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심규진 | 솔직히 말해 처음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단식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필자 역시 반대 쪽에 가까웠다. 단식은 너무 낡고, 신파적이며, 자칫하면 정치적 ‘떼쓰기’처럼 보일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거 황교안 대표의 단식이 남긴 정치적 실패의 기억이 강하게 떠올랐다. 감정의 과잉은 있었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그런데 장동혁은 달랐다. 단식을 망설이는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 전격적으로 결단했다. 이것이 바로 장동혁의 정치 스타일이다. 외부 압력에 떠밀려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적 이득이 불분명해 보이는 길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판단이라면 주저 없이 실행한다. 그래서 그의 행보는 늘 ‘표면’이 아니라 ‘행간’으로 읽어야 한다. 유튜브 정치의 문법에 익숙한 일부 인사들이 여론에 밀려 반응형 정치를 할 때, 장동혁은 늘 타이밍을 선점해 왔다. 떠밀려 하는 정치와, 주도하는 정치는 결과가 다르다. 장동혁의 단식은 바로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필자는 과거 엘리자베스 1세를 언급한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누구와 가까워 보일 때조차 이미 다음 수를 깔아둔 군주였다. 장동혁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치인은 보이는 대로만
겨울엽서 52 주광일 겨울이 머무르고 있는 서울숲은, 고요를 벗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깨어있는 수도자처럼, 거룩한 모습입니다. 미리 연락도 하지않고 불쑥 찿아온 나를, 돌아온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마음을 푸근하게 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덧없는 세상 일을 털어버리고, 겨울의 서울숲 길을 보무당당하게 걸어갈수 있을것 같습니다. 2026.1.19. □ 주광일 1943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1965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제5회 사법시험 합격했다. 197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6년에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을 수료했다. 검사로 있으면서 면도날이라고 불릴 만큼 일처리가 매섭고 깔끔하며 잔일까지도 직접 챙겨 부하검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10.26 사건 직후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돼 김재규 수사를 맡았으나 "개혁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원대복귀되기도 했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을 때 자신이 직접 언론 브리핑을 했던 인천 북구청 세금 횡령 사건, 인천지방법원 집달관 비리 사건 등 대형 사건을 처리했다.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차장검사
인싸잇=심규진|정치에서 사과는 도덕적 제스처가 아니라 명백한 전략 행위다. 특히 위기 국면에서의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과가 정치적 손실을 얼마나 줄이고 회복 가능성을 얼마나 남기느냐의 문제로 평가된다. 이 점에서 최근 한동훈의 사과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득실 계산에서 실패한 사례에 가깝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르면, 사과는 단기적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중장기적 신뢰 회복을 목표로 설계돼야 한다. 즉, 즉각적인 지지층 결집보다 중립층과 관망층의 판단을 유예시키는 것이 핵심 성과 지표다. 그러나 이번 사과는 이 기준에서 정치적 ‘득’을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손실을 고정하는 효과를 낳았다. 정치적 득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강성 지지층 내부에서는 ‘사과를 했다’는 형식 자체가 심리적 방어 근거로 작동한다. 이는 단기적으로 지지층 이탈을 일부 막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 효과는 이미 결집된 집단 내부에서만 유효하며, 새로운 지지 확장이나 중립층 설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정치적 득이라고 부르기에는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 반면 정치적 손실은 구조적이고 광범위하다. 첫째, 사과의 핵심 구성 요건인
인싸잇=박제연 | 1997년 11월 21일 우리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SNS가 없던 당시 환율이 얼마인지, 어떤 영향이 있는 것인지, 그리 관심도 없었고 몰랐던 우리에게 그 당시 언론과 정부는 어떤 경고를 줬을까? 100일 전으로 돌아가 보자. 1997년 8월 2일 “국내 외환위기 가능성 희박” 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한국은행은 헤지펀드의 환투기가 사실상 불가하다며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8월 말 우리 환율은 처음으로 900원을 넘겼다. 800원 밖에 되지 않던 환율이 900원을 넘어가며 이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됐다. 1997년 8월 25일 한국은행의 외환시장 과장은 인터뷰를 통해 “원화가치의 단기 폭락을 없을 것, 달러를 사재기할 경우 분명히 환차손을 보게 될 것, 한은은 달러당 905원 선을 넘지 못하도록 개입할 것” 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905원이 넘지 않도록 개입한다는 저 “905원” 이라는 숫자를 기억해 보자. 이 글의 뒤에 또 등장할 테니. 환율이 흔들리던 1997년 9월 신문지 상에는 “한국경제 단기불안, 중장기 전망은 밝아” 등의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환율은 진정되지 않았고 1997년 10월 29일 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