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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나오에쓰 포로수용소 사건(直江津捕虜収容所事件)’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9)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나오에쓰 포로수용소 사건(直江津捕虜収容所事件)’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 (기준일자 2021년 8월 30일판, 번역 : 요시다 켄지)





‘나오에쓰 포로수용소 사건(直江津捕虜収容所事件)’이란, 태평양전쟁 중에 도쿄 포로수용소 제4분소(현재 니가타(新潟) 현 조에쓰(上越) 시 소재)에서 호주인 포로가 학대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을 말한다. 전후(戰後) 수용소 경비원 8명이 포로 학대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몰려 요코하마 군사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목차 


1 개요


2 요코하마 재판 결과


3 평화기념공원 


4 참고문헌

 



1 개요(概要)

도쿄 포로수용소 제 4분소는 1942년 12월 7일에 니가타(新潟) 현 나카쿠비키(中頸城) 군 나오에쓰(直江津) 정(1954년에 시정시행(市制實行), 현 조에쓰 시)의 신에쓰(信越) 화학공업공장 내에 개설되어, 1943년 2월 나카쿠비키 군 아리타(有田) 촌의 가스가신덴(春日新田, 현 조에쓰(上越) 시 카와하라(川原) 정)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1945년 9월에 폐쇄되었다. 사역(使役) 기업은 신에쓰 화학공업 외 닛포스테인리스(日本ステンレス) 등으로 종전 시 수용 인원은 698명이었으며, 미국인 병사 338명, 호주인 병사 231명, 영국인 90명, 네덜란드인 39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되어 있던 호주인 포로 300명 중 60명이 194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지속된 대한파(大寒波)로 인해 폐렴, 영양실조, 각기(脚気) 등을 일으켜 병사했다. 미국인 포로 1명은 급성 심부전으로 1945년 7월에 사망하였다.


2 요코하마 재판 판결(横浜裁判での判決)

전후 수용소 경비원 8명이 포로 학대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규정돼 요코하마 군사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요코하마 재판에서는 최다의 사형 판결이 나왔다. 그 밖에 종신형 4명, 금고 40년, 20년, 2년 형이 각각 1명에게 선고되었다.

또한 당시 (일본군이) 포로에게 ‘우엉(牛蒡, Burdock)’을 사용한 요리를 제공했는데, 이 재판에서는 “나무뿌리를 먹였다”는 식으로 왜곡되어서 이도 역시 학대라고 규정됐다. 관련해서는 호주와 일본의 식문화의 차이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식문화 차이로 인한 오해(食文化の違いによる誤解)


태평양전쟁 중 영미(英美)인 포로가 ‘우엉’을 ‘나무뿌리’로 착각하였고, 나무뿌리의 섭취를 강요한 것은 학대라고 주장하여 전후 일본인 병사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시의 포로 학대와 우엉(太平洋戦争時の捕虜虐待とゴボウ)


우엉과 관련된 식문화의 차이가 초래한 비극적인 일화로 ‘전시 중 외국인 포로에게 우엉을 먹였다가 나무뿌리를 먹인 것으로 오인되어 전후 BC급 전범으로 몰려 처벌받았다’는 사건이 있었다. 1952년 12월 10일에 열린 제15회 일본 국회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법무성 보호국장 사이토 사부로(齋藤三郎)가 실시한 미국 파견 보고서에서,


“재판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해) 상당히 국정(國政)이 달랐으며, 일본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한다면 부당한 재판도 있었다. 일례로, 포로수용소의 소원들이 종전 직후 식량이 매우 부족함에도 (포로들에게) 가능한 좋은 음식을 주기 위해 우엉을 사서 먹였다. 그 당시 우엉은 우리 같은 사람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콩을 이틀이고 사흘이고 계속해서 먹는 시대여서 우엉이라는 것은 상당한 귀중품이었다. 그렇게 우엉을 먹였는데 건빵 대신 나무뿌리를 먹였다고 학대를 주장하여, 5년 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이듬해 1953년 7월 2일에는 참의원 후생위원회에서 일본 사회당의 후지와라 미치코(藤原道子)가 “우엉을 먹였는데 나무뿌리를 먹였다고 오인받아 25년형의 금고를 선고받았다”라고 발언을 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일본 대중문화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예컨대 만화 ‘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에서도 “포로에게 산우엉을 먹이고 25년의 중노동을 부과받았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으며, 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私は貝になりたい)’에서도 “우엉을 먹이고 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니가타 현의 나오에쓰 정(현재 조에쓰 시)에 있던 도쿄 포로수용소 제 4분소의 소장 등은 종전 후에 수용되어 있던 호주인 포로들로부터 ‘나무뿌리를 먹였다’라는 내용으로 고발을 당했으며, 소장을 제외하고 관련해 8명이 요코하마 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울러 나가노(長野) 현 시모이나(下伊那) 군 덴류(天龍) 촌에 있던 도쿄 포로수용소 제12 분소(미쓰시마(満島) 포로수용소)에 근무하던 경비원 1명이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고, 해당 재판 중 우엉을 먹인 일이 학대로 취급되었다. 


