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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과 동교동계의 신당창당 진단

청년은 진보요, 청년은 육체적 연령이 아닌 정신에 의해 결정

1. 낡은 담론이 새로운 생명의 싹과 그 원천(감성)을 자르는 한국 정치 평론계

화합에서의 으뜸을 자임하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가 신당창당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는 일설이다. 혹자들은 그의 나이를 들어 회의적인 시각을 표출한다던지, 역사적으로 소임을 다했다는 식으로 평가를 하여 부정적 시각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바로 그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이야 말로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위해 혁파되어야할 고정관념 껍데기 다름 아니다.

이미 의학기술의 상상을 초월하는 발달로 연령에 의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적 능력이 크게 후퇴를 하는 점은 막을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현대 정신문명의 발전은 바로 정신의 힘도 놀랄 정도로 키움으로써 중요한 것은 바로 현 시대에 이러한 복이 내려진 것을 받아서 사용해 내었는지 아닌지가 관건인 것이다.

단순히 숫자가지고 자신의 판단을 서술해 내는 것은 낡은 정신이고 낡은 언어라는 낡은 도구에 실려나오는 낡은 정신의 공기를 보게 된다. 마치 자연의 거친 마신에 굴종하고 섬기며 정복되어 사는 운명론자의 퇴폐적 정신과, 자연을 이해해내고 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악수하는 현대문명의 진보한 정신이 이루었고 또 그려내는 정신, 이러한 인간의 밝은 면에의 긍정과 존중, 이 두가지 상반된 정신 중 어떠한 정신으로 인생을 사느냐의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역사의 도도한 진보의 물결에 휩쓸려 가라앉아 사라져 플랑크톤의 영양이나 될 그러한 낡은 정신이 마치 옳다는 듯이 상대를 재단하고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정신이 사회를 주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설은 지금 누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가? 진보라고 자칭하는 자들, 도덕적이라고 믿는 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현대 문명의 중요한 화두는 바로 숫자 이면에 있는 미개척된 부분을 어떻게 인식해내고 이를 정교한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혹은 이 언어도구를 발명 창조하여 반영해내느냐, 그래서 우리 사회의식 속에 유효하게 작동하게 하느냐가 오래 지속되어 내려온 화두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아직 그리 사람이 존중받고 사람 살만한 세상이 못되는 이유는 바로 대중의 인식에 숫자가 판단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그 외의 훨씬 중요한 영역은 인식하고 반영할 언어라는 도구는 오히려 삭제, 왜곡, 축소, 모호화 되었기 때문에, 그 의식 속에는 가장 친숙하고 명료한 숫자가 가장 주요한 것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항시 이야기 하지만 진보, 개혁은, 정치 성향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정신의 힘의 발달 수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의 힘은 언어라는 도구가 정신에서 남들보다 더 작동하는 경우,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도 더 잘 이해하고, 그 작동 방식을 잘 이해하여, 그의 정신 속에서 더 잘 작동하는 경우 그의 정신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고정된 평면 유리만 가지고 세상을 반영해 내다가, 보다 정교하게 투사해낼 수 있는 현미경이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더 잘 반영reflect해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혹은 더 나아가 평면이 아닌 움직이는 원형의 동적 렌즈의 카메라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 평면 거울에서, 사각형 렌즈, 사각형이 원형렌즈로 바뀌는 것, 바로 이러한 것이 새로운 언어라는 것으로 사실의 다른 이면이 반영reflect되게 되고, 그 인간이 인식해 내지 못하던 다른 이면을 보다 더 정교하게 반영해내는 둥근 원형의 렌즈가 그리고 원형의 렌즈에서 왜곡도도 최소한으로 줄이는 정교한 기술이 바로, 해당 언어를 더 정교하게 이해하고 또는 이를 더 정교하게 하기 위해 새로 개발된 용어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진보나 개혁이나 모두 이 숫자라는 평면거울을 극복하지 못하는 차원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진정한 진보개혁이 불가능한 것이지, 남 탓, 국민 탓, 특정 정치인에게서 주요 원인을 찾을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마치, 필자의 예전의 비유를 들자면 날씨가 추워서 영아 사망률이 높다라고 하는 수준의 단순한 인식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외부의 모호한 것에서 원인을 주로 찾는 미약한 정신은 더욱 외부의 환경에 더욱 민감한 정신을 갖게 되며 그래서 07년 대선 때 더욱 외부의 변수에 목숨 줄을 거는 선거전략이 나온 것이 딱 그들의 수준이었음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 결과는 상대의 결정이 자신이 원치 않던 것이자 주저앉아 울부짖는 수준이었음이다.

