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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세미나]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 (1)

니시오카 쓰토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의 발표문 ‘조선인 전시노동과 사도킨잔’



※ 본 자료는 2022년 3월 23일, 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歴史認識問題研究会, http://harc.tokyo)의 학술 세미나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佐渡金山における朝鮮人戦時労働の実態)’에서 발표된 니시오카 쓰토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의 발표문 ‘조선인 전시노동과 사도킨잔(朝鮮人戦時労働と佐渡金山)’을 완역한 것입니다. 발표문의 앞 부분 상당수는 니시오카 회장이 기존에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한 것이지만, 뒷 부분에서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에게 본격적 반론을 하는 내용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입니다. 사진과 캡션은 미디어워치가 별도로 덧붙였습니다. (번역 : 요시다 켄지)




[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세미나]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


1. 머리말 :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 실태’에 관하여


2. 니시오카 쓰토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의 발표문 ‘조선인 전시노동과 사도킨잔’


3. 카츠오카 칸지 레이타쿠대학 교수의 발표문 ‘전후 일본의 조선인 전시노동연구사’


4. 야마모토 유미코 나데시코 액션 대표의 발표문 ‘ILO조약의 해석과 관련해 전시노동은 강제노동조약 위반인가?’


5. 나가타니 료스케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연구원의 발표문 ‘사도킨잔의 조선인 전시노동의 실태’


6.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발표문 ‘1940-5년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 동원, 근로환경, 그리고 일상생활 - “강제연행”·“강제노동”론(論) 비판 –‘


7. 황의원 미디어워치 대표이사의 발표문 ‘한국내 일본 사도금산 세계유산등재 반대운동 실태‘




조선인 전시노동과 사도킨잔

(朝鮮人戦時労働と佐渡金山)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 


[발표자 소개] 전공 한국·북조선 지역연구이며, 현직은 모랄로지 도덕교육재단(モラロジー道徳教育財団) 도덕과학연구소(道徳科学研究所) 교수·역사연구실장, 레이타쿠(麗澤)대학 객원교수이며, ‘구하는 모임(救う会, 납북자 구출 모임)’ 전국협의회 회장,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이기도 하다. 한국 연세대에서 유학했으며 쓰쿠바(筑波)대학 대학원 지역 연구과를 수료했다. 외무성 주한국 전문 조사원을 역임했으며 ‘겐다이코리아(現代コリア)’ 편집장, 도쿄기독교대학 교수 등을 거쳤다. 제30회 ‘세이론(正論)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한국 정부와 언론이 말하지 않는 위안부 문제(よくわかる慰安婦問題)’(한국어판 출간),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でっちあげの徴用工問題)’(한국어판 출간), 편저 ‘조선인 전시노동의 실태’, ‘일한 ’역사인식 문제’ 40년(日韓「歴史認識問題」の40年)’, ‘나의 체험적 코리아론(わが体験的コリア論)’ 등 다수.



1 조선인 전시노동의 전체상


먼저 조선인 전시근로의 전체상부터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조선인 노동자의 전시동원은 1939년 9월에 시작됐다. 사실 이보다 5년 전인 1934년 10월에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의 일본 내지 도항을 한층 감소시키는 일이 긴요하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각의결정(閣議決定)이 내려졌다.


“조선 남부지방은 인구가 밀집되어있고 생활이 궁박한 자가 다수 존재하며, 이로 인하여 남선(南鮮) 지방민의 일본 내지로의 도항이 최근 급격히 많아졌다. 이는 일본 내지의 실업 및 취업난을 더욱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미 일본 내지에 거주 중인 기존의 조선인 실업도 더욱 심화시킬 것이며, 또 이에 따른 조선인 관련 각종 범죄, 셋집 분쟁 등의 제반 문제를 야기하고. 내선(内鮮) 사람들 간의 사건을 확산시켜 내선 융화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치안상으로도 우려할만한 사태가 발생토록 만들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 및 내륙을 통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즉, 조선인을 선내(鮮内)에 안주시키는 것과 동시에 인구가 밀접한 지방 인민을 만주로 이주하게 하고, 일본 국내 여행을 더욱 감소시키는 일이 긴요하다.”


이 무렵에는, 조선에서 일본 내지로 도항(여행)을 희망하는 자는 거주지 관할 경찰서나 경찰관 주재소에 출두하여서 취직처의 확실성 여부, 또 여비 이외 10엔 이상의 여유금 소지 여부, 그리고 브로커에 의한 모집이 아님을 증명한 후에, 부산 수상경찰측에 제출할 ‘소개장’까지 받아야 했다.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일본 내지로의 도항은 불가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저러한 각의결정이 내려지고부터는 이 ‘도항 소개장’의 취득이 어려워졌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6년간 무려 72만 7,094명의 일본 내지로의 도항 출원이 불허되었다. 전시동원이 시작되기 이전에, 조선에서는 다수의 타관벌이(出稼ぎ) 희망자가 도항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규 절차를 밟지 않은 부정 도항자도 다수 있었다. 일본 내무성 통계에 따르면, 1930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일본 내지에서 부정 도항자로 발각된 자는 3만 9,482명, 그 중 3만 3,535명을 조선으로 ‘강제송환’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전시동원이 시작된 1939년부터 1942년까지의 4년간, 2만 2,800명이 일본 내지에서 부정 도항으로 적발돼 1만 9,250명이 전시동원 시기였음에도 조선으로 강제송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또한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1939년 9월에 시작된 ‘모집’ 형식의 조선인 전시동원은, 앞서 1934년의 “조선인의 일본 내지 도항을 한층 감소시키는 일이 긴요하다”는 각의결정과는 예외로 실행된 것이다.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이 공표된데에 따라서 일본 내지에서는 징용에 따른 노동동원이 시작됐으나, 조선에서 아직 이 법이 발동되지 않았다. 다만 1939년 7월에 일본 내무성과 후생노동성의 차관연명(次官連名)으로, 1934년 10월 각의결정의 예외로 조선인 노무자를 일본 내지에 이입시키는 방침이 나온 것이다.


