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7교시가 되면 학교 건물 3층에 있는 상담실로 올라갑니다.
예쁘게 꾸며진 wee클래스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내쉬고는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 때마다 밝게 웃어 주시는 상담센터 선생님. “일 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는 이야기로 선생님과 나의 비밀스러운 한 시간이 시작됩니다.
한 달에 4번 있는 우리 둘만의 시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응어리 맺힌 이야기를 풀어내다보면 서슬이 퍼런 친구들의 눈빛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학교 시험과 성적의 부담감도, 어쩌면 그 이상의 모든 괴로움들이 구름 위 푸른 하늘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일주일동안 선생님이 만난 아이들의 이름이 언뜻 언뜻 서류들 사이로 보이면, 문득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친구가 되어 줄 순 없을까, 하고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마치 같은 병실에 마주 보고 누워 있는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요. 그래요. 사실 나는요, 지금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외관상으로 상해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꽤 오랜 시간동안 억지로 혼자만의 시간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 무언의 폭력 속에서,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올 능력이 낮아졌고 또한 무언가를 시작해서 계속 밀고 나갈 자신감 또한 내 속에서 무너져 갔습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예전만큼 당당한 모습은 아니지만,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교실 한 구석에 방치되거나 어두운 곳에 혼자 내몰린 아이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다른 이에게 무시 받지 않고 부정 받지 않고 스스로 “나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끔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하고 시작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해보고 울컥해서 알게 모르게 눈물을 재빨리 가렸던 것이 아마 한창 고된 일을 당했던 때였습니다.
조용한 성격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무리의 뒤쪽에 서 있던 아이를, 리더가 무시하기 시작하자 그 리더를 막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눈을 마주쳤을 때 황급히 얼굴을 돌려야 했었고, 수업시간에도 눈치를 보느라 활발하게 발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에나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어울려 복도를 걸어가는 아이들의 뒤를 보면서 저 뒷자리에 아직도 내가 서 있는 상상을 하면 금방 우울해지고 급기야 자신감을 잃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서로 오해와 불신이 쌓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때,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주위의 많은 관심과 도움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담임선생님께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가장 얘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하면서 눈물을 닦아주시던 분은 상담선생님이셨습니다.
거의 6개월 가까이 끊임없이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나와 얘기한 상대는 선생님도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는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태를 죄다 외부에 있는 요소에 원인으로 밀어 놓고 내 자신을 바로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두 사람에게 생긴다면 물론 부등호의 방향은 어느 한쪽에 쏠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남은 한 쪽의 잘못이 O이 되는 건 아닌 것처럼요.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 중 나에게 있을 원인은 무엇일지, 많은 생각과 여러 사람과의 이야기, 또는 나 자신과의 이야기를 통해, 우느라 바로 보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순간마다 엄연한 내 삶의 주인으로서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가야만 했는데, 소심한 성격과 그저 그 순간을 잊고 묻어버리면 결국 아무 문제없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채 눈 앞으로 다가온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고 회피해 버렸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가진 단점을 고쳐나가려 적극적으로 학교 활동에 앞서고, 자신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쓰고 생각해나가는 일상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갈등을 빚던 아이에게 화해의 뜻을 조금이나마 비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무시 받고 있고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나에게 일어났던 이 모든 일을 되돌아 볼 때면, 어쩌면 이 왕따라는 게 아픔의 시간을 지나서 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늘을 보면서 다시 일어나 사람들 곁으로 당당하게 뛰어갈 수 있었던 건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나를 스스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상담을 마치고 나와서 본 창가의 하늘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 비처럼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하늘이 그를 위로하며 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제 웅크린 그들에게 다가가서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과 방법으로 그들에게 이제껏 고통을 겪다 새로워진 변화된 나의 모습을 들려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눈물과 고통으로 얻어 낸 자기 자신의 소중함과 다른 이의 소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면, 절대 그 눈물과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겠죠.
그리고 변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할 거예요. “아! 나는 아름답다.” 나는 그들이 헛된 선택보다는 값진 선택을 하기를, 비가 내리는 하늘보다는 비 개인 맑은 하늘을 보면 좋겠어요.
윤소현 (해남송지종합고등학교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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