2. 그러한 정신문명 수준에서 나온 자연스런 현실과 한화갑 전대표의 행보가 한국 사회와 문명 진보에 가져올 수 있을 긍정적 효과

이렇게 숫자가 가장 주요한 가치를 결정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숫자를 혁신적으로 높힌 정치세력이 황가귀족 통뼈로서 대권 지지율 1위를 달리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단순히 문제는 귀족 출신 중 정치 귀족 통뼈가 최고 지위에 오르느냐, 상경계열의 전통의 귀족이 최고 지위를 차지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현재 대권지지율 1,2위는 박근혜와 정몽준이고 한국민간 사회의 정신문명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예측가능한 것이었다. )

한화갑 전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된 것이 그의 74세때였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가 다음 대권에 나온다 해도 10여년 전보다 건강수명이 더 늘어난 이때 안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김대통령은 그 이후로도 5년을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노무현이 대통령 취임초기 당시, 김 대통령이 그냥 한 1,2년 정도만 더 해주고 내려갔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졌었던 것이다.

본 글에서 필자는 한 대표가 대통령 당선되기를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한 대표가 반영할 수 있는 한국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이성적으로 한국사회에 발전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기 때문에 이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식이기에 그렇다. 동시에 정서 뿐만이 아닌 내치와 외치의 방향에 있어서까지 그는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이는 자원으로써 널리 알려지고 토의의 수면으로 올라와 이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당 내에서도 합리적 중도실용적 정책을 많이 냄으로써 많은 지지자들로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안정적 정서를 갖게 하기도 하였음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한국의 정당 정치로는 힘에 의한 죽고 사는 것만 있을 뿐, 많은 다양한 사람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승자의 자비심에 의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상황을 분열적 소위 친노 개혁인사들이 잘 저지르는 것이다. 협소한 도덕논리를 이용하여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사회를 진보시키는 원천은 사람의 감정이지 협소한 도덕, 이성이 아닌 것은 역사를 통해 줄곧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는 바로 이러한 정서를 근간으로 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들이 진보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한국의 근대화는 잘못된 토속적 유교문화의 퇴행적 부분을 키워서 진행한 것이기에 봉건시절 보다 더 퇴행한 면이 나타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성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지역의 감성인 것이, 대개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이성의 시대를 거치며 발전해 온 과정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특히 호남이라는 지역의 감성이 왜곡된 현대화를 제대로 된 현대화로 진보시킬 수 있는 원천이 있는 것이다. 이 원천을 협소한 도덕적 가치기준으로 재단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닌 말이다. 이러한 충돌은 항시 있었던 것으로 그 재단하고 부정하는 자가 항시 역사의 반동으로 나타났음을 상기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구민주당과 그 대표적 정치인 한화갑과 동교동계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충청도 지역도 바로 그러한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할 수 있는 유력정치인 이인제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세종시 방안에서도 한 대표와 이인제 의원은 민주주의의 개인성 존중과 합의의 정신을 체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스탠스,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어차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재 민주당의 치명적 전략지대인 서울, 경기, 그리고 중부권과 충남 지역에서 친노인사를 배치함으로써 패배는 시간문제인 것으로 여겨짐을 받고 우려를 낳고 있음이다.
다시 한번 지역정서를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끼리 힘을 합쳐 이를 부정하고, 기존의 도덕가치로 억누름으로써 우위에 서서 조종하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하는 세력을 꺾어야 한다. 하늘이 지역민에 주신 영산강을 잉여와 저주와 같은 것으로 만들고 이를 개혁하려는 것도 반대하는 세력이 상식적으로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일 수 없다. 세종시를 자신의 정권 때 했던 방식으로만 나가야 하고, 토론을 통해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 나가려는 마인드가 부재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원안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억지부리는 세력은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여당과 정책적인 면에서 일치하는 면을 보였다고 예를 들어 이낙연 의원이나 추미애 의원을 해당행위자로 모는 것은, 한나라당 이중대냐고 같은 당 사람이 발언하는 것은 바로 모욕, 무고행위로, 그것이 바로 해당행위로써 윤리위에 제소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동시에 전에 정권을 잡았을 때 부패혐의가 발생한다면 오히려 당 내부에서 더욱 공정하게 밝히고 윤리위에 제소하는 것이 바로 환골탈태로 국민의 선택에 부응해주는 것일 것이나 그 반대로 된 것이다. 당의 일부인사가 잘못한 것이 당의 잘못이 아닌 것이고, 이를 두둔하고 방조하고 수사를 방해하는 것이 오히려 자당이 먹을 필요 없는 욕을 스스로 뒤집어쓰겠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정작 권력형 비리혐의자인 그를 지방선거의 대표격인 서울시장이라는 서울시라는 공무원 집단의 수장으로 낸다는, 정상적인 정신으로 이해가 안가는 서비스를 국민에 쳐질러 대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 혐의가 불거져 나오기 전, 나올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는데 말이다.

