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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타계한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정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신 전 총리는 12.12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인사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로도 활약했다.

제1공화국 이래 전문 경제관료로서 누구보다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관직인생은 해방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난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 한국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일본내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서 3년을 보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임용된 뒤 고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1959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 2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재계에 몸을 담았던 그가 다시 관계에 복귀한 것은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1973년 9대 총선이 계기가 됐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됐고,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국무총리로 임명된 그의 행적에 대해선 당시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사를 표현해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고, 이에 따라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거나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980년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모인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전두환(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과 신 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지난 1995년 검찰의 12.12 수사과정에서는 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직 겸직을 반대하는 등 신군부의 무리한 요구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의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총리직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그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지난 1986년엔 삼성물산 회장으로 임명돼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재임시절인 지난 1988년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하기도 했다.

지난 1999년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추진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같은 해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기업윤리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등 말년까지 쉬지않고 활동했다.

유족으론 외아들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이 있다.


(서울=연합뉴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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