霍)의 공저 ‘난징작전의 진상(南京作戦の真相)’(도쿄조호샤(東京情報社)), 1967년 호라 도미오(洞富雄)의  ‘근대전사의 수수께끼(近代戦史の謎)’(진부츠오라이샤(人物往来社)), 1968년에는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가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난징대학살’이라고 기술했다.

- 1971년 7월의 참의원에서 니시무라 세키카즈(西村関一)가 ‘난징학살사건’ ‘난징대학살사건’이라고 호칭했다.

- 1971년 8월말부터 아사히신문의 연재 ‘중국 여행(中国の旅)’을 시작한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는 ‘난징사건’, ‘난징대학살’, ‘난징대폭학사건’이라고 표기했다. 호라 도미오(洞富雄)는 혼다 가쓰이치가 ‘중국 여행’에서 중국어 ‘대도살(大屠殺)’을 ‘대학살(大虐殺)’이라고 번역하여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잡지 ‘시오(潮)’ 1971년 8월호에서도 ‘난징대학살’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 1972년 4월에 스즈키 아키라(鈴木明)가 잡지 ‘쇼쿤!(諸君!)’에 ’‘난징대학살’의 환상(『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를 발표했는데 이를 계기로 논쟁이 시작되었고 ‘난징대학살’이 언론에서 보도되기 시작했다.

- 역사학자인 호라 도미오(洞富雄)는 1972년에 ‘난징사건(南京事件)’(신진부쓰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1967년 호라 도미오(洞富雄) ‘현대 전사의 미스터리(近代戦史の謎)’를 증보(増補)한 것)을 발간한 후 스즈키 아키라에 대한 반박으로 1975년에 ‘난징대학살–『환상』화 공작 비판(南京大虐殺--「まぼろし」化工作批判)’을 간행하여 그 이후의 저서명도 ‘난징대학살’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다만 호라 도미오는 ‘대학살’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지만 출판사의 요청에 응한 것이라고 발언했다. 또 호라 도미오가 편집한 ‘일중전쟁사 자료8(日中戦争史資料8)’의 1973년판은 ‘난징대학살사건 자료집(南京大残虐事件資料集)’으로 제목을 게재했다. 

그 반면에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의 공저에서는 1987년의 저서명에 ‘난징사건(南京事件)’을 사용했으며, 학살파 연구회에서는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 이노우에 히사시(井上久士) ,오노 켄지(小野賢二),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와타나베 하루미(渡辺春巳) 등이 모인 연구회)’라고 호칭했다.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학살’에 괄호를 사용했고,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난징사건은 난징대학살의 약칭’이라고 했으며 저서명에서도 ‘난징사건(南京事件)’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 2010년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의 일본어 논문에서는 ‘난징학살사건’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10.3 교과서 속의 표기(研究書などでの表記)

- 1946년 문부성 소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사건에 대한 기술은 있었으나 사건명은 표기되지 않았다(패전 직후 일본의 교과서는 ‘먹지(검은칠) 교과서(墨塗り教科書)’로, 국가주의와 전의고양이 담긴 내용은 모두 말소됐다). 1947년 학교교육법으로 교과서검정제도가 도입된 후, 1952년의 고교용 교과서 ‘현대일본의 성립 과정 (하)(現代日本のなりたち 下)’ (지츠교노니혼샤(実業之日本社))에서 ‘난징폭행사건’이라고 표기되었다.

- 1955년 일본민주당이 ‘우려해야할 교과서 문제(うれうべき教科書の問題)’라는 팸플릿으로 ‘(사회과) 교과서는 편향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제1차 교과서 비판(第一次教科書批判)’이 일어났다. 같은 해 보수합동에 의한 자유민주당 성립 후, 55년 체제하에서 교과서에 대한 검정강화가 진행되었다. 1955년의 오사카소셰키(大阪書籍), 1964년의 도쿄소셰키(東京書籍) 등 출판사의 교과서에는 난징공략에 대한 기술만이 있고 잔학행위에 대한 기술은 없었다. 다만 1962년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가 편집한 ‘신일본사(新日本史)’ (산세이도(三省堂))에서는 ‘난징대학살 (Atrocity)’라고 표기되었다. 1965년부터 ‘이에나가(家永) 교과서재판’이 시작되어 1978년의 도쿄소셰키 교과서에는 ‘난징학살’이라고 기재되었다.

