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때 아니게 사필귀정이란 사자성어가 유행을 탔다. 검찰을 호령하던 최고수장이 언론사 상대로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사필귀정을 믿는다”고 하더니 MBC 노조가 바통이라도 이어받은 듯 이 말을 끄집어냈다. 남부지검 앞까지 쫓아가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사필귀정’ 첫 단추를 꿰길 바란다”며 김재철 전 사장을 검찰이 기소하라고 외치던 노조의 어조엔 사뭇 비장함까지 묻어나온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리석고 오만하다. 그럴 리도 없지만, 검찰이 김 전 사장을 기소한다고 MBC가 소위 ‘최문순의 시대’로 되돌아갈리 없고, 더욱이 노조가 김 전 사장에게 했던 온갖 패악질이 정당화될 수도 없다. 사필귀정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뜯어 맞추는 게 아니라 사리(事理)대로 흐르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빠른 길을 놔두고 숨는 길을 택한 전 검찰총장과 검찰에 대고 윽박지르는 노조의 처신은 궁색해보이기만 할 뿐 사필귀정과는 거리가 멀다.
김재철 전 사장은 작년 파업 중 노조와 부딪히면서 불가피하게 고소한 사건 중 몇 건을 취하했다고 한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이미 자리에서 물러난 마당에 후배들에게 끝까지 날을 세우는 것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추문과 불법 의혹을 제기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았던, 후배이기보다는 원수보다 못한 이들이었지만, 모든 걸 떠나 선배의 입장에서 용서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퇴 전까지 내내 온갖 중상모략을 당했는데도 소를 취하했다면, 그런 마음이 없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를 두고 미디어오늘은 모종의 정치적 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실눈을 뜨며 의심하지만 언론노조 기관지다운 해석이자 실소가 나오는 코미디 같은 얘기다. 댓글 3개 때문에 검찰이 전 국정원장을 선거개입으로 기소하는 마당에 현직도 아닌 힘없는 전 방송사 사장과 거래를 할 이유가 뭐가 있나.
필자는 MBC 노조는 결코 아량을 베풀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김 전 사장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공영방송 사장으로서 또 수천 명의 식구들을 거느린 방송사 CEO의 자리에 있을 때는 원칙을 고수한 반면 사인으로 돌아간 입장에선 현명함과 유연성을 발휘하려는 태도로 보기 때문이다. MBC 사장이란 공적 자리는 노조의 패악질에 그냥 당하고 있어선 안 되는 자리다. 그것은 단지 사장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영방송사가 언론노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달린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고, 국민의 이익과도 직결된 문제다. 공적 임무를 마치고 사인의 입장이 된 김 전 사장이 소를 취하한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과 동시에 어떻게든 꼬인 일의 매듭을 풀어보려는 진정성 있는 의지를 보여준다.
사필귀정이란 바로 김 전 사장의 이런 태도에서 나올 수 있는 세상사 이치이지 진실을 회피하고 증오를 키우는 것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파업 이후 끝없는 밑바닥까지 추락할 것만 같았던 MBC가 인기 프로그램에 힘입어 다시 1위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도, 1위를 한 것도, 추석 연휴에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재확인한 것도 사필귀정이다. 김 전 사장은 재직 시 노조의 갖은 훼방에도 MBC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꿋꿋하게 길을 걸었고, 그 결과물들이 현재 김종국 사장 체제에서 결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파업의 그 난장판 한 가운데서 상처투성이가 됐던 김 전 사장이 그래도 자기 할 일을 잊지 않았기에 보게 된 ‘사필귀정’이다.
순리대로 산 김재철과 거스른 MBC노조의 ‘사필귀정’, 검찰은 순리를 따를 것이다.
MBC노조는 사필귀정을 떠들면서도 이 고사성어의 참 의미를 모르고 있다. 자신들이 미운 놈을 벌줘야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유치한 아집이 그 뜻인 줄 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못 견뎌하고 그 지적을 한 상대를 지구상에서 사라져야할 벌레처럼 여긴다.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탈·위법, 편법 행위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나 사소한 실수쯤으로 여긴다. 그러고는 상대의 티끌 같은 문제는 태산처럼 여기고 부풀렸다. 여기서 심각한 왜곡이 시작됐고 모든 일이 잘못돼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년 MBC 노조가 김재철 전 사장을 쫓아내기 위해 시작한 파업과 그 파업 과정에서 행한 온갖 악독한 짓들은 고스란히 쌓였고, 노조 스스로는 하나도 풀지 못하고 있다. 자기반성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김재철 전 사장은 역대 그 어느 MBC 사장보다도 언론과 정치권의 탄압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다. 야당과 좌파언론·단체로부터 거센 정치공세와 탄압은 물론 여당과 우파세력까지 무관심과 방관, 방치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김재철이란 사람은 선혈이 낭자했던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 검찰의 최종 발표만 남은 현재까지, 어두운 터널의 끝자락에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올 수 있게끔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었다. 당장은 모든 것이 꼬이고 잘못돼가는 것처럼 겁이 나도 진실로 당당하다면 두려워할 것도 회피할 것도 없는 것이다. 김 전 사장의 태도가 꼭 그랬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재철 전 사장을 두고 언론노조 위원장이란 작자가 여태 ‘악의 축’을 운운하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란 자가 법과 원칙을 어긴 MBC 노조원들을 무조건 싸고도는 모습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순리대로 돌아간다. 억지와 무지·증오·보복·위선으로는 사필귀정을 볼 수 없다. 사필귀정의 빛을 볼 사람은 누구인가. 검찰의 발표를 앞두고 여전히 증오심을 불태우는 노조와 그 친위세력들인가, 꼬인 실타래를 한 올이라도 풀어보겠다는 김재철 전 사장인가. 그러나 어떻든 양측 모두 사필귀정을 볼 것이다. 한쪽은 원칙대로, 이치대로 살아온 결과에 대해, 다른 한쪽은 타락한 정치셈법으로 모략과 음모를 즐긴 대가에 대해. 이제 검찰이 그 사필귀정의 마지막 한 점을 찍을 일만 남았다. 검찰이 그 순리를 거스를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 hanmyou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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