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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 이모님도 같은 집, 같은 빈소에서 세상을 떴다.

나로서는 막말로 줄초상을 치른 셈이다.
이모님은 그림에 능했고, 일제 때 사범학교를 나와 도쿄에 유학할 정도로 인텔리 여성이었다.
귀국 후에는 언니(내 어머니)가 시집간 금산 부근의 시골 갑부 집에 시집가, 지주 집 종가 며느리가 됐다.

6. 25가 나던 해 여름의 일이다.
수 천마지기 논밭을 둘러보던 이모부 앞에 소작인 김모가 나타났다.
이모부는 소작인 김모를 만나자마자 욕설과 함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간 밤 논길의 물을 대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른 집으로 물꼬를 터 준 것이다.
논두렁에 쳐 박힌 김모는 그 길로 도망쳤고, 얼마있다 6.25가 터졌다.

6,25가 나자 이모부는 그 소작인의 보복이 무서워 집을 떠나 동가식서가숙했다.
도망친 김모가 동네 동맹위원이 돼 빨간 완장차고 나타났기 때문 이다.

9.28 수복으로 석 달만에 금산 읍내에 있는 우리 집에 불쑥 들른 이모부는
잠자리에 들기 전, 나도 그 얘길 똑똑히 들었지만, "내일은 집에 가서 다리좀 쭉 펴고
자야겠다"고 했다.

다음 날 밤 새벽, 그는 소원대로 자기 집 담장 옆에서 다리를 쭉 펴고 눕는 신세로 바뀌어 있었다.
이모부의 귀가를 정탐해 낸 김모와 그의 떼거리들이 야습을 감행, 자다 말고 도망치는 이모부의 등을 향해 총을 갈긴 것이다. 이모부는 결국 그렇게 횡사했다.

내가 사체를 보고 놀란 건 그 때가 처음이었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주위에 식구가 없으면 혼자서 잠을 못 잤다.
이모부네 집엔 어머어마하게 큰 가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사체를 볼 때마다 이모부의 주검을 지켜보던 그 날 새벽의 가죽나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모는 그 후 아내 있는 장교의 여인이 됐고, 자식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한국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떠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이모가 되뇌던 통곡을 지금껏 기억한다.

“언니는 좋겠네… 상 치뤄 줄 자식들이라도 있지 않소”
오열하던 이모는 언니의 주검을 지키다 그 자리에서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새삼 50 여년 전 악몽을 떠올림은 나에게 예의 가죽나무 환각이 아직껏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체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정작 무서운 건 인간이 인간한테 품는 증오, 소작인 김모가 이모부한테 품었던 그 증오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직시해 본다. 증오란 무엇인가.
650만의 유대인을 죽인 아돌프 히틀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14세 때 아버지를 잃고 생모 밑에서 크는데, 생모 클라라는 아버지보다 22세나 어린데다,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다.

그녀가 사촌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오빠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이었다.
히틀러는 이런 범죄 가운데 잉태된 아이였다.
히틀러와 어린 동생 그리고 앞서 두 명의 전처 소생들까지 떠 안은 클라라는 생계를 위해 유대인 남자들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영국인 <알랜 벌록>이 쓴 책 `히틀러와 스탈린`은 당시 히틀러가 태어난 비엔나라는 도시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히틀러 출생 당시 비엔나에 불과 6천 여명밖에 살지 않던 유대인의 숫자(도시의 2%)가
몇십 년 사이에 17만5여명(8.6%)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빚게 된다.
또 이들 유대인이 차지했던 도시 내의 신분과 목소리는 이 수치보다 훨씬 커, 도시 내의 가장 영향력 있고 유망 직종이던 변호사, 정치인, 의사, 언론인, 은행가, 예술가의 직업을 거의 독식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히틀러가 나중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관해 언급한 “수천 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인 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 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는 대목은 그 당시 유행하던 반(反) 유대정서와 툭하면 생모 클라라을 자빠트리던 유대인 사내들에 대한 혐오감의 합작으로 볼 수 있다.
한때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였던 소년 히틀러를 증오의 악령이 꿀꺽 삼켜버린 것이다.

수도원의 수사 출신 스탈린이 악령으로 바뀐 것도 예의 증오 탓이다.
그림에 능했던 나의 이모와 그녀의 식구 모두가 소작인 김모의 증오에 풍비박산됐듯이.
증오는 그토록 무섭다.

한 때 파리에서 히트 친 바 있는 역사학자 <클로드 리브>가 쓴 ‘나폴레옹의 범죄’ (Le crime de Napoleon)라는 책은 노예봉기를 진압키 위해 흑인들을 몰살한 나폴레옹의 만행과 그 배경이 된 증오를 상술하고 있다.

더 가관은 1940년 6월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가 앵바리드 광장에서 ‘하일 나폴레옹!’ (나폴레옹 만세!)라 외치며 경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악귀끼리는 통하는 것이다.

증오는 대(代)를 잇는다. 또 그 시대를 반영한다.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해서 계층간, 남북간, 세대간, 빈부간, 지역간, 보혁간에는 물론
같은 직장 안에서마저 증오가 기승을 떠는 지금의 서울을 살며,
나는 지금도 일곱 살 소년시절에 본 이모네 집 가죽나무를 잊지 못한다.
그토록 시꺼멓고 떨리던 그 날 새벽의 가죽나무를.


/빅뉴스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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