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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이동연의 싸이 강남 스타일과 디워 평을 보며

강남스타일은 K-POP이 연구해야 할 대상


【서울=빅뉴스】 김휘영의 문화평론=솔직히 필자는 싸이를 높은 수준의 가수로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최근의 '강남 스타일'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 대중문화계를 뒤흔들기 까지는.

올해 대학 새내기 여학생이 필자에게 ‘강남 스타일’을 들어 보길 권했을 때, 필자가 대답한 말은 다음이었다. “싸이 곡이 거기서 거기지 뭐, 가다가 뚝뚝 끊어짐의 반복,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억양이 묻어나는 멜로디!” “그게 아니라 난리래요, 난리!” 라며 들어보길 채근 하길래, 필자의 대답은 또 시큰둥했다. 마지못해 들어 보고서 한 말은 역시 '별로!' 였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고나 할까? "싸이가 클래식의 세례를 좀 더 받았더라면 저 곡 보다는 좀 더 수준 높은 곡을 만들지 않았을까?” 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필자: ”강남 스타일이 마까레나와 비슷한 점이 많네“
"그런데 혹시 마까레나 라는 곡은 알고 있니?”
새내기: “ ......? "
필자: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헤이, 마~까레나!"
새내기:“아~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요!”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마까레나는 스페인의 중년 남성 듀오가 발표해서 세계적인 빅히트를 친 곡이다. 이 경쾌한 곡에 대한 인상에 약간의 얼룩이 있다면 영문도 모른 채 납치(?) 당해 갔던 다단계 회사 A의 강당에서 회원들이 박수치며 놀던 리듬이 바로 마까레나였다는 점 뿐이다. 왜 리듬이라고 했느냐 하면 필자도 아직 이 곡의 뜻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리듬만 안다. 필자가 중국어, 이태리어, 독어, 불어, 한국어, 영어. 심지어 라틴어까지 읽고 어느 정도 독해가 가능하지만 하필이면 마까레나의 원어인 스페인어는 읽을 줄 만 알지 그 뜻은 거의 모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리듬만은 한번 듣고 여태까지 잊어 버린 적이 없다. “헤이 마~까레나!” 라고 하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몸을 비트는 연상을 하게 되는 게 이것이야 말로 리듬의 힘 아닌가? 외국인들이 설마 강남 스타일에 나오는 가사의 뜻을 다 알고 열광하고 있을까? 그건 아닐 거라는 건 한국 사람들이면 다 안다.

싸이의 곡 강남 스타일에 대한 필자의 저평가가 대단히 오만한 시각, 좋게 말해야 '지적인 게으름'에서 비롯된 오판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현아의 “오빤 딱 내 스타일“의 버전이 나오고부터였다. ”오오~, 이게 좀 더 낫네.” 라는 수준에 있다가 강남 스타일이 빌보드 차트 10위권 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조회수가 2억 회를 넘겼는데, 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저스틴 비버 등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나 기록하고 있는 조회수다. 이즈음이면 이는 문화평론가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고 연구해야할 대상으로 등극한 것이지 이를 배척하고 백안시하는 건 자신의 분석력이 부족함에서 오는 인지왜곡의 수준일 뿐이다. 현재까지 K-pop 노래들이 기획사의 주가 조작용으로 조회수 조작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는 필자조차도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야 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대상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다.

강남 스타일은 실체다

오늘 명색이 교수라는 이동연 교수의 싸이의 강남 스타일과 디워에 관한 평론을 보면서 흔히 하는 말인 “한국에서는 교수 아무나 하나? 한국에서 교수질 정말 쉽게 하네! 한국 교수는 한번 자격을 따놓으면 더 이상 공부 안해도 되는 철갑통인 게 맞긴 맞나봐” 라는 말에 절로 끄덕여졌다. 필자가 보기에는 대한민국 교수들 중에서 이런 잉여인간 교수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빈번한 곳으로 한국예술종합대학이 첫 번째인 것 같다. 이동연 교수는 한예종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싸이가 노력하는 자세의 ‘백 분의 일’ 만이라도 배우기 바란다. 그리고 지식인은 진실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가슴에 새기기 바란다.

