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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스포츠 선수 성폭력 근본 원인 <3>

위선자를 양산해내는 사회

필자가 가장 피하고자 하는 태도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보며 그렇게 보고싶은 현실의 인식을 통해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으려 하는 점이다.

사실 어찌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상품 마케팅을 할 때도 이 정서적인 면에 어필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는 사회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어떤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면보다도 정서적인(emotional) 면에 어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소비자들에게 어필되기 쉽고 또 다량의 구매를 유도하게 되는 것임을 현재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검증되고 있으며, 그래서 요새 경영학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 필자의 학창시절,

필자는 모든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경험했겠지만, 교사들로부터의 혹독한 폭력 하에 살아왔다. 당시 그런 위로부터의 폭력 속에 시달리면서 든 생각은 이렇게 방만한 힘의 남용은, 그렇다면 여학생들에게는 성적인 폭압으로 이어질 수 있겠구나.. 였다. 이러한 생각까지 미쳤을 때 등하교 길의 여학생들을 다른 눈으로 더 주의깊게 관찰하게 되었다. 특히나, 필자도 운동을 학교 과외활동으로 해 본 일이 있어 운동부에서의 절대권력의 남용, 견제 받지 않고 남용에 매우 취약한 현실을 짧게 나마 느껴 본일이 있다. 황당한 경험 중에 한 운동부 친구가 운동부 선생으로부터 조르기를 당하며 그 고통에 아이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이다. 이유는 모르고 기초를 가르치며 갑갑했는지 운동부 학생하나 잡고 바로 조르기를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여학생들, 특히 운동을 하는 여학생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들의 표정이 어떠한지. 그리고 혹시 몸 뿐만아니라 얼굴까지 예쁜 것은 아닌지.. 이는 그들의 하늘로부터의 축복이 오히려 저주같이 되는 결과로 이어지겠기에.. 그러나 우연인지는 모르나, 운동하던 여학생들 얼굴이 하나같이 미인은 못 되었더라는 사실에 그 순간만큼은 어느 정도의 안도감도 들었다. 그러나 위기는 찾아왔다. 한밤중, 그리고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등등등, 예쁘고 못생기고를 떠나서 그저 여자라면 성행위가 가능하다라는 만큼의 욕구가 치솟게 되었을 때, 이는 동시에 위기인 순간이었다. 그들의 안전이.

사실 필자가 직간접의 경험을 통해 닦여진 지성에 의한다면 이들은 매우 고통스런 상황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학교 교육에서 강조했던 강간의 폐해, 성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폐해, 그리고 성에 대한 온갖 고결하고 숭고한 이미지를 늘어놓던 수사(修辭)에 비추어보면, 이들은 말 그대로 장난 아닌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성에 대해 더 숭고한 이미지를 말할수록, 그들은 더 말도 못할 상황에 처해 있는게 된다. 같은 학교라는 곳에서… 그 순간에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박수 짝짝치며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라는 사실 자체로 숭고함, 고결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박수 짝짝치고 “믿습니다~”식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하면 예의 바르고 온순하게 자란다고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인식한 위기 그대로를 누군가에게 말한다, 친구들에게 말하면 포르노를 많이 봐서 미친 것 아니냐? 현실과 포르노를 혼동하지마라 따위의 충고를 들을 것이고, 삐딱해서 같이 놀면 안되는, 가까이 해서 좋을게 없는 품행과 정서가 좋지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좀 높은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면 정신과부터 가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태생이 약한 죄인으로써, 고백하건데 필자는 전자의 아이디어를 샀다. 왜냐하면 그 편이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편이었고, 약한 자로써의 심령에 살 수 있는 아이디어란 그 정도 천한 질의 사고 정도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서적으로도 교사와 그나마라도 친화력이 생길 수 있는 그런 사고방식이었고, 또 현실과도 타협이 가능한 훨씬 정서적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사회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명료해지면 명료해질수록 불안해서, 당시 친구들한테 이야기 했을 때도 미쳤다거나, 삐딱하다거나 등, 냉소적인 반응이었고, 좋은 반응은 그냥 원래 독특한 놈이 독특한 소리하는구나, 같은 남자이고, 친구라는 면에서 넘어간, 웃고 넘기는 정도였다. (곧 친구라는 정서적 유대감, 이것이 필자를 비판하는 사고를 사지 않게 가능해진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비판하면 친구라는 정서적 안점감이 깨어지어 괴로울 것이고, 이러한 도덕적 비판 도구를 사지 않아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더 정서적 안녕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축구선수는 축구화를 사고 야구선수는 야구화를 사는 것과 같다.)

