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워치 27호 기사입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오마이뉴스, 미디어스 등 보수우파 신문과 진보좌파 언론사들이 오랜만에 한 목소리를 냈다. 박재범의 2PM 탈퇴 사건을 네티즌들의 과잉 애국주의 탓으로 일제히 돌렸다. 정치적 성향보다는 분야의 동일성이 더 크게 작용한 논조로 보인다. 조선일보 최승현 엔터테인먼트부 기자, 중앙일보 양성희 문화부 기자, 오마이뉴스의 문화평론가 김갑수, 미디어스의 허민호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모두 문화를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즉 극심한 정치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의외로 문화영역에서는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통일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 크게 보면 국가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는 이른바 신좌파 이데올로기 성향을 보이고 있다.
중앙일보의 양성희 기자는 ‘2PM 박재범과 빗나간 애국주의’라는 칼럼에서 “이번 사태는 ‘제2의 유승준 사태’로 명명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민감하고 강력한 애국주의·민족주의 콤플렉스를 드러냈다. ‘한국이 싫으면 떠나라’는 식의 강고한 애국주의는, 공인도 유명인도 아닌 일개 연습생 시절의 미숙한 발언까지 ‘사상검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박재범 사태를 애국적 사상검증으로 진단했다. 양기자는 이어 “‘짐승 아이돌’ 2PM의 실력파 리더 박재범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사태는 ‘애국심이 부족한 한 동포스타의 퇴출’로 마무리되는 듯하다. 물론 부적절하고 미숙한 발언이었지만, 아이돌 스타의 해프닝성 설화에 그칠 수 있는 사안을 중차대한 사회적 사건으로까지 키운 우리 사회의 행태도 미숙한 것이 아닐까. 박재범에게 조국은 참으로 가혹하고 무섭게 기억될 것 같다”며 칼럼을 마무리지었다.
소비자의 불매 권리를 무시한 조선과 중앙의 칼럼
조선일보의 최승현 기자의 칼럼도 양성희 기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최승현 기자는 ‘재범군 사이버 즉결심판’이라는 칼럼에서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던 연습생 시절의 몇 마디에 분노해 결국 그를 매장시키는 대중도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외국인 사극 주인공에 열광할 정도로 우리 문화에 자신감을 가진 한국인의 마음 밑바닥에는 아직도 '미국 시민권자'에 대한 몽니 같은 것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혹시 민족주의를 곧 '타자 배척'으로 인식하는 몇몇 인터넷 워리어들이 우리 대중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젊은 가수의 퇴출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기자와 최기자의 주장에는 몇 가지 전제 조건들이 빠져있다. 이들이 비판하는 네티즌들은 연예기획사가 만들어낸 스타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라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냥 별 이유없이 기분 나빠도 해당 상품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 해당 상품이 활동하는 지역의 주민들에 대해 비하하고 “돈만 빨리 벌고 나가겠다”는 생각이 드러난 순간,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한 일이다. 영국에 살던 미국인 기네스 펠트로가 영국의 날씨와 서비스산업을 비하했다가 영국언론으로부터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비판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고의 문화강국 미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연예인이 미국과 미국인을 비하하고도 미국인들로부터 “그를 인정해주자”는 포용력을 선사받았던 사례는 찾기 어렵다.
또한 이들의 시각에는 연예기획사의 상술 논리도 배제되어있다. 박재범을 퇴출시킨 측은 박진영의 JYP엔터테인먼트이다. 소비자들이 아무리 불매운동을 하고자 해도, 기획사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최소한의 팬 이탈을 감수하고 활동할 수 있다. 즉 소비자의 주권을 행사한 네티즌을 비판하기 이전에 이들은 우선적으로 대중 설득도 없이 자신들이 키운 스타를 퇴출한 연예기획사 문제를 먼저 거론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과 비슷한 시각을 보였지만 연예기획사 문제를 거론한 한국일보 서화숙 편집위원의 칼럼이 돋보인다. 서 편집위원은 폐쇄적 애국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키워진 연습생 출신 아이돌 가수가 지닌 태생적 한계이다. 그러니까 재범이 떠난 데는 대중의 파시즘보다 업계의 상업주의 책임이 더 크다”며 기획사를 비판했다. 해럴드경제의 서병기 대중문화 전문기자도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없이 춤과 노래만 기계적으로 배워 한국 연예계로 들어온다면 제2의 박재범도 생길 수 있다. 교포 출신 연예인에 대한 정체성 교육이 절실하다. 앞으로는 그게 아이돌그룹 기획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일이 될지도 모른다”며 연예기획사의 무분별한 재외교포 스카웃 경향을 지적했다.