부끄러운 한예종 패밀리?

실로 세간에 나도는 비아냥인 “한예종 패밀리”라고 할 만한다. 한예종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잉여교수 짓 하는 분들이 많나? 과거 그렇게 무식한 짓을 많이 하던 진중권이 한예종 교수 자리 꿰차고 있었던 것도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진중권이 얼마나 무식한 파시스트짓을 많이 했는가는 이동연 교수부터 <김휘영, 진중권>으로 네이버 <뉴스 검색>, 또는 <지식 검색>해서 한번 보기 바란다. 특히 빅뉴스에 올린 필자 칼럼 ▲임재범-진중권-이택광에서 보는 문화사대주의 근성 - 한국 지식인들은 허위의식과 문화사대주의 근성을 버려야 ▲김형석-임재범 Vs 진중권 설전의 결과: 김형석 KO승-진중권 응급실행 - 궤변으로 사기쳐 온 진중권은 주제파악부터 하라! 라는 두 칼럼은 꼭 보기 바란다. 그리고 진중권이 이런 무식한 망나니짓으로 한국 사회에 온갖 폐해를 양산하는 일에 음으로 양으로 도와 줬던 이동연 교수도 반성 좀 제대로 하기 바란다. 한예종 교수들의 월급에는 국가 세금도 들어 가는 줄 알고 있다. 국민의 세금을 먹는 만큼 한국 문화콘텐츠의 발전을 위해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예종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한국 문화콘텐츠 산업의 향방에 미치는 영향이 강한데 거기 있는 교수들은 사람들의 기대와 수준을 전혀 못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다음 교수재임용 시기에 과감한 인적쇄신이 필요한 것 같고 무엇보다 정치에 오염되어 한국 문화콘텐츠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본연의 임무를 도외시 하고 있는 잉여교수들은 여지없이 짤라 내었으면 한다. 국민 세금은 받을 가치가 있는 분들에게나 쓰여야 하는 법이다.

디워가 허접 영화라구? 무식과 위선도 정도껏이야지

다음은 라민 세투데 뉴스위크(Newsweek) 기자가 세계적인 명감독 피터 잭슨과 제임스 카메룬을 모시고 나눈 대담의 내용이다. 두 사람은 전 세계를 뒤흔든 <반지의 제왕>과 <아바타>의 거장들이니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세기의 대담을 기획한 목적이 무엇인가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로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관계>다. 한국 문화산업계는 <디워 토론>때 워낙 무식한 평론가들을 불러 들이는 바람에 이렇게 중요한 주제는 건들여 보지도 못하고 엉뚱한 잉여토론만 하면서 귀중한 전파만 낭비했던 경험이 있다.

캐머런: ‘러블리 본즈’의 홍보 투어는 어떤가?
잭슨: 괜찮다. - (필자 註) 피터 잭슨의 CG 영화 <러블리 본즈>는 최악의 영화라는 평을 받고 흥행에도 참패했다.

캐머런: 아하! 어딘지 한참 생각했나?
잭슨: 그렇다. 이 전화 통화가 끝나자마자 파리로 떠나야 한다. 이 대담의 주제인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잭슨: 골룸과 킹콩의 주안점은 ‘눈’이었다. 골룸과 킹콩은 내가 지금까지 본 CG 영화의 캐릭터 중 '눈'이 가장 멋졌다.

캐머런: CG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으려면 ‘눈’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눈을 제대로 만들고, 눈에 비치는 조명을 세심하게 조정하고, 반사와 굴절을 잘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눈’이 큰 캐릭터를 만들었다. CG의 도움이 없다면 지금 같은 ‘아바타’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다.