김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 정신은 한국의 웬만한 청년보다 더욱 청년다웠음을 새겨야 한다. 과연 야권의 그 누가 한 대표처럼 청년과 같은 주체적인 사고와 발언을 할 수 있는가? 범속한 지지자와 밥그릇 눈치보기식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 아니던가? 이는 민노당류가 전담하여 가지고 가게 해야 한다. 유시민 조차도, 안희정 조차도 사실 그러한 이미지를 거북스러워 하고 있음이나, 국민들에게 민주당의 태도의 이미지는 바로 민노당류(類)와 별 다를 바가 없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청년정신의 진수는 필자는 그의 대통령 당선이후 좌파적 정책을 자유주의적인 그것으로 과감하게 전향한 그 태도에서 특히 발견한다.

그리고 분열을 전통과 습관인 것처럼 만든 세력, 이것을 위해 도덕적 명분을 기반한 것으로 상대를 없에려는 세력 모두 통합이라는 높은 기술을 일구어 내지 못함은 자명한 것이다. 인식 수준이 그처럼 시대적으로 뒤쳐진 것이기에 이념의 시대도 넘어서 나온 진보적 방법인 중도실용이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통합이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상대의 감정도 존중할 수 있음으로 기인할 수 있다. 바로 일단 충남지역 기반인 이인제와 손 잡고 어차피 지방선거 이후에 퇴출될 친노세력들, 특히 충남에서 안희정은 이인제에 의해 물러나게 되고, 충청도의 지역정서를 인정하고, 전남의 지역정서를 인정하여, 아마 이명박 정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내각제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때 못다 이룬 내각제의 합의를 이루어 낼 수 있음이다. 여기에는 친노 중에서도 나름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생각도 가지고는 있는 정세균 대표도 사실 긍정적으로 보는 발언을 해서 민주당 내부에서도 의견의 갈라짐이 나왔던 것이다.