소마 사토루(相馬暁)는 1996년 저서에서 “미국인 포로에게 우엉을 먹인 일로 인해 1946년 요코하마 전범 재판에서 포로수용소 관계자가 2명이 사형, 3명이 종신형, 2명이 15년형 이상의 유기형을 선고받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 편집자주 : 소마 사토루(相馬暁, 1941년-2005년 3월 10일)는 일본 오사카 출생의 농업 연구자이다. 1966년에 홋카이도 대학 대학원에서 농학 연구과 과정을 수료한 뒤 농업 연구원 및 교수로 재직하였다. 소마 사토루의 ‘우엉 관련’ 저서는 아래의 1996년 산이치쇼보(三一書房)에서 출간된 ‘야채학 입문(野菜学入門)’을 참고 바람. ]


이와 별도로 아리무라 타모츠(村山有)는 포로에게 우엉을 차입하였다는 이유로 전범용의자로 지목되어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의해 구속되었다. 


[* 편집자주 : 아리무라 타모츠(村山有, 1905년 12월 24일-1968년 12월 31일)는 미국 시애틀 출생의 일본 저널리스트이자 와세다 대학교 강사이다. 또한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명예시민, 보이스카우트 일본연맹 이사, 보이스카우트 상담역을 역임하였다.]


밖에 극동 군사재판 당시 변호단이었던 기요세 이치로(清瀬一郎)는 ‘어느 포로수용소(ある捕虜収容所)’의 사례로, “우엉은 ‘옥스테일(소꼬리)’로, 두부는 ‘로튼 빈(부패한 콩)’으로 오인받아 포로들로부터 불만이 나왔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 이상 일본 위키 ‘우엉(ゴボウ)’ 항목 관련 부분 번역

 



마크 셀던(Mark Selden) 등이 저술한 ‘책 전쟁과 국가 테러리즘 : 긴 20세기에서의 미국, 일본,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War and State Terrorism: The United States, Japan, and the Asia-Pacific in the Long Twentieth Century)’ 129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 * *


한편, 제8 도쿄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지낸 아카사 토시노리는 1985년에 우츠미 아이코(게이센 대학교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합니다. 다만 저희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습니다. 그 당시 우엉은 일반인이 먹지 못하는 희귀한 음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센다이까지 가서 구해왔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카마이시(釜石) 수용소 소장님께 간청하여 곤부(다시마)를 얻어 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소장에는 제가 나무뿌리와 해초를 강제로 먹였다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들의 식단에는 수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소화를 잘 못 시켜서 저희가 오븐을 만들어서 빵을 구워줬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기뻐했었죠. 또한 ‘미쓰비시 광업’ 측과 협상하여 주기적으로 육류도 제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희 수용소 인근에 조선인에 의한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그 주변에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도축장과 협상하여 소와 말의 내장 그리고 육류를 얻어왔습니다. 포로들은 일본인이 섭취하지 않는 내장, 골(뇌) 요리와 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피를 미소 국물에 타서 먹었고, 골은 계란후라이처럼 조리하여 매우 만족스럽게 먹었습니다.   





3 평화 기념 공원(平和記念公園)

1988년에 T. 그린(Tony Glynn) 신부가 호주의 전 포로병과 함께 나오에쓰 시를 방문하여 (희생자) 명판을 시에 부탁하였다. 이 만남으로 인해 나오에쓰 시 측은 호주 카우라(Cowra) 시가 ‘카우라 사건(1944년 8월 5일에 일본군 포로가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여 231명의 포로가 사살되거나 자살한 사건)’의 일본과 호주 양측 피해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카우라 시에는 카우라 일본인 묘지가 1963년애 설치되었다. 이후 나오에쓰 시민들은 조에쓰일본호주협회(上越日豪協会)를 결성하여 모금 활동을 통해 1995년 10월 8일 평화기념공원을 개원하였으며, 일본과 호주 관계자들이 참여하였다.      


4 참고문헌(参考文献)

- 우에사카 후유코(上坂冬子) ‘조개가 된 남자 나오에쓰 포로수용소 사건(貝になった男 直江津捕虜収容所事件)’ 1986년, 분게이슌주샤(文芸春秋社) (분슌문고, 1989년)

- 소마 사토루(相馬暁) ‘야채학 입문(野菜学入門)’ 1993년, 산이치쇼보샤(三一書房社)

- Giles, Donald T. Captive of the Rising SUN: The POW Memoirs of Rear Admiral Donald T. Giles, Usn. Naval Institute Press, 1994. 

- Selden, Mark, and Alvin Y. So, editors. War and State Terrorism the United States, Japan, and the ASIA-PACIFIC in the Long Twentieth Century.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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