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기타


배너

작가 황순원의 말 속에 눈을 찌르는 대목이 나온다. 그의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
는 6·25 전란 속을 뒹굴던 당시 한국 젊은이들의 얘기다. 작품에는 여러 주인공들이
군복 차림으로 등장한다. 그 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산속의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을 내
려다 보다 무심코 말을 내뱉는다.
"어이,추워!"

이 말 한마디로 주인공은 소설속에서 계속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주인공
이 벼랑위에서 느낀 공포를 작가는 바로 그 시대에 대한 공포로 본 성싶다. 그리고 이
공포를 "어이,추워!"라는 한 마디로 시화한 것이다. 군인을 시인으로 바꿔 놓은 것
이다.

환난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오히려 그 환난과 직접 부딪쳐 극복한 것이다. 그
건 마치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나는 것과 같은 논리다.당시 전란의 슬픔을 삭이려
던 작가의 사랑이 이 한마디 말 속에 담겨 있다.

말은 생명체다.뛰어난 말일수록 말하는 사람의 영성이 드러난다. 세상을 내다보는 통
찰력과 사랑이 묻어 나온다.
사막의 아름다움을 "그곳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으로 본 프랑스 작가 생
텍쥐페리의 말은 한갓 말로 그치지 않는다. 삶 그 자체다.

그가 달빛 쏟아지는 그곳 사막을 「어린 왕자」를 시켜 이야기하고,또 막바지에는 작
가 스스로 「야간 비행」을 감행하다 사막속에서 실종한 것도 바로 이 샘을 찾기 위해
서였다.

살아 있는 말은 흔한 금언이나 좌우명과 다르다. 말하는 자의 신분이나 지위와도 무관
하다. 또 따로 암기하거나 기록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고 되살아나는 긴 생명력을 지
닌 점에서 다르다.

워싱턴에서 일하던 시절, 그곳 저명신문 <워싱턴 포스트>에서 읽었던 칼럼 한 대목이

지금껏 기억에 새롭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그 신문의 논객 에드윈 요더의 자문 자답이 그것이다.

그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안을 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금속 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언제적 사람인지를 아는 건 중요하다. 그러
나 더 중요한 건 그의 금속활자 발명이 종교개혁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를 규명하
는 일이다.

금속활자가 없었던들 마르틴 루터의 개혁 성서가 대량으로 찍혀 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루터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 종교개혁 그 자체가 자칫 무위로 그칠 뻔했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폭약 제조술이 언제 어디서 발달했는지도 지식거리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중
국으로부터 유럽에 수입된 폭약이 유럽 봉건제도를 깨부수고 드디어 절대 왕조를 일
으키다 마침내 근대국가의 모체인 민족국가의 설립에 기여했음을 이해하는 일이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 때 역사가 시작되고 역사로 기능한다는 주장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오피니언난에 실린 이 말을 지금까지 기억함은 언제쯤 우리도 같은
자문을 할 때가 오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우리한테는 어째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나 체코의 하벨 같은, 국민들로부터 언제 어디
서나 사랑받는 통찰력의 지도자가 나지 않는가.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역사는 이미 그 답을 주었건만 우리가 불민해 깨치지 못하는 건 아
닐까.

이제 8개월 후면 한국은 다시 새 대통령을 뽑게 된다. 후보 주자들의 면면을 보면 여
권이건 야권이건, 내 솔직한 심정은, 아직은 그 인물이 그 인물, 남이 강남 간다니 나
도 가는 수준이다.

후보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대통령감은 나뿐」이라는 자기 최면에서 어서
해방되라는 것이다. 대신 통찰력과 사랑이 담긴 말의 연금사로 어서 변신하라는 권고다.
말이 곧 정치는 아니나, 정치는 곧 말이다.

국민은 이 혼(魂)이 든 말에 약해지게 마련이다.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한마디로 감동의 정치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감동이야말로 이 척박한 한국의
정치 사막을 적실 유일한 샘이다.그것이 역사다.


/빅뉴스포럼 대표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