2. 생산을 일으키는 문화 = 문명,
=> 어떠한 도구(생산을 일으키는)를 사며 살아왔는가?

시사기획 쌈에서 보였듯, 많은 피해 여성들이 그러한 현실 속에서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사실도 결국 생산의 문제, 곧 경제적 이유가 그 원인이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정서적 안녕을 위해 어떤 사고방식을 구매한다고 했을 때, 성폭력 하에서 사는 것은 정서적 안녕이라는 측면에서 비추어 볼 때 가장 위배되는 삶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이 말은 맞는 것 같으나, 그러나 한국의 지난 역정과 거기서 나온 문명, 그리고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찰 했을 때 이는 공식을 잘못 활용한 오류라 하겠다.

한국사회는 가정이란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단위라 하겠다. 전근대 시절의 대개의 사회가 그러하듯이. 한 개인이 가정을 벗어나면 인간포기 선언을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곧 약자를 뜯어먹는 하이에나 같은 세상에 자기자신을 홀로 떼어놓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갖은 종류의 폭력은 제어할 방법이 없다. 그저 가정 안의 어른들이 그나마 좋은 사람이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존엄한 한 개인으로써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여지는 애초에 없다. 우선 과거에는 특히나 집안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가져다 자식 운동시키는데, 그리고 운동말고는 할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하던 운동 마저 그만두는 것은 김인숙씨 사건처럼 벌거벗겨지고 입안에 똥을 쳐 넣어지게 되는 환경으로 내밀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바깥 환경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운동계와 다를 바가 없으니, 또 학교와 부모들이 이를 자나깨나 주입해왔고, 거지밖에 될 수 없다고 강조해왔으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무엇을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고, 현대 자본주의의 복리가 한국사회에도 들어옮으로써 공부나 운동이 아니어도 무수한 기회가 창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래도 자신을 그런 환경에 계속 처하도록 놓아두고 또 그것이 그나마 좋은 대책이라고 합리화 하는 온갖 사고들을 사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돈만 가진다고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니라, 그러한 일을 하는 한국에서의 인식, 그리고 그러한 일자리에서 또 남용되는 폭언, 폭력, 한국의 다양한 도덕체계라는 매우 잘 발명된 무수한 기준들을 도구로써 자신에게 공격하는 도구로 보다 자원(힘)이 많은 윗사람들로부터 이용됨으로써 시달릴 것인데, 결국 이러한 현실세계 속에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나은 선택은 결국 그나마 더 의미있는 돈과 한 방면에서의 커리어 일 것이다. 결국 또다시 운동이 그 선택이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왜 성매매에 종사하는 가임 여성 인구가 6분의 1에 달하는가?는 결국 커리어를 쌓을 수 없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것이 성매매 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좋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돈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땅한 기본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줄 수 없는, 일천한 사람들의 수준이고, 또 이를 서포트하는 내부 경제구조, 문명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 자체가 지위 지향적이고(status-consicious) 돈 지향적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소비 성향이란 것도 사실 자신이 속해있는 지위를 확인하는데 돈이 과감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이는 상류층 만이 아닌,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보았을 때, 범 자신의 아래에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소비행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소비행태는 어린아이들의 소비 시장만 보아도 이미 그러함을 알 수있다. 어려서부터 집단으로부터 떨어지는 경우를 두려워 한다기에, 그러한 유행이나, 집단에 속하려는 행태에 대한 비판은 어른들보다 덜 받아야 겠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정서적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큰 집단에 귀속해있다는 느낌을 가지려는 모든 행위에 소비의 중심축을 삼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다름에 대해서는 약자를 뼈살마저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횡행하는 세상에 내모는 그러한 사회, 아니 하이에나 같은 룰이 밑바닥에서 모터같이 돌아가는 사회, 그렇게 약자를 잔인하게 발라먹음으로써 생산을 하는 문명, 그 문명으로 돌아가는(turning)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다른 방면에의 발전은 인정하는 문명, 이러한 것들에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그래서 인정하고 흠향해 줄 수 있는 문명, 이렇게 인간성이 발전해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사회의 소비행태는 더욱 그러한 방면으로 주류화되어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개인성(individuality)을 인정하고 고무시키려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문명인가? 이렇게 보면 만인만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개인성이 발전된 사회, 이를 인정하는 사회, 보다 특화된 소비자를 찾아가는, 이들에 맞추는 시장이 새로 창출되는, 생산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시장인 것이기에, 이러한 것이 문명화된 사고가 바로 프로슈밍 경제론을 낳은 토양이지 않나 한다.

