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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본 외교관'"→ "그건 '별명'"

"나남에 대나무 숲"→"'숲'은 아니고 '풀'"

"2주간 공습"→"미군기 지나는 것 봤을뿐"

"인민군에 쫓겼다"→"마주친 민병대 누굴까"



'요코이야기(원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의 저자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씨는 한 국내 언론사를 통해 자신의 책이 실화라고 거듭 주장하면서도 핵심적인 의문사항들에 대해서는 책 내용과 엇갈리는 해명을 내놓아 왜곡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요코씨는 중앙일보와의 해명성 인터뷰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책의 일부 내용들과 부친의 행적에 대해 오빠와 관련된 2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이 "보고 겪은걸" 썼으며 역사적 왜곡은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으나 요코씨의 해명 중 상당 부분은 책 내용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 나남에 대나무 숲 있었나

요코씨는 추운 지방인 함경북도 나남(청진)에 대나무가 살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 "어머니가 대나무를 그리워해 일본 아오모리에서 옮겨심었으며 그것이 약 10년간 번졌지만 큰 '숲(grove)'은 아니었고, 가늘고 긴 대나무 '풀밭(grasses)'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요코이야기'는 원제가 '대나무 숲...'일 뿐 아니라 영문판 표지에는 커다란 대나무 숲 그림이 그려져 있고, 본문에도 대나무 '풀밭'이 아니라 '숲'이었음을 묘사하는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요코의 집은 "대나무 숲 안에(our home in its bamboo grove)" 있었으며, 요코는 하교길에 개울을 건넌 뒤 "곧바로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집까지 달려갔다(straight into the bamboo grove, and ran all the way home)". 요코 모녀는 "대나무 숲을 지나(beyond the bamboo grove)" 오빠를 배웅하기도 했다. 이는 대나무 숲이 요코 집을 싸고 있었을 뿐 아니라 꽤 멀리까지 퍼져 있었다는 기술이다.

또 요코는 미군기의 저공 공습 때 대나무들이 마구 휘어져 "삐걱이며 부러지는 소리(making cracking noises)"를 들었는데, 풀 같은 대나무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 1945년에 인민군 있었나

요코씨는 당시 인민군이 없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역사보다 나의 생존에 초점을 맞췄다"며 역사적으로 인민군이 없었다면 "우리가 마주쳤던 북한 민병대는 누구일까? 나는 모른다.(Whoever Mother, my sister and I encountered were North Korean Militia? I do not know)"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요코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민군은 군복에 '기관총(machine gun)'을 소지한건 물론 공공연히 훈련까지 했으니 단순한 민병대 정도로 보기 힘들다. 또 요코 모녀는 이들을 어쩌다 '마주친' 정도가 아니라,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추적을 당하고 붙잡혀 성추행을 당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요코는 1945년 7월 29일 한밤중에 나남에서 구령에 따라 훈련하는 인민군을 목격했으며, 원산역에선 기차안에까지 올라온 인민군의 검문을 받는다. 원산 이남에서부터는 인민군을 피해 아예 낮에는 자고, 밤에만 걷지만 결국 무장 인민군에게 적발돼 봉변을 당하기 직전, 이들이 공습을 맞아 죽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 이들 세 모녀는 인민군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아예 죽은 병사들의 군복을 벗겨 입고 위장을 한다. 인민군은 요코의 오빠가 일하던 나남의 공장에도 나타나 기관총을 난사했다. 1948년 2월에야 창설된 인민군이 어떻게 1945년에 북한을 완전 장악한 듯이 활보할 수 있었는지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 1945년 7월 미군기 나남 공습했나

요코씨는 "나는 미군기가 나남을 '폭격했다(bombed)'고 쓰지 않았다. 경보사이렌이 울려 대피해있다 미군기 3대가 머리 위를 지나는걸 봤다고 썼다. 당시 나진에 살았던 일본 교통장관도 B-29를 봤다니 내가 본 것도 B-29 아닐까? 어쩌면 러시아기 일 수도 있다. 난 비행기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영문판 서문엔 1945년에 "미국은 이미 북한 공업지역들을 폭격했다(Americans were already bombing industrial sites in northern Korea)"라고 적혀 있다.

