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이 최근 이용수 씨의 위안부 증언들을 1차 자료를 중심으로 다시 검토한 결과 과거 미디어워치의 이용수 검증 보도에서 일부 오류가 있었음을 알려왔습니다. 김 소장의 지적은 다음과 같으며, 미디어워치는 이 지적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이에 정정하는 바입니다. (1) 이용수 씨의 위안부 관련 증언이 미디어워치의 지적처럼 1993년부터 최근까지 이십여 차례에 걸쳐 연도, 나이, 경위, 기간 등에 일관성이 없이 오락가락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미디어워치가 연합뉴스 등의 관련 보도를 인용하여 증언 내용이 달라졌다고 지적한 '2007년 미국 의회 증언'과 '2018년 프랑스 의회 증언'은, 원 증언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기본적으로 같은 취지의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두 증언에는 공히 “강제연행 현장에 군인이 있었다”, “등에 칼이 찔려 끌려갔다”는 ‘1993년 최초 증언’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강제연행 증언이 담겨 있는데, 이는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내용은 아니고 실제로는 (2007년, 2018년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미 2000년을 전후로 하여서 등장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이 씨의 ‘1993년 최초 증언’이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외로 갑자기 과격한 강제연행 증언으로 바뀌고, 결국 2007년 미 의회에서까지 그렇게 바꾸어 증언한 경위를 추궁하는 것이 이용수 위안부 증언 변천 문제의 핵심이다. 이 씨가 ‘1993년 최초 증언’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최초 증언집은 더 이상 팔면 안 된다고 최근 기자회견에서 강조했음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2) 미디어워치가 한겨레를 보도 등을 인용해 이용수 씨가 2016년 12월, 박유하 교수 결심 공판에서 한 증언은 미디어워치의 소개와는 달리 공식적인 '법정증언'이 아니었다. 이 씨가 당시 증언대에서 여러 이야기를 했었지만, 이 씨는 일단 당시에 증언선서를 한 바가 없었다. 법적으로는 단순히 재판 방청인의 의견진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박유하 교수의 관련 1심 기록을 직접 확인한 결과로도 이용수 씨가 법정증인으로 채택된 내역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
[ ‘니시오카 쓰토무’의 해설(西岡力解説) ] 본 원고는 한국의 인터넷 매체 ‘미디어워치’가 2018년 4월에 게재한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의 초역(抄訳, 편집번역)이다. 원문은 매우 장문으로 (1)에서 (3)까지 있지만, 여기서는 (1)의 주요 부분만을 번역했다. 참고로, 전체의 부제를 소개한다.
필자 황의원(黄意元) 씨는 1977년생의 젊은 세대의 보수 논객이다. 이 기사를 집필하기 전인 2014년에 정대협과 북한과의 관계를 고발하는 기사를 써서 2016년에 정대협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지만 법정에서 다수의 증거를 제시하며 싸웠고 2020년 2월에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정대협과의 싸움을 통해 황 씨는 위안부 문제 자체의 문제점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위안부의 증언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8년 시점에서도 한국에서 그것을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초 황 씨는 여기자의 이름으로 이 기사를 발표했다.* [*편집자주 : 이 부분은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가 혼선으로 잘못 기술한 부분이다. 2018년도 이용수 비판 기사의 기명(記名)인 ‘신규양’은 미디어워치에도 공지되어 있는, 지금도 쓰고 있는 황의원 대표이사의 필명으로 여기자의 이름이 아니다. 황 대표는 2014년도 정대협 기사의 경우만 한 여기자의 실명을 빌려 썼다가 1~2년 후에 다시 황 대표의 이름으로 돌렸을뿐, 특히 2016년도부터 정대협에게 소송을 당하기 시작한 이후엔 일체 남의 실명은 빌려 쓰지 않고 있다.] 황 씨는 정대협과 윤미향 씨에게도 이 기사를 보냈다. 그런데 정대협은 자신들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만 “정대협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왔을 뿐이며, 이용수 증언의 변천 문제와 관련된 비판에 대해서는 일체 반박을 해오지 않았고, 오히려 이 기사가 나간 후부터 이용수 씨와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을 피하게 됐다. 이용수 씨가 윤미향 씨에 대한 비판을 단행한 배경 중 하나로, 윤 씨 등이 그간 자신을 이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자기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자 태도가 표변하면서 자기를 지켜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 있다. 이용수의 증언을 비판하는 논자들은 특히 정대협이 1993년에 출판한 증언집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증언집에는 이 씨가 일본군이 아니라 일본인 뚜쟁이에 의해 위안소에 끌려갔으며 또 그 때 뚜쟁이로부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받아서 기뻤다고 생생하게 말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논자들이 이 씨가 처음에는 이렇게 증언을 해놓고선 나중에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증언을 변화시켰음을 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씨는 문제의 증언집을 계속 발간하고 있는 정대협을 증오하는 마음이 증폭되어있는 것 같다. 황 씨의 기사는 매우 실증적이고 논리적이다. 사실에 기초하여,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논하는 젊은 세대의 기자가 등장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
1944년, 내가 만 열여섯 살 때 가을의 일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미창(米倉)에 나가서 쌀을 져나르는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중략)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지난 8월 30일 새벽 5시30분 대만 타이베이에서 1시간여 떨어진 신죽(新竹) 공군기지 앞. 이용수(72·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비둘기 아파트 107동 113호)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했는데…, 여기가 정말로.”‘신죽’이라는 어렴풋한 기억 하나만으로 찾아나선 몸서리쳐지는 50여년 전 위안부 삶은 공군기지와 기지 옆을 흐르는 개천, 부대 주변의 방공호, 전쟁 때 20여명의 여자들이 있었다는 기지 주변 70대 노인의 증언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부대 안쪽인 것 같아. 처음에는 건물이었는데 폭격으로 무너져 판자로 가건물을 세웠지.”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45년 1월 이곳으로 끌려온 이 할머니는 어디인지조차 모른 채로 일본 패전일까지 하루 5~6명의 일본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대구지역 할머니 5명 가운데 이용수(71·대구시) 할머니 등 3명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정부방침에 반발해 정부 지원금 3150만원의 수령을 거부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부 지원금의 수령을 거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이 할머니 등은 지난 4일 정부지원금 수령과 관련해 ‘앞으로 일본의 민간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으러 온 대구시 관계자를 만나 “일본 정부에 책임이 있는 만큼 그들로부터 정식 사과를 받고 배상을 받아야 한다”며 각서쓰기와 지원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14살 때인 1942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이 할머니는 지난 92년 피해자들과 함께 10여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의 사과 및 법적 배상을 요구해 왔다.
