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는 범여권 아니다

"손 전 지사는 범여권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나 현 정부에 함께했거나 집권 과정에 참여한 정당 소속이어야 범여권이다. 손 전 지사는 반한나라당 후보다. 경선을 함께할 분이므로 구체적으로 평가하는 건 적절치 않다."

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범여권 합류와 그의 경쟁력을 평가한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손 전 지사를 평가한 것처럼 이 전 총리도 손 전 지사에 대해 범여권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이 전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비단 이 전 총리뿐만 아니라, 전체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손 전 지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범여권의 정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경선을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지금 시점에선 굳이 비판하지 않겠다는 셈이다.

범여권이 끊임없이 손 전 지사에게 구애의 손짓을 보내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손 전 지사를 경선에서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떠한 식으로든 범여권 경선레이스가 시작되게 된다면 상황은 손 전 지사에게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과 장관을 역임했고, DJ와 노무현 대통령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운 바 있는 손 전 지사를 범여권이 가만 놔둘 리 만무하다. 청와대와 범여권은 손 전 지사를 집요하게 비판할 것이고, 여기에 한나라당의 공세까지 더해진다면 손 전 지사는 경선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범여권이 손 전 지사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범여권 경선레이스 흥행을 위해 장렬히 산화해 달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손 전 지사의 발언처럼 범여권 경선레이스에 있어 불쏘시개와 밀알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범여권과 손 전 지사는 ‘전략적 동지’일 순 있지만, 절대 ‘동지’는 될 수 없다.

사면초가에 몰린 손학규

최근 손 전 지사의 행보를 살펴보면 도무지 일관성이라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4일만 해도 손 전 지사는 범여권 연석회의와 통합민주당을 동시에 만났다. 범여권 연석회의에선 단일정당, 단일후보, 대통합에 합의했고, 통합민주당과의 만남에서는 대통합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 범여권과 통합민주당이 말하는 대통합이 서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와 합의한 셈이다.

손 전 지사의 알 수 없는 행보는 이 뿐만이 아니다. 범여권, 통합민주당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손 전 지사는 독자적인 선진평화연대를 출범시켰고, 최근엔 민심대장정도 다시 시작했다. 한나라당 탈당 후 지지율 반등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도무지 일관성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정치적 행보다.

문제는 손 전 지사가 처한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범여권 연석회의를 통한 경선레이스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통합민주당 경선도 정통성 있는 민주당 후보에게 밀릴 가능성이 높다. 손 전 지사 입장에선 대통합을 통한 경선을 가장 바라고 있지만, 통합민주당은 여전히 열린우리당과의 당대당 대통합을 반대하고 있다. 여기에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공세는 갈수록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손 전 지사로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인 셈이다.

범여권 불쏘시개로 그칠 것인가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손 전 지사가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나라당 탈당은 절대 이득이 될 명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바로 손학규, 바로 자신이다. 손 전 지사는 노 대통령 비판엔 침묵했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와도 특별한 각을 세우지 않았다. 한나라당 탈당 후 ‘비노반한‘의 적격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는 명분 없는 행보를 계속해 온 것이다.

만약 독자적인 선진평화연대와 외곽조직인 전진코리아를 강화시켜 독자신당을 만들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오직 대선출마와 불출마, 두 가지만을 놓고 고민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한나라당과 범여권 양쪽에서 손 전 지사를 끊임없이 공격했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범여권과 통합민주당을 기웃거리는 기회주의자 이미지는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한나라당 탈당 직후 쏟아졌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는 온데간데 없고, 이제 손 전 지사 앞에는 손 전 지사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는 지지율 1%짜리 범여권 대선주자들만 가득하다. 손 전 지사의 또 한 번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