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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연합뉴스) 이명조 특파원 = '제2의 프랑스 혁명'으로 불리는 1968년 5월 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다.

'68혁명'으로 불리는 5월운동은 그해 3월 대학생 8명이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됐다.

사무실을 습격했던 학생들이 체포되자 동료 학생들이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5월 들어 대규모 항의시위와 대학 점거에 나섰으며, 여기에 노동자 총파업까지 겹쳐져 프랑스는 한달 이상 마비상태에 빠졌었다.

당시 샤를 드골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6월 총선거를 실시해 압승을 거둠에 따라 시위의 불길은 누그러졌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68년의 유산을 놓고 찬반양론이 뜨겁다.

68운동을 다룬 책 100여종이 이미 서점의 진열대를 채우고 있고, 수십편의 TV, 라디오 특집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올해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68년 5월은 청산돼야 한다"며 68년의 가치를 정면 부정하고 나선 뒤여서 논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작년 대선 유세당시 좌파를 겨냥해 "68년 5월은 무정부 상태와 도덕적 상대주의, 사회와 국가의 가치 파괴를 대표한다"면서 이는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었다.

집권 후에도 사르코지 대통령은 폭력시위에 대해 '제로 톨레랑스'(무관용)를 선언하면서 공권력 수호를 다짐했는가 하면 학교와 노동의 가치 및 권위가 추락한데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좌파의 유산으로 '일하지 않는' 프랑스 병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주35시간 근무제의 개혁추진과 학교.교사의 권위 회복을 강조하는 것도 68년의 정신에 반기를 든 것이다. 68년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13살이었다.

그러나 당시 68혁명의 주역이었던 다니엘 콩방디 유럽의회 의원은 사르코지가 두번이나 이혼을 하고도 대통령 자리를 지키는 데서 68운동이 프랑스 사회를 얼마나 많이 바꿔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40년 전에는 실업을 걱정하지 않았으며, 지구온난화나 에이즈를 염려하지 않았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면서 "68년 5월의 정신을 끊임없이 천착하는 것이 현대의 각종 문제점을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역사가인 미셸 위노크도 "1968년은 사회의 모든 문제점들이 응축돼 나타난 것"이라며 "그 때만 해도 교실에서 공장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여전히 완고하고 폐쇄된 사회였다"고 68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좌파 지식인인 타리크 알리는 최근 '1960년대 자서전'이란 책에서 "60년대 일련의 사건들은 여전히 현실정치의 준거점"이라며 "이는 문화혁명이며 권리혁명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여성들은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데도 남편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피임약은 거의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유급 공휴일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고 프랑스 언론들은 전했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프랑스는 실업률 제로에다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68세대가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프랑스는 줄기차게 뒷걸음질을 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간 렉스프레스의 편집장인 크리스토프 바르비에는 "68세대들은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대는 그 후에 너무나 많은 것을 허비했다. 이제 그 후대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우파는 68혁명을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에 좌파는 이를 '운동'이라고 여기고 있다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의 한 단면을 전했다.

mingjo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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