디워에 시연된 ‘용의 눈물‘

영화 디워를 보면서 가장 감동 깊은 씬으로 한결같이 ‘용이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와서 사라에게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던 대목’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디워을 본 사람들은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뉴스위크에 나온 세계적인 두 거장의 대담이 2010년 1월에 나왔고, 심형래 감독의 [디워]는 2007년 7월에 개봉되었으니, 심감독이 이 두 감독들의 대담이 나오기 무려 3년 쯤이나 앞서 CG 캐릭터에서의 ‘눈(eyes)’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용의 눈'을 특별히 스크린 전체에 확대시켜 너무나 선명하게 한국 대중에게 선사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007년 한국의 기술로 이 정도까지도 가능함을 세계 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그가 이를 모르고 있었다면 굳이 승천하던 용이 되돌아와 눈물을 글썽이는 명장면을 보이지 않고서도 가령, 사라와 이든의 머리 위를 한 두바퀴 빙돌고 가는 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심감독은 일부러 용이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을 생생히 보여 주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게 바로 피터 잭슨이나 제임스 카메룬에 못지 않은 심형래 감독이 가진 천재적인 감각이 아니고 무엇이랴? 천재성은 타고난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공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분석해 내지 못하는 자칭 영화평론가라는 진중권은 뭐라고 했었나?

"사람이 안 우니 용이 운다!?“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본격적인 CG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CG 영화에서 진중권은 ‘눈’의 중요성을 파악해 낼 감각조차 못갖춘 사람이기에 "사람이 안 우니 용이 운다“다는 헛소리를 비평이라고 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진중권은 그야말로 '눈' 뜬 봉사, 청맹과니였던 것이다. 비평가가 보고도 모른다는 건 타고난 머리, 즉 아이큐와 무식함을 탓할 수 밖에 없다. 골룸이 절대반지를 향한 '탐욕의 눈'을 번뜩이고, 킹콩이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분노의 눈'을 부라리고, 심형래의 용이 사라의 헌신에 대한 '감동의 눈물'을 글썽여야만 세계 영화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시대에 기껏 사람이 울지 않아 문제라고? 여태까지의 한국 영화에서 눈물이 적었었나? 능히 홍수를 이루고도 남았다. 그야말로 '손수건을 준비하시라,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라고 광고해 왔던 <눈물 시대>는 <에로 시대>,<코믹 시대>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울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질질 짜고 벗기고 웃기는 영화로 어떻게 세계시장에 진출한단 말인가?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화에 기여해야 할 한예종 교수가 이것도 모르고 있다면 교수 자격부터 의심스럽다. 심형래 감독이 용가리의 실패를 딛고 절치부심하며 구축한 CG 기술은 한국 영화계에 기간산업과 같은 것인데 한예종 교수라면 누구보다 제대로 평가해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꼬투리를 빌미로 온갖 비난에 몰두해온 건 무지와 양심, 그리고 한국 문화산업에 대한 책임감까지 부재하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사람 아닌 '용'이 울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역사를 바꾼 디워

-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은 심형래 감독이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사람이 아니라 '용'이 울 수 있게 했기 때문에" 디워가 한국 영화사의 새장을 열어 제친 영화라는 걸 파악해 내지도 못했던 것이다. 머리 나쁜 사람이 부지런하면 사회에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는지 진중권이 한국 사회에 제대로 보였주었다. 바로 위에 제임스 카메룬이 “CG의 도움이 없다면 지금 같은 ‘아바타’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심형래 감독이 10년에 걸친 집념의 산물인 “CG의 도움이 없다면” 디워의 명장면인 <용의 눈물> 또한 불가능했음도 사실이다. 한국 영화의 시작을 1903년으로 잡는데 무려 104년 후, 2007년 디워가 나오고서야 우리는 헐리웃의 기술에 맞짱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심형래 감독이 한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디워가 나온지 무려 4년이나 흐른 후에 나온 <7광구>는 어땠던가? 오죽하면 관객들이 '디워는 <7광구>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고 했겠는가? 관객들은 이렇게 냉정하고 솔직하다. 잘 난 체하며 디워를 힐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진짜 무식한 평론가들' 보다는 새시대의 흐름에 솔직하게 부응하며 디워의 가치를 알아 보고 열광했던 관객들이 무려 4년 후에 <7광구>를 보고서야 그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한 일일 뿐이다. 참고로 <7광구>에서는 괴물의 '눈' 연기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동안 변화된 세상을 따라잡기 바쁜 시대에 4년이 어디 장난인가? 한국 영화는 4년 동안 뭘 하고 있기에 더 퇴보했다는 말인가? 역사의 눈( the eyes of history)은 이렇게 무섭고 냉혹하다는 걸 한국의 지식인들은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다음은 네이버 두산백과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한국 영화의 정의와 특징이다.

