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콘텐츠는 존 조셉 코로넬(John Joseph S. Coronel)이 작성한 뤼슈렌(呂秀蓮, 뤼슈롄) 전 대만 부총통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자유주의(Liberalism)’의 원칙으로 독일 및 세계 각국에서 정치교육을 제공하는 단체인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Friedrich Naumann Foundation for Freedom)의 홈페이지에서 ‘중국 독재자들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 뤼슈렌(Annette Lu: The Thorn of a Thousand Tyrants)’ 제하로 게재됐습니다. ‘대만은 왜 중국에 맞서는가’ 홍보 차원에서 재단 측의 허락을 받아 미디어워치에 게재합니다. (번역 : 요시다 켄지)
(Annette Lu: The Thorn of a Thousand Tyrants)
뤼슈렌(呂秀蓮)은 대만 최초의 여성 부총통이자 이를 두 차례 연임한 정치인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물론 인상적인 정치 커리어지만, 그녀는 그 이상의 인물이다. 용기, 역량, 그리고 인격이야말로 그녀가 대만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이다. 하지만, 그런 지위를 얻기까지 건강 악화, 정치적 박해, 구금, 심지어 지속적인 처형 위협까지 있었으며, 성차별 등 개인적 희생도 또한 컸다.
사람들은 뤼 부총통을 단순히 정치인이 아닌, 여성주의자, 언론인, 변호사, 운동가, 학자, 또한 픽션 및 논픽션 저서를 다수 집필한 작가로서의 그녀의 견고한 지성을 칭송해왔다. 하지만, 거듭 언급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의 존재감을 내포하고 있다. 배려심은 물론, 엄청난 배짱 또한 지녔으며 그녀는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필자는 그녀를, 이를테면, 중세 지도자의 전사적 본능을 갖춘 르네상스적 여성이라 표현하고 싶다. 즉, 그녀는 곤경에 빠져 있는 무력한 처녀와도 거리가 멀지만, 화려한 갑옷의 흑기사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진보를 표명하는 민진당이 대만에서 집권하면서 대만 독립론이 불붙었다. 특히 맹렬하고 거침없는 뤼 부총통이 이런 신체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전망에 중국 공산당은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그녀를 “지구의 폐물,” “천년의 죄인”으로 낙인찍기도 했었다. 심지어 그녀가 속한 민진당 내에서도 그녀를 ‘헤픈 사람’ 또는 ‘요주의 인물’이라며 폄하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자주적 성향, 그리고 열정적이고 흔들림 없는 대만 독립에 대한 신념은, 대만 정치에 새로운 바람이 불던 2000년도 즈음까지도 정당 내부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현실정치의 세계는 집권 민진당이 야당 시절 보여준 견고한 대만 독립의 입장을, 적어도 당국의 주권과 정당의 핵심 이념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억누를 것을 요구했다. 달리 말해, 이제 민진당은, 이념을 공유하는 정당인들이 모인 ‘정당’이 아니라, 당파적 신념을 막론한 대만인 모두를 위한 ‘정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에 ‘아시아위크(Asiaweek)’(홍콩 시사주간지)는 2000년 4월 21일자 기사에서 “비(非)국민당원 최초로 대만의 총통이 된 천수이볜은 필연적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며, 중국과 최대한 타협적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비록 그래서 뤼 부총통과 천수이볜 총통 사이에 개인적인 앙금이 생기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적어도 양안관계에서는 천수이볜 총통과도 뚜렷한 견해차를 숨기지 않았다.
상황은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대만의 부총통이었고,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세워 그저 흐르는 정세를 관망할 정치인이 아니었다. 더불어 그녀는 단순히 첫 여성 부총통이 아닌, 첫 여성주의자 부총통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뒤에서 더욱 깊이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뤼슈렌의 파란만장하고 다면적인 삶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원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정치 커리어에서 정점을 찍은 인물이, 새로이 ‘헤픈 사람‘, 그리고 ‘요주의 인물‘로서 추가로 악명을 얻게 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에 대한 그런 일련의 주장들은 사실무근의 비난에 불과하다. 오히려 부총통은 평생을 일편단심으로 살아왔으며, 이러한 흐트러짐 없는 정신은 그녀의 유년시절에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의 시 ’정복되지 않는 자들(Invictus)‘과 같다. 이후 삶에서 엄청난 장애물에 직면하였음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영혼과 운명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었다.
1944년, 대만 북부 타오위안 시에서 태어난 뤼 부총통은 대만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산 증인이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을 당시에 태어난 그녀는,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고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전했을 적엔 아직 갓난아이였다.