지난 글에서도 지적했듯 친노 정치인조차도, 지역선거에서 크게 타격을 입을 국참당도 내각제 카드를 잡고서 자신의 밥그릇이라도 현실 의석화 해보자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동시에 지역 연합 강소국제를 주장하는 이회창의 선진당과, 대선 가능성이 아예 없는 민노당류, 이들도 지방선거에서 당연 재미를 볼 수 없고 노회찬, 심상정이라는 대표주자들도 처참한 패배를 할 것으로 여기는데, 이로써 더욱 타격으로 다가와 내각제카드를 잡을 수도 있다. 이렇게 중선거구제로 인한 의석수 증가와 지역기반 정당들이 더욱 늘어나고 세력화 되면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발전의 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이는 필자가 줄곧 주장해온 것으로 이에 관련한 서술은 필자의 저서<희망을 위한 경제관> 부록 부분을 보면 나온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이는 분명 더욱 풀뿌리 민주주의제도가 제대로 돌아가는 방법임은 맞기에 그 방향으로 가는 모험적 행보도 필요성이 있다. 마치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토양으로 보이던 해방조선에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했던 것처럼..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 못한 정도의 진보였다. (물론 객관적으로야 많이 부족하다지만 그래도 예전시대와의 상대적 비교를 하면 많이 진보했다.) 이제 독재를 더 이상 용인치 않는 한국사회에서 이제 다시금 의원내각제를 해볼 만한 시점도 되지 않았는가 한다. 민주당은 세종시 약속을 주장한다면 충청도인들과의 내각제 약속도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바로 이러한 진보적 행보가 한 대표와 동교동계가 소중히 하고 대변하려하는 그 정서를 기반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행보에서 시작될 수 있고, 백날 외쳐봐야 거의 되는 것을 못 본 민노당류, 열우당류 세력들의 연합 행보도, 실질적으로 더 큰 폭으로 일어나는, 여야를 넘어선, 실질적 통합이 예측되는 것이다. 이를 그간 화합에 으뜸임을 주창해온 한화갑 전 대표가 해낼 수도 있음이다. 동시에 전라도 출신이라는 짐 때문에 스스로 갖고 있는 발전 잠재력이라는 자원을 방기하게 되고, 십분 발휘하지 못했던 호남인들의 원한도 푸는 업적을 이루어 낼 수도 있음이다. (그는 그의 능력과 정치적 명성, 업적에도 불구하고 장관이나 총리자리 하나 하지 못했다. 아마 더 크게 키워 쓰려는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김경재 전 최고위원 등과 같이..) 안타깝지만 사실 그도 그러한 것의 희생양이 아니었나하는 것이다.(현대정치의 가장 큰 진보는 무엇으로 여길까? 바로 해원과 상생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80세의 나이지만 아직도 에너지가 넘치고 건강해 어쩔 줄 모르고 활발히 행동하는 현재의 권노갑 고문의 모습을 보기 바란다.

3. 청년은 진보요, 청년은 육체적 연령이 아닌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대적 소명이 다했다고 물러서라는 말은 인간의 변화가능성과 잠재성을 부정하는 낡은 정신의 사고방식 그것 다름 아니다. 단지 구시대적 낡은 유물, 반인간적 반환경적, 생명을 질식케 하는 죽음의 공장설비 같은 것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과거적 가치평가 구조에서만 그럴싸하게 느꼈지만, 소중한 것을 더욱 섬세하게 인식해낸 정신으로는 그거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극복대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주장은 또한 정작 김대중 정권 때보다 그리 진보한 면도 두드러지지 않고 퇴보한 면은 많이 눈에 띄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던 사람들에게서 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정치세력이 왜 김대중 정권보다 진보하지 못했는지 다시 한 번 이상할 것이 없다고 느낀다. 그들에게서야 노무현이 김대중 시대를 닫고 진보한 새 시대인 것처럼 억지스럽게 여기고 싶겠지만, 또다시 디제이를 (앞으로는 위한다면서) 실지로는 능멸함으로 이득을 얻고 싶겠지만, 이는 한마디로 억지스러운 주장인 것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금도 그리 중점을 두고 있는 가치인 통합과 화합의 정치만 봐도 오히려 김대중 정권 때가, 노무현 정권 때보다 앞섰는데 말이다. 이거만 제대로 해주어도 이미 또다시 진보가 된다. 그러나 청년정신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이상의 새로운 긍정적 바람을 불고 오는 것이다. 마치 디제이가 급격히 자유주의적인 면으로 바뀜으로 놀랄만한 성과를 냈고, 이로 인해 세계의 찬사를 득하였듯이.

4. 비유를 통한 조언

이에 누구든 자신의 정신이라는 내면의 방이 나쁜 공기로 중독되어 가고 있으면 창을 활짝 열고 문을 열어 환기하여 바뀌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민주당이라면 절 밖에서 이발사라도 불러와서 깎아버리는 것이 바로 절간이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머리깎는 것이 싫은 중은 그 절을 나가면 되는 것이다. 머리 안 깎고 세속적 논리로 도를 닦을 수 있다는 국참당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 불교의 중도 환속과 출가를 반복하는데, 당연히 필자의 아량으로도 몇 번을 환속 후 다시 돌아와도 충분히 받아줄 수 있으니 머리 깎지 않으려면 절을 떠나 환속하라는 것이다. (물론 머리 길다고 수도 못하는 것은 아니므로, 비유는 비유로써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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