한국영화 [ 韓國映畵 ] : <요약> 한국에서 한국인이 제작·영상화한 종합예술

-<특징> 일반적으로 한국의 영화는 인간의 내면을 소박하고 여유 있는 묘사로 영상화(映像化)하는 데 장기(長技)를 지니며, 사회문제를 다루되 가족 구성원 속의 개인의 심정을 통하여 그려 나간다는 데서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영화는 사회성이나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이 대체로 희박해지기 쉽다는 약점을 가지는 반면, 한국 특유의 정신풍토를 배경으로 정적(靜的)인 감정과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 뛰어나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심형래 감독이 구현한 영화 <디워>와 심감독 이전의 한국 영화들과의 간격이 얼마나 넓고 차원 자체가 얼마나 다른지는 위에 나온 한국 영화의 특징을 얼핏 읽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심형래의 [디워]야말로 한국 영화가 그동안 보여왔던 <미워도 다시한번>류의 가족 신파극인 눈물질질 짜내기, <나는 77번 아가씨><뽕>류의 '벗겨야 돈이 된다'는 에로영화들, <조폭마누라> 시리즈의 코믹 조폭영화류, 이들을 일거에 탈피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확실히 알린 영화였다. 최첨단 IT기술과 장대한 스케일과 다이내믹한 역동성(力動性)을 가미한 그야말로 혁명적인 영화였다. 이런 영화에 순수한 관객들이 열렬하게 환호했던 건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문제는 관객들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못읽는 케케묵은 비평가들이 문제였을 뿐이다. 이런 잉여 비평가들이 활약하고 있었으니 심형래가 열어제쳐 준 새로운 시대를 꽃피우지도 못하고 나오지 말았어야 할 영화<악마를 보았다>와 <추적자><아저씨>와 같은 <잔혹시대>까지 쓰라리게 맛보아야 했지 않았던가?

호남마케팅

디워의 불운은 대한민국 문화시장의 거대한 폭포수인 호남마케팅에 감히 거역한 일이었다. 너무나 무모하게 <화려한 휴가>와 같이 개봉한 일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디워]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해 버리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겁한 침묵의 카르텔'을 강요받은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다 알다시피, 이 당시 비겁함만 있었던 게 아니다. 아예 이 호남마케팅의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해 맹렬하게 디워에 폭력을 가한 야비한 평론가들도 너무나 많았음은 역사는 분명히 기억한다. 호남에 아부하면 유명세와 돈과 권력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호남 마케팅 현상'은 필자가 1993~4년 즈음, 즉 최소 18년이나 전에 처음 규정해낸 문화 용어다. 호남마케팅 현상은 현재의 정치판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거역하는 자, 쏟아지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이 용어를 만든 당사자답게 이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필자는 왜 편한 길을 마다하고 <한국 영화는 디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것이다> 라고 과감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필자의 분석력과 안목에 대한 확신을 제쳐두더라도 필자가 아무리 거센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지식인으로서의 필자의 양심을 굽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디워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화려한 휴가>를 비난한 적은 단 한번도 단 한 글자도 없다. 필자 또한 80년대 대학시절, 5.18 기념일이면 밤에 횃불을 들고 반독재 투쟁대열에 나섰을 정도로 채무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를 옹호하기 위해서 <디워>를 비난하는 일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지식인으로서 절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는 기본 양심문제 아닌가?

디워와 강남 스타일의 성공에는 약간의 차이점만 제외하면 공통점이 매우 많다.(2부에서 계속)/김휘영 문화평론가 wepa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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