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법대 4학년 이혜리씨에 앞서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4학년생인 진승모씨가 4월 8일 자 조선일보 칼럼 ‘20대들의 반란 더 프로답게 하라’는 필자의 칼럼에 대한 반박글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다. 진승모씨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장 출신의 학생 사회 운동가로서 이미 다른 글들도 기고한 바 있는 학생 논객이다. 그의 반론 중 대학생들의 공부와 독서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필자의 생각을 다시 피력해볼까 한다. 바로 대학가의 ‘공부의 신’ 문제이다. 진승모씨는 4월 9일자 오마이뉴스에 ‘변희재씨, 대학생 독서량이 낮은 이유가 뭘까요?’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형편없는 독서량'과 그로인한 실력부족이 20대 문제의 원인인가? 20대이자 대학생인 내가 접하는 주변 친구들은 늘 책을 끼고 산다. 다만 고시생들은 고시준비를 위한 책을, 취업 준비생들은 미시경제학 책과 문제풀이집을, 저학년 학생들은 전공 서적을 끼고 살 뿐이다. 그러나 이 많은 책들을 읽고 공부함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스스로가 이 책들을 진짜 '책'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폭넓은 역사적 경험을 습득할 수 있는 책이 아닌, 더 나은 경제적 생활조건을 보장받기 위해 무조건 달달 외우고, 시험문제에 이미 정해진 답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야하는 '죽은 지식'만이 가득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우리는 이러한 '죽은 지식'이 가득한 책들만을 보고 있는가. 쉽게 말해서 먹고 살기 힘든 세상 때문이다. 변씨가 동의했던 최악의 청년실업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나은 학점, 더 나은 영어점수, 이른바 우월한 스펙을 쌓는 것에 모든 것을 투여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우리를 더욱 무조건적인 경쟁에 몰입하게 만들며, 이 경쟁이야말로 인문학적 소양을 죽이고, 세상을 올곧게 바라볼 지혜를 죽이고, 20대만의 젊은 창발성을 죽이고 있다. '형편없는 독서량'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현상이며 결과이다. 변희재씨가 독서를 많이 하라고 훈계하기 전에 왜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형편없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권한다“
초등학생의 절반 수준으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의 대학생들
우선 사실관계부터 정확히 정리하자. 10년 전 통계이기는 하나 한국 대학교육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전공 과목 독서량이 한국은 47.7%가 3권 미만, 미국은 53.3%가 8권 이상이었다. 같은 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공부시간이 하루 7시간33분인 데 비해 대학생은 3시간14분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만물상 칼럼을 통해 “하버드 스퀘어에는 술집이 3개뿐이지만 서울대 주변 신림동 봉천동에는 술집이 300개가 넘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진승모씨가 주장한 대로 저학년들이 전공서적을 끼고 산다는 것은 최소한 하버드생들과 비교했을 때 보편적인 사실은 아닌 것이다.
진승모씨가 고시책과 함께 묶어서 ‘죽은 지식’만 가득한 책이라 폄하한 전공서적에 대해서도 따져보자. 전공강좌와 교양강좌를 합쳐서 대학생들이 해당 과목을 수강하기 위한 서적이 정말 죽은 지식이 가득한 책이 맞는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이근 교수는 교양강좌인 경제학원론 강의에서 ‘경제원론’, ‘통일경제학’,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등 4권을 교재로 활용했다. 나 역시 대학시절 이 강좌를 들으며 4권의 교재를 바탕으로 경제학의 기초를 공부했으며, 이 교재에서 소개된 다른 책들,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부크홀츠의 ‘유쾌한 경제학’을 추가로 읽었으며, 이런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 한창 유행했던 ‘세계화의 덫’, ‘노동의 종말’,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경제운영 원리였던 ‘대중참여경제론’ 등등을 읽으며 현실 경제와 이론을 비교하면서 기초 실력을 확장시켰다. 이런 것들이 과연 죽은 지식이 가득한 공부란 말인가?
