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물망초(대표 박선영 의원) 산하 국군포로송환위원회는 9월 27일 오전 11시 전쟁기념관 1층 웨딩홀에서 탈북 국군포로분들을 모시고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박선영 이사장은 “국정원장님이 사상 최초로 탈북 국군포로분들을 초청하여 선배님들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대한민국이 그 동안 비겁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늦었지만, 정부에서 국군포로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 국군포로 어르신들이 작년에는 스물 다섯분이 오셨는데, 올해는 열 네분만이 오셨다. 어르신들의 연세가 많아 지시니까 기력이 쇠약해지시는데 걱정이다.” 고 밝혔다.
이에 축사로 나선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모(신변안전을 위해서 성함을 밝히지 않음) 회장은 “정전 6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국군포로가 돌아오지 못했는가 생각해 봤다.” 며 말문을 열었다.
국군포로, 왜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나?
“국군포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싸웠다. 이들이 끝까지 항전하면서 시간을 벌어줬기 때문에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북한은 이들이 미웠을 것이다. 국군포로가 귀환하지 못한 데에는 매우 복잡한 이유가 있다. 우리 국군은 실종자가 약 40만명 이었고, 미군은 약 11만명이었다. 이들이 대부분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북한은 정전을 맞으며, 4만 6천여명을 생포하였다고 밝혔고, 우리군은 인민군 포로를 약 3만 7천여명을 생포한 것이다. 여기서, 포로를 맞교환해야 할 수가 맞지 않아서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약 14만 4천의 포로가 있었는데, 이중 2만명은 중공군 포로였고 절반은 국군이었다가 인민군으로 편입된 후 다시 국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었다. 포로들 사이에서도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 서로 ‘돌아가겠다.‘, ’돌아가지 않겠다.‘ 며 살육을 벌인 것이다.
북한은 국군포로들에게 남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이 난 것이 가고 싶은 사람만 보내라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포로 교환 때 1만 3천 4백44명을 남한으로 보냈는데, 이중 국군포로가 8,327명 이고, UN군이 나머지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실상은 북한에서 북한에 억류중인 국군포로들에게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 고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각 광산 등 오지에 끌려가서 노역에 종사하였던 국군포로들은 이 소식을 듣지 못하여 돌아오지 못한 것이었다. 이후, 1954년에 북한은 ‘국군포로’ 란 지위를 삭제하여 더 이상 남북의 협상테이블에 이 주제가 오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 후, 북한은 ‘더 이상의 국군포로는 없다.‘ 가 공식 입장이었고, 남한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조XX 중위가 탈북하면서 국군포로에 대한 실상이 알려졌고, 미국 의회에 진정서를 넣으면서 이 사실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국민에게 전쟁에 나가라 명령했으면, 무사히 복귀시킬 책무도 있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시 국군포로 문제를 김정일에게 꺼냈다가 갑자기 회담이 결렬될 뻔하기도 하였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남북대치 상황이 길어지면서 아예 이 문제를 신경 쓸 수가 없었기에 지금까지 남은 국군포로들이 모두 자유대한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정부가 그들을 전쟁터로 나가라고 명했으면 끝까지 귀환시켜야 할 의무도 있는데, 이를 져버린 것이다. 이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는 이 국군포로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갚아야 한다. “ 며 눈시울을 적셨다.
탈북국군포로 답사, 우리 정부가 데리고 올 것이라고 끝까지 생각했었다
이에 답사를 한 유XX 국군포로가족협회 회장은 “먼저 후원해 주신 D 그룹 문XX 회장님과 물망초 여러분, 인권단체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53년 6월 10일에 상부로부터 하달받은 명령은 적진을 정찰하여 중공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임무였다. 모두 3명이 출발하였는데, 이 임무는 ‘갈수는 있으나, 귀환은 불가능한 임무, 즉 100% 사망하는 임무’ 였다. 나는 중공군의 포로로 잡혀 하반신이 땅에 묻히는 고문을 당했으며 인민군 포로 수용소로 넘겨져서 산수갑산으로 불리는 검덕광산에서 노역을 치루었다. 나는 한번도 대한민국을 잊어본적이 없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있고, 대통령이 있는데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구하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북한도 사람인데 우리가 늙어 쓸모없어지면 돌려 보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60대)에 조국이 날 버렸다는 생각에 탈출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걸리면 죽는 걸 알았지만 내 조국에 꼭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북한에도 가족들이 있었는데, 내가 가면 이들이 또 고통을 겪을 것 같아서 망설이다. 시간이 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드디어 대통령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서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국군포로문제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실망을 했고, 북한의 부인이 죽으면서 한국으로 가라고 해서 탈북을 하게 되었다.
탈북 국군포로, 김대중 대통령 다시 만나면 "왜 우릴 버렸는가 따져 묻고 싶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다시 만난다면 “이보시오,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에 몇 명이 있는데, 다 부려먹고 힘도 없는데, 우리가 쌀도 주고 했는데 돌려주시오” 라고 왜 말을 못했는가 따져 묻고 싶다.
