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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와 진중권, 지식인의 세대교체 시대

공부하지 않는 지식인은 자리에서 교체되어야


7년 전 예비역을 적으로 몰아붙인 진중권

‘디워’를 놓고, 진중권과 네티즌과의 토론이 이루어졌다. 순간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0년도, 군가산점 논란이 한창일 당시,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에서 복학생 예비역을 공격하는 글을 올렸다. 당연히 네티즌 예비역들의 반박전이 시작되었고, 인터넷은 난장판이 되었다.

진중권은 당시 부산대 여대생들의 편에서 전체 복학생과 예비역을 공격했다. ‘다수의 폭력’, ‘집단 히스테리’ 등등의 용어로 자신의 대 예비역 전쟁의 명분을 갖추었다. 필자는 이와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스스로 진보와 좌파라 자임하는 지식인들이 평범한 예비역 복학생 전체를 나찌 수준으로 몰아버리면서, 어떻게 사회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왜 군생활에 대하여 박탈감을 갖고 있고,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해 답을 내주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지식인층이 이들의 박탈감과 분노에 무심했기 때문에, 이들이 여대생 웹진으로 공격해들어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진중권이라는 지식인이 이들 전체를 나찌 집단 취급했으니, 일이 더 커진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디워’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더욱 더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당시 부산대에서는 여성주의자들과 복학생 간의 난상토론 자리를 마련했고, 진중권과 필자 모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중권은 여러 지인을 통해 절대 필자가 참석해서는 안 된다며 사실 상의 압력을 넣었다. 복학생과 예비역의 폭력성을 주제로 해야하는데 필자가 참석하면, 논점이 분산된다는 이유였다. 진중권의 의사를 전달받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필자에게 참석하지 않을 것을 권하는 통에, 필자는 토론 참석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토론회는 결국 진중권 혼자서 평범한 복학생들을 두들겨 부수는 사육제의 장으로 전락했다.

이번 ‘디워’ 논란에서도, 필자는 진중권을 정면에서 비판했다. 그가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다양한 의견을 내는 네티즌 다수와 토론하기 보다는, 가장 집약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게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예비역 사건 때와 똑같이 의도적으로 같은 지식인이나 평론가와의 토론은 피한다. 다수의 폭력에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이미지 메이킹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럴까?

사회를 구성하고 제어하는 건 권력이다. 특히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이 만나는 지점이 가장 위험하다. 지식인들은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수행하는 지식인은 좀처럼 없다. 진짜 권력과 야합을 하다보니, 권력도 아닌 다수의 네티즌들과 싸우는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 진중권이 이를 드러내놓고 한다 뿐이지, 사실 진중권 뿐 아니라 상당수의 지식인과 언론인이 진중권의 수법을 쓰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과연 해결되는 문제가 하나라도 있냐는 것이다. 문제 해결도 못하면서 왜 글을 쓰고 토론을 할까? 왜 그들은 지식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가?

이효리 신드롬 비판에 대한 반성

2003년에는 이효리 신드롬 사건이 있었다. 전 스포츠신문에 “이효리 고등학교 때 연애했다” “이효리 허리 나이 17세” 등등 이효리와 관련된 온갖 신변잡담이 매일 같이 실렸다. 당시 이효리는 ‘10minutes'으로 이효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효리 신드롬에는 당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던 스포치신문사들의 마지막 승부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포츠신문사들은 90년대 후반 전성기를 끝으로, 포털의 영향력 확대에 따라 하향세를 거듭하고 있었다. 가판의 판매가 떨어지니, 이효리와 같은 신드롬이 필요했고, 때마침 이효리의 활동에 맞춰, 온갖 기사를 1면에 장식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효리 신드롬이 스포츠신문을 끝장내고야 말았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여, 이효리 신드롬 자체를 집중 비판했다. 주로 이효리 신드롬을 다루는 언론을 비판하면서, 신드롬에도 불구하고 13만장에 그친 음반판매의 절대부족 등, 이효리의 음악적 실력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결과적으로 이효리 신드롬은 섹시가수를 양산하며 음반의 질적 하락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조심하려 그래도, 이효리 개인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지면과 방송을 통해 이효리를 비판하게 되었고, 이효리의 팬들은 발끈했다. 필자의 사이트에 당시 이효리의 팬 수천여명이 공격해왔다. 물론 그에 인신공격성 악플도 수두룩했다.

