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새벽 4시, 일곱 여인이 깊은 잠에 빠져든 정방여관에 각목을 든 한 무리의 괴한이 들이닥쳤다. 오산 3형제와 그들이 고용한 6명의 인력거꾼들이었다. 괴한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여인들을 몽둥이로 위협하며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여인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우악스런 인력거꾼들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여관 밖에서 영문을 모르고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 운전수들은 발버둥 치며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사태가 심상찮음을 깨닫고 괴한들을 말리다가 또 싸움이 붙었다. 여인들의 비명소리, 운전수와 일인들의 싸움 소리에 놀라 달려온 동리(東里) 자동차 운전수가 동료들을 데리고 와 ‘저놈 잡아라’라고 고함을 지르자 정방여관 주변은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동이 계속되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일인과 여인들을 경찰서로 연행해서 쌍방의 말을 들은 다음 일본인들은 10일 구류, 여인들은 5일 구류를 명했다. 죄목은 의외로 ‘안면(安眠) 방해죄’였다. 소란을 피워 이웃의 편안한 수면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인들은 경찰 처분에 불복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여인들과의 고용 계약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이다. 한편, 여인들은 또 여인들대로 죽어도 일본인들 손에는 절대 끌려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팔려가더라도 조선인에게 팔려가겠다는 것이 여인들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리원창기조합에서는 일이 해결되기만 하면 바로 여인들의 몸값을 조합에서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작부 계약을 승계하겠다는 것이다.
일인과 여인들이 경찰서에 구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사태는 점점 소송전으로 비화됐다. 여인들 부모들은 계약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서신으로 신문지국에 계약 내용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계약서를 직접 가지고 와서 향정의 죄악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앞서 조금선이 전치 10일의 진단서를 첨부하여 경찰에 일인들을 폭행혐의로 고소한 데 이어 평양부 차관리에 본적을 둔 김명주(金明珠:본명 金寶玉)는 연락을 받고 온 오빠가 나서서 몸값 지불에 불복하고 불일간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했다.
1911년생인 김보옥은 1924년 4월에 평양 어떤 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등지로 가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길을 알아보던 차에 조일정 주인 향정의 마수에 걸려들어 여기까지 오게 된 소녀였다.
김보옥의 오빠는 동생이 매춘이 불가한 작부 계약을 했음에도 나이까지 속여 가며 매춘을 강요한 조일정 주인의 죄를 반드시 물을 것이라며 그 증거로 당시 체결한 계약서를 제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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