- 1980년에는 자민당이 교과서를 비판하는 등의 제2차 교과서 비판이 일어났다. 1982년에는 ‘침략’을 ‘진출’로 바꿔썼다는 보도를 계기로 중국 및 한국과의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한 ‘제1차 교과서 문제(第一次教科書問題)’가 발생했다. 그 결과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이 검정규준으로 인정되었다.

- 근년의 교과서 표기에 관해서는 각 출판사들이 야마카와슈판샤(山川出版社) 및 도쿄소셰키가 ‘난징사건’이라고 표기, 테이코쿠쇼인(帝国書院)은 ‘난징대학살’, 시미즈쇼인(清水書院)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카와슈판샤 및 니혼분쿄슈판(日本文教出版)이 ‘난징학살사건’이라고 표기하고있다.

10.4 일본 국외에서의 표기(日本国外における表記)

중국 또는 중화민국에서는 거의 일정하게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구미(欧米)에서는 ‘Nanking Atrocities’ ‘The Rape of Nanking’ ‘Nanking(Nanjing) Massacre’ 등으로 호칭된다. 1997년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저서인 ‘The Rape of Nanking’의 부제로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2차 세계대전에서의 잊혀진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했다. 또 영국 및 미국의 언론 논설에서는 Nanking Massacre(난징학살)을 Nanking Incident(난징사건)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학살을 경시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난징사건 논쟁사 #영어권의 연구 및 논설’을 참조하라.


11 역사상의 ‘난징대학살’(歴史上の「南京大虐殺」)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는 중국에서 ‘난징대학살’(난징대도살)은 하나의 고유명사로 쓰이며 ‘역사적으로 정착된 단어’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의 대만계 지식인인 고분유(黄文雄)에 의하면 중국의 전쟁에는 ‘도성(屠城, 도시를 점령하면 그 도시의 주민을 모두 죽이는것)’이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사상의 ‘난징대학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1. 왕돈(王敦)의 난(322년~324년)

2. 후경(侯景)의 난(549년). 동위(東魏)의 후경은 양(梁)의 무제(武帝) 남북조시대에 난징(당시의 건강(建康))을 포위하여 함락후에 ‘대학살’을 저질렀다.

3. 태평천국(太平天国)의 난에서의 난징대학살(1853년).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배상제교(拝上帝教)’로서 한민족(漢民族) 국가를 재흥하기 위해  홍수전(洪秀全)은 난징 점령시 청국병사(만주족 병사)를 거의 전원 몰살했으며 만주족의 부녀자까지 만명 단위로 불태워 학살했다. 14년간의 난을 통해 총 희생자수는 2000만명이 넘는다.

4. 천경사변(天京事変)에 의한 난징대학살(1856년). 태평천국군의 내분(천경사변)으로 홍수전(洪秀全)이 양수청(揚秀清) 군대를 ‘대도살’했다.

5. 천경공방전(天京攻防戦, 1864년) – 난징(당시 천경(天京))에서 일어난 청군(清軍)・상군(湘軍)과 태평천국군과의 전쟁. 상군의 조열문(趙烈文)은 노인 및 2~3살의 유아도 학살당했으며 40세 이하의 젊은 부녀도 납치되어 20~3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대만의 역사가인 수뤼강(蘇瑞鏘)은 ‘상군판 난징대학살’이라고 했으며 고분유(黄文雄)는 천경공방전에서의 약탈과 방화기록은 중국정부가 주장하는 ‘일본군에 의한 대학살’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6. 제2혁명에 있어서의 난징대학살(1913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에 진행된 청조부활(清朝復活)을 노린 장쉰(張勲)에 의한 제2혁명 탄압에서도 국민당 병사가 수천명 살해되었으며 일본인 3명도 잘못 살해되었다.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는 당시 이 사건을 ‘난징학살사건’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기타잇키(北一輝)가 난징을 방문하여 학살의 실태를 ‘지나혁명외사(支那革命外史)’에 기록했다. 당시 중국의 외교가이자 관료였던 차오루린(曹汝霖)은 장쉰(張勲)을 “그 난징대학살을 저지른 남자”라고 불렀다.

7. 1927년에 장제스(蒋介石) 군대가 난징 점령후에 외국 영사관이나 시민들에게 폭행과 강간을 저지른 난징사건.

기타 난징 이외에서 중국에서 일어난 학살로 난징대학살과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는 사건으로 1645년의 양주대학살(揚州大虐殺)이 있다. 양주대학살의 희생자는 80만명이라고 한다.


