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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앞에서 사라진 언론개혁의 원칙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 모두에 공평한게 적용해야

종이신문 초토화시킨 ‘검색권력’… 규제와 감시 잣대서 비켜나 무제한 영업

1997년,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펴낸 저널룩 단행본 ‘인물과사상’은 언론계와 지식계에 큰 파장을 몰고왔다. 직설적인 실명비판과 ‘조선일보’라는 특정 언론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등,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글들을 선보인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강교수의 이론은 이후 안티조선과 언론개혁운동의 모태가 되어, 노무현 정권 들어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신문법이 언론의 책임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고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 등 언론지원기구가 신설된 것이다.

강준만 교수와 ‘인물과사상’은 언론개혁운동의 목적을 언론살리기에 두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론개혁을 주도한 ‘인물과사상’이라는 매체 자체가 노무현 정권 들어서자마자 더 이상 재정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폐간되어버린 것이다. 언론개혁 정책이 현실화되고 있는데, 여기에 이론적 틀을 제공한 매체가 오히려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언론의 죽음의 서막에 불과했다.

가장 선정적이고 대중적인 매체라 지탄받던 스포츠신문사 중 ‘굿데이’와 ‘스포츠투데이’가 차례로 쓰러졌다. ‘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로 인수되었다. 장삿속만 차린다는 스포츠신문사가 시장원리에 의해서 퇴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아 언론시장이 더욱 더 성숙해지고 있다는 반증일까?

뉴스시장 92% 점령, 편향된 편집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언론의 큰 방향성을 제시하던 계간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명무실해졌다.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정론을 지킨다던 주간 ‘시사저널’이 경영진의 기사 무단 삭제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시사저널 사태는 단순히 경영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언론계에서는 광고국의 입김이 편집국을 압도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단지 시사저널 기자들이 이에 강력히 문제제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에 어떤 언론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서글픈 것은 유가시장이 무너진 상황에서라면 광고와 기사를 연계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경영전략이라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 대한민국은 OECD 가입국 중 신문구독률이 가장 크게 떨어진 국가가 되었다. 그간 모든 언론사에서는 경영합리화라는 명분으로 무차별적 구조조정에 나섰다. 기자들은 길거리로 내몰렸다. 출판 시장 역시 10년 사이에 딱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나마 학습지가 버텨주어서 이 정도지, 지식의 원친이라는 단행본만 따지면 하락폭은 훨씬 더 크다. 언론개혁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신문·출판이 밀려난 자리는 온·오프의 무가지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 풍경을 관찰해보라. 대부분 타블로이드판 무가지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무가지는 한번 읽곤 지하철 온 천지에 버린다. 예전에 신문과 잡지를 사보던 사람들은 그 버려진 무가지를 다시 들고 읽는다. 지하철에서 스포츠신문을 사는 사람은 이제 지식인으로 불린다. 주간지를 사보는 사람은 석학이다.

인터넷에서는 포털이라는 초대형 무가지가 뉴스 시장의 92%를 점령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언론사의 뉴스는 포털에서 공짜로 볼 수 있다. 그것도 포털사 운영진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선택해주면, 그것이 마치 세상의 중심인 양 읽고 논의한다.

포털사의 편향된 편집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검색권력으로 획득한 시장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여 담합 등 불공정거래, 유사 언론권력을 휘두르는 포털사에 불리한 기사는 절대로 포털 메인에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포털의 횡포가 심해도 일반인을 떠나 전문가들조차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 언론사들이 포털을 떠나서는 생존조차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언론사들은 포털이라는 산소호흡기를 꽂고 산다. 이 호흡기를 떼는 순간 그 언론사는 죽는다. 이런 언론사들이 바람직한 인터넷정책을 제시하고, 포털의 권력남용을 감시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언론사들은 포털에 기사를 더 넣어 조금이라도 클릭수를 높이려고 발버둥칠 뿐이다.

대한민국 언론의 역사는 돈이 있다고 아무나 언론사를 소유경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기업들이 신문사에서 손을 뗀 것도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현행 신문법에도 30대 대기업에 대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기업의 포털 소유는 미디어융합?

또한 유통과 배급 역시 자본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무가지 남발이나, 경품 제공 등은 공정거래법에 의해 철저히 규제된다. 이는 신문법 재개정을 두고 한창 논전을 벌이는 진보와 보수 모두가 다 합의한 일이다. 이러한 언론개혁의 역사는 선비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 언론의 지사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원칙을 들어 언론개혁을 주장해온 사람들이 포털과 무가지에 대해서는 의도적이든 뭘 몰라서 그렇든 사실상 무제한으로 영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있는 것이다. 포털과 무가지로 인해 신문과 잡지시장이 초토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와도, 이에 대해 그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포털의 클릭수 위주 편집은 이들에 의해 수용자 중심의 뉴스서비스로 예찬된다. 뉴스의 질이 아닌 검색과 게임 등 다른 서비스로 확보한 독자에게 뉴스를 보게 하는 행위는 서비스의 다각화로 불려진다. 신문 경영을 할 수 없는 해외기업과 4대기업이 포털을 소유해도, 어정쩡한 미디어융합이란 말로 얼버무린다.

만약 그렇다면, 스포츠신문의 선정적 편집은 무엇이 문제였고, 방송사의 시청률 경쟁은 뭐가 어떠하며,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왜 언론사에서 손을 떼야 했고, 독자만족 경영의 상징인 경품은 왜 금지시켰는가? 그간의 언론개혁에 적용했던 잣대가 포털 앞에서는 무뎌지다 못해 아예 녹아버린 것이다.

모든 뉴스를 포털과 무가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해놓은 유통구조 속에서 유가신문이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언론인들이 폐간과 구조조정으로 언론계를 떠나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이 뉴스조차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도, 포털과 무가지 문제는 기필코 피해가며, 보수신문의 사설이나 붙잡아 비판하고, 뒷북 수준의 편집권 독립이나 외치며 그게 언론개혁의 정도인 양 믿는 사람들을 보면, 착잡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다.

이러한 모든 비참한 결과는, 언론개혁의 원칙을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에 일관적으로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대체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이러한 원칙을 흔들어놓은 것일까? 아직도 신문은 철통같이 규제하고, 포털은 사업자와 네티즌들의 자율적인 관리에 맡기자는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못하고 있다.

신문개혁에 적용한 논리의 반만 포털에 그대로 적용시켜주면 되는데도 말이다.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에 기고한 글을 수정보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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