기본 교과서에 참고도서 10권씩 읽었던 황지영씨의 공부 비결
올 2월 이화여대 컴퓨터공학과 황지영씨는 8학기 내내 전 과목 A+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황지영씨가 밝힌 대학공부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자료 하나만 읽으면 모르니까 교과서에서 찾아보고 참고자료도 찾아보고 인터넷도 뒤져 본다. 이처럼 지식의 네트워킹을 통해 기본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정리한다. 수업시간에 주는 텍스트와 강의 자료를 비교해가면서 읽고 서로 다른 저자의 글을 통해 기본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황지영씨는 바로 이렇게 다양한 텍스트를 소화하며 비교 분석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한 것이고 그 스스로도 “기본 교과서는 반드시 산다. 참고 도서도 적어도 10권씩은 샀다. 못사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고 밝혔다.
지금 대학에서 강의를 하나 듣기 위해 교재와 연관된 참고서적 10권 이상을 읽는 대학생이 몇 명이나 있는가? 10권의 각기 다른 텍스트를 소화하면서 비교 분석하여 얻은 지식이 죽은 지식이라는 근거는 대체 어디서 도출된 것인가?
진승모씨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김수행 교수의 퇴임을 아쉬워했다. 민주노동당 청년 활동가인 진승모씨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초는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공부하는데, 민주노동당에서 내려준 강령이나 들고 있으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필수적으로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사를 먼저 공부해야 한다. 또한 그 당시의 유럽인들의 의식과 행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근대 문학을 읽어야 한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유럽의 17세기 과학혁명, 16세기 문화혁명, 15세기 르네상스 혁명 관련 책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지 못한 19세기 미국의 경제사도 책도 공부해야 한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의 교지 학생 기자들이 찾아와 필자에게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을 공부한 학생과 회계를 공부한 학생 중 누구를 입사시킬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내 기준으로의 마르크스 공부란 최소한 16세기 이후의 유럽과 미국을 공부하는 과정이다. 근대 유럽과 미국사를 관통하고 있는 학생과, 학원에서 다 배울 수 있고, 실제로 회계부서가 아니라면 기업활동에 별 도움도 안 되는 회계원리 공부한 사람 중 누구를 뽑느냐는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20대 대학생들은 자꾸 대학이 기업화되어 공부를 할 수 없다 떼를 쓰지만, 내가 위에서 열거한 유럽의 근대 역사와 문학, 경제원론, 미국사 등은 종합대학이라면 모두 강좌가 개설되어있다. 진승모씨가 진정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강좌에 수강신청하여 공부의 신이 되면 될 것 아닌가?
민주노동당 활동도 훌륭한 공부 방법이다
사회참여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황지영씨는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을 사회봉사 강좌로 뽑았다. 진승모씨는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제가 현실에 적합한 제도인지,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중대선거구제의 장단점, 선거구제와 밀접한 관련있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대학의 정치학과 강좌는 널려있다. 진승모씨는 그렇게 정치학을 공부한다면 현실 체험을 갖고 있으므로 훨씬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반대로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민주노동당을 위해 활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황지영씨는 학기 중에는 일체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액의 등록금 시대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는 학생들도 많다. 나 역시 항상 아르바이트를 했고, 3학년 이후에는 아예 창업을 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학점이나 독서량으로만 따지면 억울할 수 있겠지만 아르바이트나 직장생활은 또 다른 공부이다. 학점 1점 정도 포기해도, 기성 사회와 직접 몸으로 부딪혀 얻는 지식이야말로 산 지식이다. 그 체험을 이론화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찾아 읽어나가면 빈틈없는 탄탄한 지식체계를 쌓을 수 있다. 누구나 황지영씨처럼 4.3 만점을 받을 수야 없지만 학점이 1점 정도 떨어져도 황지영씨와는 다르게 더 깊고 넓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있다. 그 방법을 찾는 것도 또 다른 공부이다.
나는 20대들에게 바로 이렇게 황지영씨와 다른 새로운 공부의 신의 길을 찾으라 권하고 싶다. 일찌감치 정당 활동을 하며 현실 정치와 사회개혁을 현장에서 체험했을 진승모씨야말로 공부의 신이 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점도 알려둔다. 진승모씨가 나에게 추천했던 외국의 석학들도 대부분 학창시절부터 현장과 이론을 함께 공부했음은 물론이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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