12 난징사건을 다룬 작품(南京事件を扱った作品)

12.1 소설(小説)

- 이사카와 다츠조(石川達三) ‘살아있는 병대(生きてゐる兵隊)’(1938년, 완전판 1945년. 주코분코(中公文庫)에서 1999년에 복간) 난징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술이 문제가 되어 당시 신문사법에 어긋난다고 발매금지처분, 이시카와도 금고 4개월,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전선(戦線)’(종군기), 아사히신문사(1938년), 주코분코(中公文庫, 2006), 1937년말부터 1월까지의 단기간에 군부의 종군여성기자로 난징에 체재(滞在)했다. 종군한 병대에 대한 경모(敬慕) 등을 묘사했으며 이 후에 체류한 이시카와 타츠조와는 달리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 알론(阿壠) ‘난징(南京)’(1939년), ‘난징혈제(南京血祭)’라고 개제되어 1987년에 간행. 일본어 번역 세키네 유즈루(関根譲) 『난징통곡(南京慟哭)』(1994년)

-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모란 (牡丹)’ (1955년)

- 홋타 요시에(堀田善衛) ‘시간 (時間)’ (1955년)

- R. C. Binstock,Tree of Heaven,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1995)

- Paul West,Tent of Orange Mists,Scribner,1995(Overlook Books,1997)

- 아이리스 장 (Iris Chang) ‘The Rape of Nanking’(1997, Basic Books)

- 야마모토 히로시(山本弘) ‘신은 침묵하지 않는다(神は沈黙せず)’(2003년), 작중인물이 논쟁하는 묘사가 있는 SF소설

-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団長殺し)’(2017년)

12.2 영화(映画)

12.2.1 전시중의 기록영상을 사용한 영화(戦時中の記録映像による映画)

- ‘난징(南京)’ (일본, 1938년), 난징전의 기록영화. 난징전 이후의 내용이지만 난징사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일본 육군의 프로파간다라는 설이 있다.

- ‘The Battle of China’(미국, 1944년), 난징사건 영상이 포함되지만 미국 및 중국의 프로파간다로서 과장됐다는 설이 있다.

- ‘중국의 노후 (中国之怒吼)’ (중화민국, 1945년), ‘The Battle of China’를 편집한 영화.

12.2.2 일본영화(日本映画)

- ‘전쟁과 인간, 제3부 완결편(戦争と人間 第三部 完結編)’ (일본, 1973년)

- ‘난징, 찢어진 기억(南京 引き裂かれた記憶)’(일본,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

- ‘난징의 진실, 제1부 ‘7명의 사형수’ (南京の真実 第1部「七人の死刑囚)’(일본, 2008년)

12.2.3 중화권 영화(中華圏映画)

- ‘난징 1937(南京1937)’ (중국, 대만, 홍콩, 일본, 1995년)

- ‘검은 태양, 난징(黒い太陽・南京)’ (홍콩, 2005년)

- ‘난징! 난징! (南京!南京!)’(중국, 2009년)

- ‘금릉십삼채 (金陵十三釵, The Flowers Of War)’ (중국, 2011년), 일본미공개

12.2.4 구미영화(欧米映画)

-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이탈리아, 영국, 중국, 1987년)

- ‘난징(南京, Nanking)’ (미국,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

- ‘The Children of Huang Shi’(호주, 중국, 독일, 2008년)

- ‘욘 라베, 난징의 쉰들러(ジョン・ラーベ 〜南京のシンドラー〜, John Rabe)’(독일, 프랑스, 중국, 2009년)

12.3 만화(漫画)

- ‘나라가 불탄다(国が燃える)’ (모토미야 히로시(本宮ひろ志), 슈에이샤((集英社), 2002 - 2005년)

- ‘신 고마니즘선언SPECIAL 전쟁론(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겐토샤(幻冬舎), 1998년)

- ‘신 고마니즘선언 SPECIAL 전쟁론2)((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2)’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겐토샤(幻冬舎), 2001년)

- ‘만화로 읽는 쇼와사 ‘난징대학살’의 진실(マンガで読む昭和史「南京大虐殺」の真実)’ (하타케 나츠코(畠奈津子), 오오다테 아츠코(大舘亞津子), WAC(ワック), 2007년)


- ‘난징1937’을 2011년 11월에 프랑스와 벨기에서 간행, ‘Nanking 1937’(Nick Melander,Zhou Zongkai), 욘 라베(John Rabe), 샤수친(夏淑琴)의 일기를 묘사.