촛불 때는 네티즌의 광기를 집단지성으로 예찬, 박재범 사태 때는 네티즌 맹비하는 진보좌파의 이중성
진보좌파 언론 측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애국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오마이뉴스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 22세 청년을 쫓아냈다’다는 문화평론가 김갑수씨의 글을 통해 “이렇게 절절한 사과를 한 22세 청년에게 무려 1만 개나 되는 댓글을 붙이고 별의별 저주의 언사를 퍼붓더니 그것을 신문지상에 보도함으로써 파문을 확대 재생산하여 결국 가수 생명을 단절케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사란 말인가. 이런 것을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하여 애국심이라고 해도 애국심 또한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따라서 이것은 심한 말로 해서 '광기'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될 수 없는 행태라고 본다”며 네티즌들을 광기의 집단으로 몰았다.
미디어스의 허민호 연구원은 “아이돌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교포이거나 외국국적자이고, 그들이 하는 음악 역시 한국적인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국적화된 정체성을 가진 아이돌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치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니까 아이돌 스스로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여를 기대하는 상황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라며 아이들 스타에게 과도한 정치적 임무를 부여하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 역시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오마이뉴스와 미디어스 등 진보좌파 언론에서는 광우병 당시의 네티즌들의 광기에 대해 집단지성이라며 예찬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번 박재범 사태에서 네티즌의 여론의 위험성을 인정했다면, 이는 모든 사안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네티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방향성에 걸맞는 방향으로 광기를 보였을 때 과연 이들이 이를 비판할지,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회가 아이돌 그룹에게 정치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좌파 매체들이 전체 네티즌을 정치세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 당시 "지식인들은 대중이 분노할 수 있도록 사수해야한다"며 네티즌들의 집단지성을 예찬해온 블로거 진중권씨도 "애국주의적 광기"라며 네티즌들을 비하하고 나섰다. 앞으로 네티즌들은 분노를 표출하기 전에 신좌파 언론과 지식인들에게 "우리 지금 분노해도 되나요?'라 물어보고 분노를 표출해야할 것. 신좌파 집단의 입맛에 맞으면 집단지성이고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집단광기인 셈이다.
좌우를 망라하여 대한민국의 문화담론은 과도하게 신좌파적 담론의 세례를 받아왔다. 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좌파 정치세력이 내세운 대안 담론이 문화 영역의 신좌파 이데올로기였다. 신좌파 이데올로기는 정부를 부정하며 민족을 부정하며 문화적 투쟁을 통한 세계 네트워크를 목표로 삼는다. 이런 신좌파 담론은 6.8 혁명 당시 프랑스와 미국 등의 젊은층에 널리 퍼졌다.
폐기처분된 1968년의 서구 신좌파 담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대한민국 언론과 지식인
문제는 이런 신좌파 담론이 현재 미국과 프랑스에서조차 주류담론에서는 사실 상 소멸되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가 급격히 산업화되면서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문화를 주요 국가산업으로 인식하여 지원과 보호를 해주고 있다. 일본이 ‘겨울연가’ 등의 한류를 수입할 때 NHK는 물론 자민당까지 개입했던 이유도 바로 침체된 일본의 드라마 시장 활성화라는 국가적 전략 때문이었다.
언론이 신좌파적 시각으로 문화를 접근하는 데에는 한국의 문화담론의 지식인 시장이 여전히 신좌파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 국가를 지향한다고 해서 한국에서 돈만 벌어가겠다는 외국인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신좌파 담론은 현실적으로 그 어떤 국가에서도 통용될 수 없다. 일본의 신좌파 역사학자인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끼는 일찌감치 1995년 ‘동북아시아공동의 집’이라는 책에서 한류를 예견, 한민족의 역사성과 세계 네트워크를 언급했다. 일본의 신좌파 학자도 문화의 민족성을 인정하면서 한국인도 하지 못한 한류를 예견했는데, 문화 수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2009년 대한민국의 지식인과 언론의 문화담론만 이미 폐기처분된 1968년의 사대주의적 서구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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