요코씨도 7월 29일 나남을 떠나기 전까지 "공습 때문에 2주 동안 하룻밤도 못 잤다(I had't had a night's sleep in two weeks because of the air raids)". "한 여름 무더위에도 당국으로부터 등화관제 지시가 내려져 불빛을 막기 위해 창문을 모두 천으로 가렸다". "날마다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집에 있을 때는 비상배낭을 움켜쥐고 대피소로 뛰어들었고, 야외에서 일하다가는 땅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미국 폭격기들은 언제나 대열을 지어 날았다. 에노모토 선생님은 도쿄 등 일본 본토를 공격한 것과 동일한 기종인 B-29 같다고 했다"고 책에는 나와 있다.

"밤이면 밤마다 경보 사이렌이" 요코를 깨웠으며, 나남을 떠나던 날 밤도 "공습이 없기를 기도" 했던걸 보면 B-29로 보이는 미군기가 어쩌다 한 번 씩 나남 상공을 지난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미국이 아직 일본 본토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훨씬 전인 1945년 7월 북한지역에 이처럼 맹렬한 미군의 공습이 있었다는 게 사실일까? 이건 미군 기록을 보면 밝혀질 일이다.

◇ 요코 아버지는 누구인가

요코씨는 첫번째 책에서 아버지가 만주에서 일한 '고위 정부 관리'라고 했고, 두번째 책인 '오빠, 언니, 그리고 나(My Brother, My sister, and I)'에서는 "일본 외교관이었다(my father was a Japanese diplomat)'"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친이 남만주 철도회사 행정부문에서 일했으며 '별명'이 외교관이었을 뿐이라고 말을 바꿨다. 외교관이란 직업이 흔치 않았을 1940년대에 '사내 사람들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했다는 이유로' 외교관이란 별명이 붙었다는 건 선뜻 믿기 어렵다. 독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아버지는 일본 외교관"이라고 명백히 썼다가 '철도회사 행정간부'라고 말을 바꾸는 이유는 무얼까.

요코는 한국인인 나남역장의 거부로 하마터면 기차를 못 탈 뻔 했다. 아버지가 만주철도회사 간부인데 만주 인근 철도역에서 가족들이 기차 탑승을 거부당했다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요코씨의 책에 따르면 요코의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물이었다. 일본 총독 주최 만찬에도 초청받는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언니에게 요코는 말한다.

"러시아인들이 만일 아버지를 죽였다면 분명히 일본 정부에 통보했을거야", "그 분의 직위 때문에 말이야 (Because of his position)". 그만큼 높은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나남을 떠날 때 요코 가족을 도와준 마쓰무라 하사는 이렇게 경고했다.

"당신 남편이 만주에서 일본을 위해 한 일 때문에 그들(러시아인)은 특별히 당신과 가족을 찾을 것이다. 당신들을 죽일 것이다(They will be looking especially for you and your family. They will kill you. Because of your husband's work for Japanese interest in Manchuria)"

원산역에서 기차에 오른 인민군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남에서 탄 중년의 여성과 세 아이들을 찾는다. 이름은 가와시마다"

이런 대목도 있다. "인민군이 아버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는걸 오빠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아들의 목이라도 흔쾌히 베려 할 것이다. 누군가 현상금을 탐내어 밀고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요코 모녀가 원산 이남에서 기차를 버리고 서울을 향해 걷기로 한 것도 "누군가 당신들을 밀고할 수도 있으니 여기 머무는 것보다 걷는 게 안전할 것"이란 군의관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씨는 이렇게 해명했다.

"우리가 쫓긴 건 아버지가 만주철도회사에서 한 일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들이 모든 일본인들에게 분노해 있다고 생각했다" 책 내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다.

요코씨는 아버지가 1933-1945년 남만주 철도회사에서 일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오래 일했다면 공식 기록이 없을 리 없다. 의혹을 풀려면 확실한 기록을 제시하면 된다.

요코씨는 아버지가 옥스퍼드대에 유학했고, 1942년 가을 총독 초청 만찬에서 한국인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고도 책에 썼다.

요코씨의 아버지가 그토록 한국인들을 사랑했다는 기록을 본다면 한국인들은 감동할 것이다.

그런 증거들만 제시한다면 '아버지는 한자 이름이 731부대 간부 K와는 다르다'는 해명은 구태여 할 필요도 없다.

요코씨가 왜 의혹을 쉽게 풀 수 있을 증거들을 이제껏 제시하지 않는지 말로 정말 의문이다.




(워싱턴=연합뉴스) lk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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