대한민국은 국민에게 싸우러 나가라고 명령했으면, 무사히 데리고 올 책무도 있는데 국군포로 문제를 왜 해결하지 않는가?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면 국민들에게 나가 싸우라 명령할 수 있겠는가?
전쟁포로, 미국과 일본은 끝까지 추적하여 유해라도 송환시켜 “한국은 포기”
미국은 4~5천 달러를 주고 미군 전사자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해 가고 있다. 북한이 일본 국민들을 납치했었다는 발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고이즈미 총리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결국 구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북한에서 발표까지 했고, 중간에 국군포로들이 다수 북에 생존해 있다는 증언도 나왔는데 왜 국군포로들을 구하러 나서지 않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후 1달 후 탈출했는데, 대한민국에 돌아와서는 감격을 했다. 번창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동료들도 보았으면 아마 기뻐했었을 것이다.
목숨걸고 탈출해서 X사단에 복귀해서 수십년만에 전역식을 치루었다. 중공군의 침공 시작을 알린 것을 인정받아 무공훈장도 받았다.
국군포로 아버지, ‘네가 돌아올 때 까지 죽지 않겠다.’ 94세까지 생존 ‘눈물의 전역식 치뤄’
내가 젊었을 때, 아버지가 “네가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서 국가에 공을 세우라.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죽지 않겠다.” 고 했는데, 정말 돌아오니까 아버님이 살아계셨다. 94세의 아버님을 모시고 전역식을 치룬 것이다.
그러나,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2세, 3세대들이 다시 맞써서 싸워야 한다. 교과서에서만 6.25를 써서 되겠는가? 6.25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에게 교육을 위해서 6.25 추모공원이 있어야 한다.
6.25 추모공원 반드시 만들어서 후손에게 교육시켜야
우리 국군포로들의 소망은 많은 국군포로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그중 또 일부는 끝까지 본분을 다했다는 사실들을 6.25 추모공원을 만들어 기록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본분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시키는 일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국가도 국민들을 사랑하고 국민에게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후대의 교육을 위해서 6.25 추모공원 건립이 되었으면 좋겠다.“ 며 눈물로 마지막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국군포로 자녀, 탈북해서 '아버지 영전에 바치는 노래' 눈물의 바이올린 연주해
이후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자녀로 태어나 탈북한 손XX씨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영전에 바치는 노래’를 바이올린 연주하여 국군포로 가족들의 슬픈 마음을 달래어 주었다.
손XX씨는 “나는 우리 아버지가 국군포로인 줄 몰랐다. 고등학교 이후 사회에 진출하려고 하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국군포로였던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왜 날 나았는지 원망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일하는 XX 광산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인간이하로 사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발버둥을 다 쳤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맞을 매를 거기서 다 맞았다. 죽도록 얻어 맞고 물건짝처럼 기차에 던져질 때 인간으로서 비참함을 느겼다.
아버지가 24살에 돌아가셨는데, 눈감기 전에 자매 6명중 나만 불러서 “내 군번이 KXXXX 이고, 할아버지가 손XX, 할머니는 이XX 이고, 내 고향은 XX이니 너만 알고 있어라. 그리고, 내 시신은 꼭 내 고향에 묻어다오.” 라고 말씀 하셨다.
국군포로 유해, 탈북 가족이 목숨걸고 모시고 왔지만, 한국정부가 ‘반입불가’ 판정
2006년에 탈북했는데 아버지를 천대했었던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그래서, 북한에 있던 아버님 유해를 올해 3월부터 준비하여 9월 10일날 모시고 왔다. 그러나, 추석전에 아버님 고향에 시신을 모실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정부가 막아서 아직 아버님 유해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버님 유해 고향에 안치할 수 있도록 박근혜 대통령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한국정부가 아버지 유해 반입을 ‘승인불가’ 판정을 내린 것이다. 한국에 와서 보니, 아버님이 자랑스럽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유해 반입을 꼭 승인해 주셨으면 좋겠다." 고 말해 장내를 숙연케 했다.
이후 어린이들의 발레공연 등 탈북 국군포로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펼쳐져 한 순간이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국내 공영방송은 '무관심' 취재 안했으나, 미국언론은 행사 전과정 녹화해 가
국내 민영방송사 몇 곳에서 취재를 왔지만, 공영방송사는 전혀 취재하러 오지 않은 반면, 미국 정부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는 카메라멘과 기자 2명을 파견하여 행사 전 과정을 녹화하였다.
국군포로들에 대해서 우리 정부는 관심이 없는데, 비해서 미국 정부는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어 대조를 이루었다.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할때도 미국 정부가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되며,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가 이 과정들을 추적하여 기사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어서 김정은을 전범재판소에 세우는 것이 한층 쉬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탈북 국군포로분들과 국군포로 가족분들의 애국가 제창
탈북 국군포로분들과 국군포로 가족분들의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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