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의원, 정용화 광주전남지역발전특위위원장, 정운천 전 농림부 장관(좌로부터)
대부분의 옛 전투에선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적진을 향해 말을 달린다. 이 장수의 용기에 많은 병사들은 감동을 받아 충천된 사기로 적들을 물리치기도 한다. 간혹 삼국지의 관우나 조자룡처럼 뛰어난 무공을 갖춘 장수는 적진을 교란시키고 적장의 목을 배어 유유히 생환하기도 한다.
올해 4.11 총선에선 여권과 여권의 치열한 대회전이 펼쳐질 전망이다. 연말 대선을 앞둔 터라 여야는 물러설 수 없는 진검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여야에선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들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은 호남, 민주당은 영남 등 자신들의 약세 지역에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지역주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
호남에 뛰어든 한나라당 트리오, 이정현-정용화-정운천
한나라당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 대표적인 장수는 친박(친박근혜)계 핵심인 이정현 의원(비례대표)이다.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던 이 의원은 광주 서구을에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광주 서구는 17대 총선 당시 이 의원에게 ‘낙선’이라는 당연한(?) 성적을 줬던 곳이다.
이 의원은 지역 유권자들에게 “경쟁이 없는 정치는 시민을 속이고 오만하며, 거만해지고 썩기 마련이다”, “호남이 대접받기 위해선 정치에 경쟁을 붙여야 한다” 등을 호소하며 광주 지역 최초 한나라당 지역구 의원에 도전하고 있다.
광주 서구갑엔 정용화 한나라당 광주ㆍ전남 지역발전특위 위원장이 출마를 준비 중이다. 정 위원장은 지난해 6.2 지방선거 당시 광주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13%의 지지를 얻은 바 있다. 정 위원장은 “지역민들이 민주당의 장기 집권 체제에 염증을 느끼면서 새로운 경쟁구도를 열망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두 사람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관심은 호의적이다. <무등일보>가 지난 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의원은 다자간 가상대결에서 17.8%를 얻어 현역인 김영진 민주통합당 의원(20.3%)과 2.5%p의 근소한 격차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정 위원장(13.1%)도 현역인 조영택 민주당 의원(24.2%)를 바짝 뒤쫓고 있다.
전북에선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정운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뛰고 있다. 정 전 최고위원은 전북 전주 완산을에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정 전 최고위원은 지난 전북지사 선거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18%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인 바 있다.
<전북일보> 여론조사 결과, 전주 완산을은 한나라당 지지율이 11.3%로 도내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전주 완산을은 현역인 장세환 민주통합당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해 무주공산인 지역이다. 정 전 최고위원은 전북지사 선거 당시 완산구에서 23.59%를 득표, 이번 총선에서 당선 가능권에 들지 주목받고 있다.
영남에 뛰어든 ‘문성길 트리오’와 김부겸
민주통합당의 분위기는 과거와 다르다. 유력 정치인들이 ‘기피 지역’이던 영남권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있다. 부산저축은행 사태,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등으로 인한 부산ㆍ경남(PK)의 민심 변화가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들은 이른바 ‘문성길(문재인ㆍ문성근ㆍ김정길) 트리오’다. 야권의 유력대권 주자로 부상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문성근 국민의명령 대표가 선봉에 서고, 참여정부와 친노(친노무현)계 인사들이 낙동강 벨트 공략에 나섰다.
문 이장과 문 대표,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각각 부산 사상구와 북ㆍ강서을, 부산진을에 도전장을 냈다. 여기에 노 전 대통령의 비서관 출신인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김해을)과 송인배 전 청와대 행정관(양산), 최인호 부산시당위원장(부산 사하갑), 박재호 전 국민체육진흥공단이사장(부산 남구을), 전재수 전 대통령 제2부소식장(북ㆍ강서갑)에 출마할 예정이다.
재선의 조경태 의원은 사하을에서 3선에 도전하고 김영춘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부산진갑에 도전장을 내민 상태다. 경남에는 참여정부 청와대 행정관 출신의 김성진(마산갑)씨와 하귀남(마산을) 변호사, 김조원 진주과학기술대 총장(진주갑ㆍ전 감사원 사무총장)이 출마할 예정이다.
4선의 장영달 전 민주통합당 의원도 일찌감치 기존 지역구(전북 전주 완산갑)를 떠나 경남 의령ㆍ함안ㆍ합천 출마를 선언해 표밭을 갈고 있다. 수석 선봉장인 문 이사장은 PK 지역에서 “과반 의석 달성”을 목표로 제시했다.
대구 경북(TK)에 대한 공략도 시작됐다. 3선의 김부겸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경기 군포)을 포기하고 대구 지역 출마를 선언했다. 김 의원은 3선 이상 중진들과 대권주자들을 향해 기득권 포기를 주문하며 민주통합당 약세 지역 출마를 호소하고 있다.
수도권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민주통합당의 약세 지역인 강남권에 대한 도전이 늘고 있다. 전현희 의원(비례대표)이 현역 의원 중 가장 먼저 강남권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전 의원측은 “당이 원한다면 강남권 어디든 나가서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원외 중에선 이규의 전 수석 부대변인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몸보신 정치인들, 당 안팎에서 빈축
이처럼 적진에 뛰어든 장수들과는 달리 ‘당선’에 목적을 둔 행보로 당 안팎에서 빈축을 사고 있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특히 기존 자신의 지역구를 버리고 수도권 출마를 선언한 중진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과거와 달리 서울 등 수도권이 깃발만 꽂으면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득권’ 포기가 퇴색되고 있어서다.
정세균 전 대표(전북 진안ㆍ무주ㆍ장수ㆍ임실)와 김효석 의원(전남 담양ㆍ곡성ㆍ구례), 천정배 전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된다.
정 전 대표는 오래 전에 수도권 출마를 선언하고 서울 종로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 김 의원도 18대 총선 당시했던 불출마 선언 약속을 지키고 최근 서울의 강서을 지역 출마를 선언했다.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민주당 후보경선 당시 자신의 지역구(경기 안산 단원갑) 출마 포기와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던 천 전 최고위원은 서울 동대문갑 출마를 준비 중이다.
그러자 그간 서울의 각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던 원외 예비후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서양호ㆍ지용호(동대문갑), 박홍근ㆍ송재덕(중랑을), 오훈(강서을), 박병권ㆍ정환석ㆍ차성환(송파병) 예비후보들은 5일 기자회견을 갖고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전ㆍ현직 중진 의원들은 당의 승리와 총선 승리를 위해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한나라당 강세지역에 출마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려라”고 요구했다.
민주통합당의 한 당직자도 “당의 지도자급 의원들이 너무 자신들만 생각하는 모양새가 됐다”며 “그동안 당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이제는 국민들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꼬집었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에서 그나마 당선 가능성이 높은 서초ㆍ강남 지역에 비례대표 의원 등이 상당수 몰린 것을 두고 곱지 않은 시각이 상당하다. 한 친이계 비례대표 의원은 서초ㆍ강남은 물론 경기 분당, 용인 등 한나라당 우세지역으로 점쳐지는 곳에 대한 출마를 동시에 고려하는 ‘문어발 행보’를 보여 “기회주의 행태”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처럼 당이 어려울 땐 당을 위해 헌신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신들의 몸보신만 생각하는 일부 의원들을 보면 정치인이라고 생각되질 않는다”고 질타했다.[데일리안=김현기자]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