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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이제 진보좌파의 탈을 벗어야

죽쒀서 개주는 게 내 취미

이건 낚시다. 낚시는 낚시이되 분노의 낚시질이다. 똥물만도 못한 종자들을 모조리 일망타진해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게 낚싯대를 드리운 목적이다. 심형래가 감독한 ‘디 워’란 영화를 둘러싸고 몹시 시끄러운 기색이다. 나는 이와 관련해 특별한 견해가 없었다. 조카가 영화를 관람한 눈치인데 녀석에게 재미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침내 의견을 갖기로 결정했다. 의견을 갖기로 결심한 계기는 상당히 뜬금없다. 비바람 몰아치는 일요일 심야에 친한 후배와 함께 인왕산 꼭대기에 다녀온 데로부터 비롯됐다. 발밑에 납작 엎드린 어두운 서울시내와, 인접한 수도권 위성도시들을 바라보며 인왕산 호랑이의 멸종이 너무나 통탄스러워진 것이다. 인왕산의 호랑이가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옛날 같았으면 호랑이가 물어갈 진상들이 지금은 분수 모르고 까불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 낯선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전사한 군인, 나이트클럽 복도에서 라이벌 조직원에게 칼침 맞은 깍두기, 회사에서 잘린 걸 비관해 화장실 문고리에 목매단 회사원, 입시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수험생. 인왕산 정상에서 사방을 휘 둘러보니 저 아래 시가지의 흐릿한 불빛들에 가려진 말 못할 설움과 진한 눈물이 머릿속에 차례로 떠올랐다.

내가 무슨 슈바이처 박사도 아닌데 언제까지 애상적인 인류애에 젖어있을 수만 있겠나? 냉정하게 정신을 추스르고 대선정국을 호령할 전략전술을 궁리하며 산을 내려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선가, 아마 사직공원 후문 근처였을 게다, 며칠 전 의왕서 화재로 돌아가신 할머니들한테 문득 관심이 미쳤다. 양극화와 고령화 등의 사회과학적 층위의 고민과 담론들이 잠시 뇌리를 스쳐지나간 다음 순수하고 진정한 의미의 동정과 연민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영세공장에서 화장품 포장하다가 유독가스에 질식사한, 또는 불길을 탈출하려는 다급한 마음에 창문 열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사망한 할머니들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는.

노동 3권이 어떻고, 노인복지가 저렇고 따위의 골치 아픈 주제는 피하자. 단지 인간 본연의 관점에서, 즉 인간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정말 불쌍하지 않나? 내가 그 할머니들이라면 원통해서 그냥은 못 죽는다. 생각해보시라. 평생 등골 빠지게 일만 했다. 것도 남들이 부가가치가 낮다고 깔보는, 단순노동이라 얕보는 직종에만 머물며.

좋다. 고생이야 다들 하는 거라고 치부하자. 죽은 할머니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리라. 손톱 빠지게 죽어라 일만 한 것도 억울한 판국에 못 배운 게 죄라고 어디서 큰소리 한번 제대로 쳐본 적이 있겠나? 일생 동안 풀죽어 지냈을 터. 평생을 힘들게 기죽어 살았으면 최소한 편하게 잠자리에 누워 죽을 복이라도 있어야만 한다. 허나 할머니들에게는 이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나는 결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노동자의 정당을 표방한다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회 곳곳에 실재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그림자를 잊지 않기 위해 미흡하나마 노력은 하는 편이다. 내가 인간성이 훌륭하거나 어질고 덕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상가 경비로 일하고, 어머니가 제본소에서 노동해서 번 돈으로 대학졸업장 딴 놈이 꼭 갖춰야 할 기본도리라고 믿는 까닭에서다.

똑같이 없이 살아도 배웠다는 부류는 어디 가서 자신이 불쌍한 놈이라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티를 내선 안 된다. 맘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들이받을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사회에서 저학력에다가 저임금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할머니들은 남을 들이받지 못한다. 아니, 그럴 엄두조차 전혀 못 낸다. 맞으라면 맞고, 죽으라면 죽는 박복한 운명이다.

진보의 참뜻이 뭘까? 제목소리 못 내고 억울하게 당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대신해 더럽고 치사한 놈들 세게 들이받는 거다. 정통 보수우익을 지향하는 나도 아는 이 자명한 사실을 존경하는 진중권 교수께서 모를 턱이 없다. 고명하신 진교수께서도 더럽고 치사한 놈들을 세게 들이받기는 들이받는다. 문제는 그가 힘없는 사람들을 상습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괴롭히는 더럽고 치사한 족속을 들이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의 이목을 끌고, 여론이 주목하는, 따라서 진중권 본인을 뉴미디어시대의 슈퍼스타로 만들어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만만하고 섹시한 적들만 골라 선별적으로 타격한다.