뤼슈렌 일가는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두 번에 걸쳐 입양을 보내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큰 오빠의 완강한 설득으로 무마되었다. 비록 형편은 어려웠으나 두 남매의 성적은 학교에서 두드러졌다. 또한 이러한 유복하지 못했던 그녀의 유년기야말로 수많은 대만의 ‘정치 가문’ 출신의 여타 민주주의 아이콘들과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수성가한 정치 스타인 것이다.
아시아자유민주당(Council of Asian Liberals and Deomocrats) 여성회의에서 뤼슈렌 부총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45년 전에 대만에서 여성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입니다. 역사상 대만 여성들은 중국의 유교사상과 일본의 가부장주의의 이중적 부담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을 섬기고 내조하는 것만 배웠고, 이로 인해 여성은 하급의 성별로 추락했습니다.”
뤼 부총통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군정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녀는 대만의 단일체제 정당인 국민당 당원으로 정치에 입문했으나, 이후에 독재의 종식 및 민주개혁의 제도화를 외친 민진당의 전신인 ‘탕와이 운동(Tangwai movement)’에 합류했다.
그녀는 정치적 과반을 확보할 가망이 전혀 없었던 시절에 과감히 야당에 합류했던 것이다. 당시 대만의 집권 여당인 국민당은 ‘의원 지명제’를 실시했고, 선출된 의원을 제외하고 지명된 의원은 중국 본토의 비투표권 지역을 대표하는 것으로 가장했다. 이 제도는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국민당의 절대 권력을 보장했다. 이에 ‘탕와이 운동’과 민진당의 정당인들은 조직적으로 탄압을 당했고 심지어 일부는 암살까지 당해야 했다. 뤼 부총통은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박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국민당 독재가 한창이었던 1979년 말, 대만 남부의 가장 큰 도시에서 열린 인권의 날 행사에서 뤼 부총통은 20분간 국민당 일당체제를 비판하는 열정적인 연설에 나섰다. 당시 민주화 운동 지도부의 대다수는 이른바 ‘가오슝 사건(Kaosiung Incident, 또는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그녀 또한 구금을 면치 못하였고, 재판에서 내란선동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부총통의 법률 고문 중 한명이었던 젊은 인권변호사(천수이볜)가 훗날 대만의 역사적인 2000년도 선거에서 부총통의 러닝메이트로도 활약하게 된다. 그녀는 5년 반 동안 모범수 생활을 이어가다, 미국을 중심으로 했던 국제적 압박에 의해 결국 석방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뤼 부총통은 1967년에 대만국립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고, 그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1971) 및 하버드 대학교(1978)에서 각각 법학석사 학위를 받으며 유능한 법률 전문가로 성장했었다. 그녀가 만약 미국이나 제3의 국가에서 활동을 이어갔다면, 그녀의 화려한 이력으로 법조계, 학계 또는 대기업에서 큰 돈을 벌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대만의 집권당 (국민당)에 다시 합류해 권위주의 정권 내에서 무수한 권력과 특혜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미국 등에서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거나, 적어도 국민당으로 복귀했었다면 그녀가 겪었던 여러 탄압들은 다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뤼 부총통은 투쟁을 회피하고 편한 길을 택할 성격이 아니었다. 미국의 유서 깊은 매사추세츠 주의 명문 대학가에서 자유를 누비며 세계 각국의 지성인과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담론에 참여하던 그녀는 불행하게도 몇 년 후에 대만 감옥에서 6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됐다.
고난의 길은 첩첩산중이었고, 투옥 중 두 번의 비극을 겪었다. 복역 중 그녀의 모친이 사망했고, 지속적인 사형 위협으로 인해 부총통의 심신 또한 쇠약해졌으며, 결국 갑상선암을 진단받게 되었다. 수술을 받고도 그녀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고, 이는 오랜 기간 그녀를 묵살하려 했던 중국(중공, 대만)의 폭군들에게도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뤼 부총통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비록 그때의 수술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리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감옥에서 그녀는 소설 ‘세 여인(The Three Women)’을 집필했다. 세면대가 책상을 대신했고 두루마리 휴지가 종이의 역할을 했다. ‘타이페이타임즈(Taipei Times)’는 특집기사로 이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저서는 여성들의 대조적인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한 여성은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비쳐졌지만, 실은 가늠할 수 없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다른 인물은 미혼임에도 매우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대학 교사이다. 세 번째로 소개된 여성은 사랑도 미음도 공유한 죽은 남편과의 좋았던 날들을 회상하는 과부이다. 해당 소설은, 압도적인 성황을 거둔 방송프로 ‘Meter Garden’의 제작진에 의해 방송으로 제작될 예정이다.”(Ko,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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