- Ethan Young의 ‘Nanjing: The Burning City’, 미국, 다크호스사(Dark Horse Originals), 2015년9월1일 간행

12.4 음악(音楽)

EXODUS의 ‘Nanking’(2010년 앨범 ‘Exhibit B: The Human Condition’에 수록)


13 참고문헌(参考文献)

- 방위청 방위연수소 전사실(防衛庁 防衛研修所 戦史室) ‘전사총서 일중전쟁 육군작전 <1>(戦史叢書 支那事変陸軍作戦 <1>)’ 아사구모신분샤(朝雲新聞社)、1975년 7월 25일.

- 난징전사편집위원회(南京戦史編集委員会) ‘난징전사 증보 개정판(南京戦史 増補改訂版)’ 가이코샤(偕行社)、1993년 12월 8일.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1986년。ISBN 4-12-100795-6。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 (증보판)(南京事件―「虐殺」の構造(増補版))’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2007년。ISBN 978-4-12-190795-0。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南京事件)’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1997년。ISBN 4-00-430530-6。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논쟁사 – 일본인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 왔는가(南京事件論争史―日本人は史実をどう認識してきたか)’ 헤이본샤(平凡社) ‘헤이본샤신쇼(平凡社新書)’、2007년。ISBN 4-582-85403-6。

- 히구라시 요시노부(日暮吉延) ‘도쿄 재판의 국제 관계 - 국제 정치의 권력과 규범(東京裁判の国際関係―国際政治における権力と規範)’ 보쿠타크샤(木鐸社)、2002년。ISBN 4-8332-2328-7。

- 히구라시 요시노부(日暮吉延) ‘도쿄재판(東京裁判)’ 고단샤(講談社) ‘고단겐다이신쇼(講談社現代新書)’、2008년。ISBN 4-06-287924-7。

-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 텐덴샤(展転社)、1998년。ISBN 4-88656-153-5。

-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고바야시 스스무(小林進)・후쿠나가 신지로 (福永慎次郎) ‘난징사건의 증거사진을 검증한다(南京事件「証拠写真」を検証する)’ 소우시샤(草思社)、2005년。ISBN 4-7942-1381-6。

- 하야사카 다카시(早坂隆) ‘마츠이 이와네와 난징사건의 진실(松井石根と南京事件の真実)’ 분게이슌주(文藝春秋) ’분게이신쇼(文春新書)‘、2011년。ISBN 4-16-660817-7。

- New York Times :serch "Nanking 1937" (난징사건 (1937년) 에 대한 신문기사)

- New York Times :serch "Nanking 1927" (난징사건(1927년)에 대한 신문기사 (비교검토를 위해 참조)

-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편(編) ‘난징대학살부정론의 13가지 거짓말(南京大虐殺否定論13のウソ)’ 카시와쇼보(柏書房)、1999年。ISBN 978-4-7601-1784-0。

-(레쥬메(レジュメ))‘이른바 ’난징사건(いわゆる「南京事件」)’ 하라 다케시(原剛)(오사카교육대학(大阪教育大学) - 사회교육학연구(社会教育学研究) 제15호2009.1) 、소개(야마다 마사유키(山田正行)) 

-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 쇼지 준이치로(庄司潤一郎). ‘일중전쟁-일본군의 침략과 중국의 항전(日中戦争―日本軍の侵略と中国の抗戦)’. 제1기 ‘일중역사공동연구 보고서 ‘근현대사’ ’ 제2부 전쟁의 시대(「日中歴史共同研究」報告書 <近現代史>第2部 戦争の時代) 외무성. p. 7. 2012년6월 25일 열람。

- David・M・Kennedy (April ,1998). The Horror. 281(4). The Atlantic Monthly. pp. 110–116. 2016년 9월 26일 열람. 방역(邦訳):데이비드 M. 케네디(デビッド・M・ケネディ)、시오타니 히로(塩谷紘) 역(訳) ‘미국 역사학자 '난징의 강간' 비판, 난징학살은 홀로코스트가 아니다(米歴史学者の『ザ・レイプ・オブ・南京』批判 南京虐殺はホロコーストではない)’‘쇼쿤!(諸君!)’ 제30권 제8호、분게이슌주(文藝春秋)、1998年8月、 170-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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