진중권이 교활한 장사치인 탓만은 아닐 듯싶다. 120여 년 전에 죽은 어떤 독일 먹물이 그랬다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인간의 본질은 결국은 그 인간이 듣고 보고 경험한 것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진중권의 집안은 유명 음악가를 배출한 학식 높은 명문가다. 진중권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내가 자랄 적에도 피아노는 물론이고 실로폰도 귀했다. 이는 곧 진중권이 먹고살 염려와는 무관한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얘기다. 내게는 즉각 누구누구의 얼굴과 등치되는 의왕 화장품공장 할머니들의 고되고 신산한 인생이 진중권에게는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민초들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조건과는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성장했거나 특권귀족처럼 생활하는 작자들이, 진보진영을 자처하고 개혁세력을 사칭하면서, 대한민국의 중대한 과제와 목표들에 신나게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들 사이비개혁과 가짜진보가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는 불요불급한 가십거리들에 떠밀려 일반국민의 복리와 직결된 충격적 사건과 사활적 현안들은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기 일쑤다. 객관적으로 따져보자. 누리꾼들의 악플에 시달린다는 요상한 이름의 충무로 영화감독 및 영화제작자가 더 불쌍한가, 아니면 일평생 일만 하다가 화마에 목숨을 잃고 비명횡사한 가난하고 무식한 의왕의 공장할머니들이 더 불쌍한가?

진중권이 백기사가 되어 구하려 드는 호모영화인들은 전부 대졸학력이다. 신나 쌓아놓은 창고 옆에서 독한 연기 마시며 하루에 12시간씩 포장작업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의왕 할머니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매스컴의 시선을 잡아끌 인맥과 노하우만큼은 넉넉히 갖추고 있다. 언론플레이의 소재와 동지로 적합하지 않은 초라하고 영양가 없는 평범한 서민계급 할머니들과는 다르게 진중권 교수의 블로그에 언급될 자격과 상품성이 충분하다.

진중권식 잣대에 의하면 많이 배운 소수를 옹호하면 진보고, 못 배운 다수를 두둔하면 파쇼인 셈이다. 태극기 휘날리는 대중을 맹목적 국가주의에 물들었다고 비판하는 그가 분별없는 교양주의에 중독된 결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방끈을 휘두르는 현상은 관찰자 입장에서 흥미롭기 짝이 없다. 소위 명문대 졸업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강남학생들이 최대소비자로 부상한 논술시장에 진중권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사태는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무명의 소시민이 주축인 심형래 지지자들을 놀려줄 시간은 있어도 강남의 기득권층과 싸울 여력은 없다는 걸까?

진중권은 늘 약자의 편에 서왔다고 자부하는 인물이다. 이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강남지역 부녀회는 진중권을 향해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고졸 네티즌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풍부한 물적 토대와 다양한 권력자원을 보유한 지존무상의 절대강자다. 한데 진중권한텐 그게 아닌 모양이다. 강남아줌마가 진중권이 판매하는 세련된 평론문화와 고급미학의 주된 수요자여서일까? 진중권이 흉중에 품은 강자와 약자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뻔히 짐작이야 가지만 내 입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차마 더는 추궁하지 못하겠다.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무수한 서민들을 대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양반들은 이제 그만 진보딱지와 개혁의 완장을 알아서 반납하기 바란다. 진중권은 어서 커밍아웃해야 마땅하다. “저는 팔자 늘어진, 먹고살 걱정 없는 쁘띠 부르조아 지식인이에요!”라고. 당연히 진중권은 그러지 않으리라. 진보좌파의 탈을 벗는 즉시 책도 안 팔리고, 기자들이 찾아주지도 않으며, 포털사이트 관리자들이 검색어순위 상위권으로 띄워주지도 않을 테니까. 진중권이 황우석을 욕하고 심형래를 질타해? 푸하하하! 희대의 연쇄강간범이 혼인빙자 간음죄로 감방에 잡혀 들어온 변두리 캬바레의 3류 제비를 마구 비난하는 꼴이다. 서구의 좌파는 자본가와 투쟁하고, 한국의 진보는 대중과 싸운다.

민중이 조속한 해결을 갈망하는 당대의 긴급한 과제와 마주하기를 꺼리는 개인과 집단은 무대 중앙에서 미련없이 물러나야 옳다. 퇴장을 거부한 채 생명력 상실한 엉뚱한 의제들에 기대어 구차하게 연명하려는 순간 논밭의 거름으로도 써먹지 못할 똥물만도 못한 퇴물로 전락하는 것이다. 김정일 만나 사진만 찍으면 유권자들이 저희를 찍어줄 것이라 착각하는 청와대와 동교동, 386세대를 겨냥한 네트워크 마케팅에 여념이 없는 오마이뉴스, 회사소개를 통해 자기네 소속기자 모두가 이른바 주요대학 출신임을 자랑하는 프레시안 등이 똥물만도 못한 존재인 이유다.

나에 앞서서 진중권을 일컬어 똥물만도 못한 위인이라고 일갈한 선각자가 계시다. 바로 서역국 임금님이시다. 서역국왕과 달리 나는 진중권에게 중국집에서 탕수육 사준 적 없다. 대신에 집에서 죽이나 쑬 요량이다. 진중권 주게. 죽 쒀서 개 주는 게 내 취미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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