동 법안은 전 ‘위안부’였다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표하고 그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금전지급을 포함)를 강구할 것을 정한 것입니다. 일본공산당, 민주당, 사민당의 야당 3당이 전 국회에 제출하여 계속 심의되고 있습니다.(同法案は、元「慰安婦」とされた人たちに謝罪の意を表し、その名誉回復のために必要な措置(金銭の支給を含む)を講ずると定めています。日本共産党、民主党、社民党の野党三党が前国会に提出し、継続審議になっています)한국의 이용수씨(74세)는 14살 때 총검으로 협박당하여 연행된 사실과 거절하면 구타당하고 전기고문을 받아 죽을 뻔했던 경험을 말하면서 “나는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지금 살고 있다. 이 법안이 심의되어 성립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韓国の李容洙さん(74)は、十四歳で銃剣をつき付けられて連れてこられたこと、拒むと殴られ、電気による拷問を受けて死にかけたことなどを話し、「私は歴史の生き証人として今、生きている。この法案が審議され、成立することを望む」と語りました)일본공산당에서는 요시카와 하루코(吉川春子), 핫타 히로코(八田ひろ子) 참원의원이 동석했습니다.(日本共産党からは吉川春子、八田ひろ子参院議員が同席しました)
1928년 한국 대구 태생. 1944년 16살 때 “군복같은 옷을 입은 남자”에 연행되어 대만으로. 이동 중에 배 안에서 일본 군인들한테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1928年韓国の大邱(テグ)生まれ。1944年、16歳の時に「軍服みたいな服を着た男」に連行され、台湾へ。移動中の船の中で、日本の兵隊たちに繰り返し強かんされる)그 후 연행된 대만에서 강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3년간 생활했다. ‘위안소’에서는 하루에 여러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도록 강요당했으며 저항하면 전선과 같은 것으로 전류를 흘리거나 통나무로 때리는 등 폭행당했다. ‘해방’ (일본의 패전) 후 한동안 머물다가 한국으로 귀국했다.(その後、連れて行かれた先の台湾で、日本軍「慰安婦」としての生活を3年間強制された。「慰安所」では1日に何人もの兵士の相手をさせられ、抵抗すると電線のようなもので電流を流されたり、丸太で叩かれたりの暴行を受けた。「解放」(日本の敗戦)後、しばらくしてから韓国に戻る)
“열다섯 살이던 1942년경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 이후 내 몸과 삶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데 정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우리는 한국의 어머니도, 딸도 아니란 말인가.”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청구서를 접수시키러 온 일본군 위안부 출신 이용수(79) 할머니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 이용수 할머니 “구타와 고문, 강간으로 점철된 3년”= 첫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나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설움이 북받치는 듯 "제가 겪은 일들을 꼭 얘기해야 하는데 너무 부끄럽다"며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하나하나 고발했다. 성 노예로 지낸 한 많은 세월들도 털어놨다.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유모로 일하는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면사공장에 다니다가 16세이던 1944년 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
“16살에 자다가 군인에게 붙들려갔는데 군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기고문 등 갖은 고통을 당했다. 대만 가미카제 부대로 끌려가서 1946년에 나왔다. 박유하가 망언으로 책을 냈다. 저런 교수가 어떻게 학생을 가르치나. 엄벌해달라. 너무나 억울하다.”
“어느 날 방 안에 있는데 여자아이가 창문 밖에서 손짓으로 날 불러요. 친구가 놀자고 하는 줄 알고 나갔더니 여자아이는 손으로 내 입을 막고, 군인이 날카로운 걸로 등을 찔러요. 그렇게 기차역으로 끌려갔죠. 15세 때였어요.”
[정정] 황의원 미디어워치 대표가 정규재 주필과의 펜앤초대석 방송 중, 김삼석 재심 판결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부 오류가 있어서 정정한다고 알려왔습니다. 방송에서 황 대표는 “김삼석이 국가기밀성이 있는 자료를 반국가단체에 넘긴 것까지도 사실이지만, 반국가단체의 구체적인 지령을 통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 확고히 증명되지 않아 무죄가 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약간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삼석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혐의 중 하나는 정확히는 ‘국가기밀 탐지•수집 혐의’입니다. 황 대표에 따르면, 재심 재판부도 김삼석이 탐지•수집을 했던 정보 중 일부가 국가기밀성이 인정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반국가단체로부터 구체적인 지령을 받아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 확고히 증명이 되지 않아 그래서 재심 재판부가 이 부분 무죄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관련 정확한 진상이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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