3. 결국 이렇게 보았을 때 이는 어떤 특수한 교육이 없어서의 문제도 아니며, 단순히 운동부교사가 남성이 많아서의 문제도 더더욱 아니다.

사실 이러한 해법을 내놓는 사고 자체가 그 배경에는 이러한 사고를 구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이 문화를 버리는 것은 뭔가 범하면 안되는 죄를 범하는 것 같은 죄책감, 이 정서적 안정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를 계속 구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민들을 이집트 노예로부터 해방시켜주니까 나중에 가서 왜 먹고 입고 살 것이 있던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냐고 모세를 욕하던 것, 카스트제도에 불가촉 천민이 스스로의 제도에 대해 감히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인가? 필자가 시사기획 쌈을 보고 든 느낌은, 단순히 성이라는 특정한 영역의 문제만을 지적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단지 성만 아니면 된다. 여태껏 학교에서의 권력의 남용, 인민재판 같은 일이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한국 문명의 수준, 그 밖에 지각을 자꾸 한다고 200대를 때리고 매를 확실히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야만적 문화는 형태만 달리해서 계속 그래왔듯이 일어날 것이다. 권력을 무책임하게 주고 또 이를 남용하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문화, 이러한 일이 매일매일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화, 책임의식이 낮은 저급한 윤리가 지배하는 문화, 이러한 한국의 각종 문화 현상을 바꾸자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 운동의 꿈을 포기하는 남성이나 모든 약자들에게는, 좋은 대체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가 보다. 바로 울어제끼는 것. 한국 드라마의 3분의1이 이러한 장면인 것 같이. (그래서일까 이번 남대문 불탄 것도 한국의 이러한 멘털리티를 많이 닮았다. 인간들인데 설마 남대문에 불장난 하겠어..? 그러다 당했다. 또 선생도 인간인데, 고상하고 자상하고 사랑이 넘칠 사람들이 많을텐데.. 인간같이 그럴거야.-> 그러다 당했다. .검사도 인간이면 제대로 수사하겠지-정동영, 이제는 한바탕 울면되나? 필자의 저서 인간혁명게릴라 경서의 제1장 부분을 봤으면 이런 오류는 반복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사기획 쌈을 보는 순간, 문제해결은 안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성은 밉지만, 이렇게 성범죄를 일으키는 문화는 밉지 않은 것이 시사기획 쌈과 그 게시판 글들 반응들에서 나타난 한국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4. 그러하기에 이들도 감성이 있고 동정할 줄 알며, 사랑할 줄 안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것은 위선이 되고 또 사랑한다고 포옹하지만 마귀의 손톱에 할퀴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자신들이 구매하는, 구매함으로써 정서적 안정을 얻는 그러한 구매품은 처분하고 보다 좋은 곳에 자원을 쓴 생각은 없기 대문이다. 그러한 고상한 기호는 자라나지도 못했고, 그래서 태도로, 습관으로 발달도 못했다. 싸가지 없다고, 필자가 당했듯 미쳤다고 탄압을 당했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이것으로 환원된다. 이 사회는 얼마나 국민들로 하여금 좋은 상품을 구매하게 하는가? 또 상품을 만들어 내는가? 고상한 상품이 창출되 나오는 토양인가?

국가주의, 군국주의, 군대 중심의 사회, 개인성이 집단에 귀속되는 저급한 논리에 의해 대체되도록 강요되는 사회, 왜 십대들이 자살 폭탄테러가 많은가? 종교전쟁에 가서 죽은 사람이 많은가? 바로 정서적으로 귀속의 욕구가 아직 크고, 첫경험이 그러하듯, 처음으로 어떤 생각을 스스로 구매함으로써 느끼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 아닐까? 곧 한국사회가 저급의 야만의 문화를 계속 구매하려는 사람이 많은 한, 그것이 저질의 상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한, 진정한 문제해결은 요원하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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