그럼 이에 대해서 필자는 이효리팬들의 광기, 나찌즘 부활 등이라 딱지를 붙이며 그들과 싸웠어야 했을까?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더 이효리 개인이 아닌 구조저인 문제로 접근해서, 이효리의 팬층까지도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의 담론을 제기했어야 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구조적인 문제란, 스포츠신문 등 언론의 구조, 방송의 구조, 음반시장의 구조 등 미디어와 대중문화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는 이에 대한 고민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스타 에이전시법이라는 제도를 입법화하고 있다. 이효리팬들과 감정적으로 싸워서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전문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서 대안을 찾은 것이다.

포털 권력시대, 지식인 세대교체 절실

2005년, 포털의 권력과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 때, 단 한 명의 지식인이나 학자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 이미 포털 권력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이었다.

2005년 5월 평범한 민간인 한 명이 포털의 절대 다수의 네티즌에게 사생활 문제로 집단 공격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다수의 네티즌과 틈만 나면 싸움을 벌였던 진중권의 태도가 궁금했다. 놀랍게도 진중권은 이 당시 절대 다수의 네티즌과 싸우지 않았다. 그는 신문칼럼에 “네티즌이 인터넷 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도 좋지만 과도한 인민재판은 자제하는 게 좋겠다”라는 수준의 의견표명만 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진중권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힘없는 네티즌을 힘없는 다수의 네티즌이 다구리하는 판에 끼어봐야 얻을 게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진중권이 참전하는 전쟁은 소수의 권력자들에 대해 다수의 네티즌이 분노하여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진중권은 늘 소수의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니 둘 다 권력이 아닌 네티즌들판에 진중권이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필자는 당시 힘없는 네티즌이 아닌, 이러한 싸움을 종용하며 돈을 버는 포털의 권력에 주목했다. 그래서 포털 피해자모임을 결성하고 포털과 법적 싸움에 들어갔다. 이 싸움에는 진중권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들도 포털권력에 거스르지 않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포털 문제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현상이다. 미국보다 일본보다도 더 앞선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제도와 법으로 해결하려면,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참고할 것이 없다. 오직 스스로 한국의 인터넷을 고찰하며,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법과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겐 이러한 능력이 없다. 필자가 속해 있는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에서는 포털을 제어할 검색서비스사업자법과 신문법 개정안을 오랜 연구 끝에 내놓았다. 포털에 관한 법을 발의한 것은 전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식계 일부에서는 이 법을 후진적인 법이라 폄하한다. 근거는 미국과 일본에 없는 법이기 때문이란다.

포털 문제에 관해서는 네티즌들이 학자나 지식인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하루종일 포털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이 보기에 뉴미디어 전문 학자나 포털 전문가는 죄다 사기꾼이다. 지식인들이 구조적 혹은 제도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인터넷상에서 당연히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그런 현상이 벌어지면 이런 지식인들은 “지식인이 대중에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운운하며 투덜거린다.

그렇지 않다. 단지 공부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상상력과 창의력이 부족한 지식인이 무시당하는 시대일 뿐이다. 진중권과 같이 힘없는 네티즌들만 모욕하며, 진짜 거대한 권력과는 야합하는 여용지식인들이 쓰러지는 시대일 뿐이다.

필자는 진중권 등에 대해 구시대의 마지막 열차를 타는 낡은 지식인들이라 명했다. 여러 가지 정황 상, 충분히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들은 오래 전 유학시절 배운 선진국의 화석과 같은 이론 하나로 한국에 들어와서 밥을 벌어먹고 있다. 한국적 상황을 창의적으로 연구할 의지도 없고, 그럴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다. 서로 패거리지어 끼리끼리 밀어주며, 권력에 의존해서, 자리와 감투를 쓰는 데에만 급급하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이들의 이러한 생존방식은 조만간 통하지 않을 전망이다. 왜냐하면 뉴미디어 분야, 대중문화 분야는 대한민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대한민국의 뉴미디어와 대중문화를 연구하고 공부하여,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전체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패러다임도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그들이 이제부터 갑자기 할 수 있을까? 디워에 대해서 “프랑스나 독일도 하지 않는 블록버스터를 왜 한국이 하느냐”고 다그치는 수준의 지식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정치권에 이어, 지식계에서도 조만간 거대한 세대교체의 흐름이 형성될 전망이다. 그 세대교체란 물리적인 나이가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이다. 나이가 젊더라도 고질적인 낡은 지식계의 악습에 빌붙고 있다면 교체를 당할 것이고, 연배가 있더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부지런히 분석하고 연구하고 대안을 찾는다면, 존경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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