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 ·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지난 1월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배춘희씨를 비롯한 12인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선고에서 판사는 피고 일본국은 원고에게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타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주권면제(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판결문을 입수하여 읽어보니 검증되지 않은 원고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언급도 적지 않다. 그 중 중요한 사안을 몇 차례에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은 도입부의 기초사실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다.
“1930년대 말부터는 일본 제국이 점령 중이던 한반도 내에서 남녀를 포괄하고 보도, 의료, 근로 등 여러 분야에서 ‘정신대’를 동원하여 왔는데, 1944. 8. 23. 일왕(日王)은 ‘여자정신근로령’을 칙령으로 공포하여 위 정신대를 공식화하였다. 1939. 9.부터는 ‘모집형식’에 의하여, 1942. 2.부터는 ‘관(官) 알선방식’에 의하여, 1944. 9.경부터는 ‘징용령 방식’에 의하여 정신대 등 조선인 동원이 이루어졌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가합505092 판결문)”
이러한 여건이 마련되었다면 인력이 필요한 기업에서 조선총독부에 기술 인력을 요청하고, 요청을 받은 총독부는 소집 대상자에게 1차 근로령서를 교부하여 소집에 응할 것을 명한다. 만약 소집 대상자가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다시 취직령서를 교부하여 재차 소집에 응할 것을 요구하며, 재차 소집 명령에도 응하지 않을 경우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 엔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냥 집에서 잠자는 여자, 들에서 김매는 여자, 우물에서 물 긷는 여자를 다짜고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소집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당시 조선에서는 총독부 시행규칙이 마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등록을 필한 여자가 없었다. 당시 광공계(鑛工係) 중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직업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이나 경험을 보유한 여자는 더욱 찾기 어려운 때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44년 10월 ‘국민징용의 해설’이라는 문답형 해설을 통해 조선에서 여자정신근로령은 적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1944년 8월 23일 조선여자근로령이 공포되기는 했지만 직접 여자 정신대를 소집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판결문에서 “1944. 9.경부터는 ‘징용령 방식’에 의하여 정신대 등 조선인 동원이 이루어졌다.”고 한 언급은 명백한 오류다. 더구나, ‘정신대 등’이라고 하여 정신대 외에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도 잘못이다. 동 시기에 정신대 외에 유사한 형태의 소집 관련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 학당 이영훈 교장은 ‘반일 종족주의’에 ‘조선여자 근로령이 조선에서는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고 썼다. 만약 재판부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검증을 제대로 못한 것이며, 읽고도 이렇게 썼다면 이는 전문가의 연구 성과를 무시한 것이다. 판결의 신뢰를 떨어뜨리고도 남을 일이다.
판결문은 그렇다 치고, 교과서에도 여자 정신대와 관련한 오류는 널려있다. 2019년부터 사용한 초등학교 사회, 2020년도부터 사용한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에도 정신대 관련 서술은 판결문과 다를 게 없다.
“일제의 인적 수탈은 여성을 대상으로도 이루어졌다. 여자 정신대 근로령(1944)으로 동원된 한국인 여성들은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금성출판사 한국사, p.224)
“법적 근거 없이 시행되던 여성 노동력 동원은 전쟁 막바지인 1944년에 여자 정신대 근로령이 제정되며 더욱 본격화되었다. 동원된 사람들은 한국과 일본의 군수 공장 등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강제 노역을 하거나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동아출판 한국사, p.195)
고등학교 8종 교과서 중 두 가지만 제시했지만 초‧중‧고 역사 관련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중 역사서나 등의 징용 관련 서술도 모두 차이가 없다. 법원에서는 엉터리로 판결문을 쓰고, 학교 현장에서는 엉터리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여자 정신대를 포함한 징용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 관리가 조선의 무고한 백성들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서 노예처럼 부린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커다란 오해다. 징용은 기본적으로 노동력 징발보다 노무 조정이 더 큰 목적이다. 평상시라면 회사에서 직원 모집 공고를 내고 취업자는 자신에게 맞는 회사에 응모하여 취업하는 절차를 거친다. 하지만, 전시에는 이러한 절차가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술 인력이 필요한 군수품 관련 공장에서는 필요한 기술자를 제 때 구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기술자를 등록하여 해당 기술자를 필요로 하는 회사에 강제로 취업시켜 군수품 조달에 차질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물론 본인의 의사와 달리 강제로 취업하기는 하나 그 외에 급여나 복지 등에는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44년도 후반기에는 일본에 있는 기술자들에게 가족수당과 별거수당을 지급하거나 노무관리를 개선하는 등의 혜택도 부여하였다는 보도가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강제 취업을 위한 전제 조건이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따른 국민등록이다.
당시 조선에서 남자 국민등록 요신고자는 대략 70여만 명이었으나, 여자들은 거의 전무할 정도였다. 때문에 여자들의 국민 등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따라서 여자 정신대 소집도 발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항조차 모르고 판사는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판결문에 언급하여 판결의 근거로 삼고, 교과서 집필자들은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