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당의장, 김한길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물론, '대북 포용정책 지속' 특별성명을 발표한 15명의 여당 의원들의 일치된 주장 중 하나가 바로 "북한 핵실험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 때문이며, 북핵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북미간 직접대화"라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도 '북미간 직접대화'를 촉구하였지만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전제조건으로 걸었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소 차이가 있다.
김근태 의장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상황이 핵실험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도 핵실험 이전과 이후가 '위기 수준'에 있어서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 집권당 대표가 이런 안일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넘어 절망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은행 강도가 은행을 털계획을 세웠다가 경찰에 자수하는 것과 실제로 은행에 들어가 인질극까지 벌이다가 자수하는 것이 과연 같을 수 있을까? 초등학생 수준만 되어도 분별할 수 있는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엔이 창설되고,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안전보장이사회라는 집단지도체제 방식을 도입한 이유는 비록 특정지역에서 '평화를 깨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더라도 이것이 국제사회 전체를 향한 도전이라는 전제조건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반도에서의 사소한 국지전으로부터 발전된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역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라는 유럽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국제사회는 더 이상 북한 핵문제를 남북한의 문제로도, 북미간의 문제로도 보지 않는다. 이것은 '핵확산 금지'를 천명한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동북아지역이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것을 막고자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 주변 4강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이라는 방식에 합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중 어느 누구도 북한 핵문제로 인해 직간접적인 영향을 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북미간 직접대화를 언급하는 것은 국제관계에 대해 완전 무지하거나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려는 속내를 드러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미 북한이 핵실험까지 감행한 마당에 미국이 북미간 직접대화에 나서고, 이를 중국이 지지한다고 해서 과연 일본이 팔짱끼고 자신들의 운명을 미국과 북한의 손에 맡길 수 있을까? 또한, 미국이 북한과 신뢰관계를 회복한다고 해서 국제사회 역시 아무 생각없이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게 될까? 더욱 가관인 것은 북핵의 가장 큰 관련당사국인 동시에 최대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한국정부를 집권세력이 대화채널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을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북미간 직접대화 시나리오가 핵실험 이전이라면 가능할 수 있지만 지금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가 이를 여러차례 뒤엎고 끝내 핵실험까지 실시한 마당에 북한과 미국이 악수한다고 해서 국제사회가 북한을 다시 '신뢰할 수 있는 국가'로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그와같은 상황을 모두 외면하면서 북미간 직접대화를 촉구하는 것이야말로 '뿌리깊은 사대주의 근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마치 미국만 마음먹으면 국제관계가 모조리 바뀔 수 있다는 지극히 과대망상적인 사고수준이다.
이는 좌파 운동권 출신들과 조금만이라도 대화해보면 공통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라크에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기관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국의 신용등급을 크게 낮출 것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한국 경제가 미국의 경제 제국주의 정책에 완전 예속되어 경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등이 그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국제적 공신력을 잃는 순간에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무디스가 과연 미국의 말 한마디에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을 낮출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이 미국과의 FTA 체결로 경제 식민지로 전락할 경우 과연 향후 미국과 FTA를 체결하려는 국가가 나올까? 과대망상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국제관계가 전부 미국의 입김 하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성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도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목숨걸고 반대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미국 마음대로 될 수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김정일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여당내 좌파 운동권 출신들은 국제사회를 오로지 친미와 반미 둘 중 하나 밖에 없는 흑백논리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 내에서도 지역정서가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는데 어찌 국제사회를 그렇게 단순히 볼 수 있겠는가?
이미 일본은 북한에 대한 초강경 제재안을 마련하여 곧바로 시행에 들어갈 태세다. 유엔 안보리 역시 미국과 일본의 입장이 반영된 대북 결의안 수정안을 놓고 본격적인 의견조율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대화에 나선다고 해서 일본이 곧바로 초강경 제재안을 백지화할 수도 없거니와 유엔 안보리가 대북 결의안에 대한 논의를 유보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북한의 핵실험 감행으로 인해 입지가 좁아진 것은 비단 한국과 중국 뿐만이 아니다. 미국도 그만큼 입지가 좁아졌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과 직접대화에 나서기 위해서는 북한 스스로가 먼저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 국제사회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이라는 공통의 룰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NPT를 탈퇴했을 뿐아니라 IAEA 사찰요원들까지 모두 쫓아냈다. 그리고 끝내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라는 '레드라인' 마저 서슴없이 넘어버렸다. 만일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묵인하는 입장을 취할 경우 이는 NPT 체제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NPT 체제가 무력화된 상태에서 과연 국제사회는 핵개발을 추진중인 이란에 대해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에 자극을 받아 핵포기를 선언한 리비아가 또다시 핵개발을 추진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김근태 의장은 이와같은 NPT 체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PSI)에 한국정부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NPT 체제가 무력화되고 있는 상태에서 PSI 참여마저 거부한다면 과연 김근태 의장이 꿈꾸는 국제사회는 모든 국가들이 핵무장을 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제조하는 '만국의 만국을 위한 투쟁' 상황인가? 더욱이, 그와같은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대화에 나서야된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사실상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자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지금의 상황에서 미국은 결코 단독으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을 설득하기가 어렵다.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 국민들이 북핵에 대해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일동맹을 동북아 지역 집단안보체제의 중심 축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일본의 협조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한국 국민들 입장에서야 일본의 핵무장 및 군사대국화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북한의 핵위협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에게 그냥 팔짱끼고 있으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노무현 대통령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신중한 접근을 보이면서 말을 아끼고 있다. 햇볕정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세력을 비판하면서도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먼저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친북반미 사고를 갖는 것까지야 말릴 수 없지만 최소한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기본원리에 대해 한번이라도 좋으니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김근태 의장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다. 결코 국제사회가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좌지우지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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