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부가업계약서(酌婦稼業契約書)
향정일지진(向井一之進) 본 적 : 대판부(大阪府) 외(外) 금궁정(今宮町) 동전(東田) 1021-1 현주소 : 위와 같음
김보옥(金寶玉:1911년 5월 3일 생) 본 적 : 성천군 성천면 하부리 166 현주소 : 평양부 차관리 41번지
위 계약은 갑 향정일지진, 을 김보옥으로 칭하고 작부가업을 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계약을 체결하여 갑을 양인이 1통 씩 보존함
- 갑은 을에게 1금 300원 지불함 - 을은 갑의 당소[조일정]에서 계약일부터 만 1개년 6개월을 작부(酌婦)에 종사하기로 함 - 갑은 을에게 왕복비용과 의복 침구 식기 등 각 항을 부담하기로 함 - 갑은 을에 대하여 무고히 계약을 위반할 시는 제1호 금액은 전부 무효로 함 - 을은 갑의 당소에서 명에 따라 작부를 진행치 아니할 시는 갑의 손해금과 제1호 금액을 계산하여 지불하기로 함 -을의 민적등본은 계약일로부터 3~4일간으로 출급함
위와 같이 계약을 체결함 1924년 12월 18일
계약(갑) 향정일지진 ㊞ 계약(을) 김보옥 ㊞ 연대약인(을의 실모) 김영한㊞ |
제출된 계약서의 주요 내용은 김보옥이 계약금 300원을 받고 1년 6개월 동안 오사카의 조일정에서 작부가업(酌婦稼業)에 종사한다는 내용이다. 나머지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따른 부수적인 내용으로 계약 위반 시 이행 사항, 부대비용의 부담, 기타 증빙 서류 제출 등이다. 중요한 점은 마지막에 연대보증인의 서명날인이 반드시 포함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을의 실모(實母), 즉 김보옥의 친모(親母) 김영한이 날인했다.
먼저 김보옥이 받은 300원이라는 돈은 계약금이자 전차금(前借金)이다. 전차금은 말 그대로 ‘미리 빌린 돈’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1년 6개월 동안 작부일에 종사할 것을 약속하고 받은 돈이다. 당연히 계약 기간 동안 변제해야 할 일종의 빚인 셈이다. 당시 포주와 예기‧ 창기‧ 작부의 고용 계약은 거의 대부분이 이와 같이 전차금을 매개로 체결되었다.
여인들은 계약 기간 내에 고객으로부터 받는 화대(花代)를 주인과 6:4 또는 5:5 등의 비율로 배분하고, 그 중 자신에게 배분된 몫으로 전차금을 변제(辨濟)했다. 이와 같이 ‘해[年]마다 빚을 갚아가는 매춘부[妓]’를 당시에는 연기(年妓)라 하였으며, 이러한 연기계약은 램자이어 교수가 발표한 '태평양전쟁 당시 성(性)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이라는 논문의 핵심 내용인 ‘Indentured prostitution’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일각에서 연계봉공(年季奉公)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나 봉공(奉公)이라는 단어가 헌신봉공(獻身奉公)이나 멸사봉공(滅私奉公)에서처럼 사사(私私)로운 이익보다 공익(公益)을 우선한다는 뜻에서 연기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용어라 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김보옥이 종사하기로 한 작부(酌婦)이다. 작부는 뭇 남성들을 상대로 웃음과 정조를 파는 예기‧창기와 같은 직업여성을 말한다. 1924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작부‧예기‧창기의 근원을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을 따라 현해탄을 건너온 ‘니혼무스매[日本娘]’에 두고 있다. 이후 조선 땅에서는 이러한 직업여성이 늘어남과 동시에 성병이 만연하자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관리감독이 가능한 공창제를 운영하였다.
공창(公娼)이란 공식적으로 매춘 행위를 할 수 있는 창기(娼妓)를 말한다. 이와 달리 가무(歌舞)나 기예(技藝)를 선보이는 예기나 손님 곁에서 술시중을 드는 작부는 적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매춘이 허락되지 않은 사창이었다. 물론 어느 업종이든 관의 허가를 얻어서 영업을 해야 한다는 점은 동일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으로 공창 폐지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1927년, 일본 내지에서 창기를 폐지하기 시작하여 1935년도에는 일본 전역의 공창 폐지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공창 폐지가 곧 관허(官許) 매춘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매춘 공간인 유곽을 카페나 요리점으로 개조하고, 창기를 작부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이어가도록 한 그야말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예기‧창기‧작부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면서 예기‧작부의 매춘도 점점 묵인하는 추세로 진행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1924년 말에 작성한 김보옥의 계약서에는 분명히 ‘작부(酌婦)에 종사하기로 함’이라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매춘은 불법이자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그런데도 조일정 주인은 김보옥 뿐만 아니라 모든 여인들에게 매춘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옷을 주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학대를 하여 매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김보옥은 명치(明治) 44년(1911) 5월 3일 생으로 1925년이면 겨우 14살 밖에 되지 않는 미성년자임에도 주인은 나이까지 19세로 속여 매춘을 강요하였다. 때문에 김보옥의 오빠는 이를 분개하며 위와 같은 작부가업계약서를 제시하고 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8월 21일자 매일신보에 사리원요리옥조합에서 일곱 여인의 몸값 잔여 2천 1백 원을 일인들에게 지불하고 일곱 여인을 전부 사기로 계약하였다는 기사 외에 관련 기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앞서 전치 10주 상해로 고소한 조금선, 10일 구류에 처한 일본인의 정식재판 요청, 김보옥 측의 소송 제기 등으로 사태가 점점 험악해지자 요리옥조합 측이 몸값 지불을 조건으로 중재에 나선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결국, 사리원역 7여인 납치 미수사건은 일인들의 갖은 흉계와 여인들의 반발, 그리고 고소 고발에도 불구하고 2,100원이라는 전차금이 해결되면서 극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으로 보여진다. 이제 일곱 여인들은 요리옥조합과 각자 300원이라는 전차금을 조건으로 재계약을 맺음으로써 다시 1년 6개월 간의 작부 생활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