즉 다수의 조선인이 타관벌이를 위해 일본 내지로 도항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의결정을 내려졌던 바 있으나 그 예외의 조치로서 조선인 전시동원도 역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알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조선인 전시동원이 단 한 번 예외의 조치로 실행됐으나 이 문이 열리자마자 그전까지는 엄격히 제한되어 일본 내지로 못 건너간 잠재적 도항 회망자들의 눈사태와 같은 도해(渡海)가 발생한 것이다.


일본 내무성 통계에 의하면, 전시동원 시기(1939년부터 1945년)에 통합 약 240만 명(정확히는 237만 8,232명)이 일본 내지로 도항했으나, 그중에 불과 4분의 1의 약 60만 명(60만 4,492명)만이 전시동원(모집, 관 알선, 징용)이었다. 4분의 3인 약 180만 명(177만 3,740명)은 자발적 개별 도항자였다는 것이다.



2 사도킨잔의 조선인 전시노동 


다음으로, 사도킨잔(佐渡金山, 사도금산)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관련 1차 사료는 전시노동이 실시되고 있던 당시와 그 직후에 현지에서 작성된 자료로, 여기에서는 그 중 주된 2점인, 히라이 에이이치 편집 ‘사도광산사 제2(佐渡鉱山史 其ノ二)’와 사도광업소의 ‘반도 노무관리에 관하여(半島労務管理ニ就テ)’를 각각 검토해보겠다.


첫 번째로 소개할 1차 사료는 히라이 에이이치(平井栄一) 편집의 ‘사도광산사 제2(佐渡鉱山史 其ノ二)’는, 1950년도에 정리된 원고로, 다만 출판은 되지 않았다. 히라이 에이이치 씨는, 전 사도광산 채광과장이며, 사도광업소를 경영하던 미쓰비시금속(三菱金属)의 의뢰로 사도광산의 역사를 에도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를 2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한편, 이 자료의 원본은 현재 소재가 불분명하다. 다만 복사본이 사도시 아이카와(相川) 효도(郷土) 박물관과 미쓰비시(三菱)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조차도 비공개 처리되어 있다. 다행히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1월 26일에 모 경로를 통해 목차와 844쪽부터 846쪽에 있는 ‘(9(九)) 조선노무자사정(朝鮮人労務者事情)’이라는 항목의 사진을 입수하여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다만, 사도킨잔의 세계유산 등록에 반대하며 현지조사와 연구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동일 사료의 일부 복사본을 1월 14일에 ‘익명의 일본인 연구자’로부터 입수했다고 한다. 해당 연구자는 2015년 9월, 니가타 현 교육청 문화행정과 세계유산등록추진실에서 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상은 해당 재단이 1월 27일에 진행한 웹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자료집에 수록된 정혜경(아르고(ARGO) 인문사회연구소)의 ‘새로운 자료 소개: 히라이 에이이치 ‘사도광산사’에 따른 것이다. 


사도광업소 내부 자료를 활용하여 쓰인 ‘사도광산사(佐渡鉱山史)’에서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동원된 조선인의 총수 및 각 연별 동원 수, 그리고 종전시의 잔류 수가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쇼와 15년 2월에 조선노무자 98명을 모집하여, 5월에 248명, 12월에 300명, 쇼와 16년 270명, 17년에 79명, 19년에 263명, 20년에 251명, 합 1,519명이 이입했으나, 전쟁과 동시에 잔류인원 1,096명을 송환했다.”


또한 대우에 대해서도 일본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숙소와 식사 등을 제공하는 등 광업소 측이 상당히 신경을 써서 좋은 대우를 했음이 간결하게 쓰여 있다.


“대우임금제도, 가동장려방법(稼働奨励方法) 등은 대체로 일본 내지 노동자와 동일하며, 주로 갱내부로 취업하여 도급단가에 따라 벌이에 따라 임금을 지급했다. 1개월 가동성적에 따라 정근상여를 부여했고, 부양가족의 인원 및 가동일수에 따라 쌀값 보급을 했고, 매년 2회의 근로상여를 교부했으며, 일반적으로 가족이 있는 노동자에게는 사택이 무료대여되었다. 공동 목욕탕 시설이 있었고, 쌀, 된장, 간장 등 여타 생활필수품이 사내 매장에서 값싸게 배급되었다. 또한 가족이 부상 및 병을 앓은 경우에는 치료비 등을 부여했고, 독신자를 위한 기숙사(3곳)는 무료로, 1식 50전(실비 부족분은 회사 부담)의 식사가 제공됐다. 침구사용료는 1개월당 1쌍 50전으로 대여가 가능했고, 연료비와 목욕비는 회사가 부담했다. 기타 작업용품, 의류 및 신발 등 생활용품은 사매 매장에서 값싸게 구매 가능했다. 또한 채소류가 부족하면 광산직영의 농원에서 보급했다.”  


두 번째 소개할 1차 사료는 사도광업소의 ‘반도 노무관리에 관하여(半島労務管理ニ就テ)’이다. 이는 1943년 6월 7일에 사도광업소를 회장(会場)으로 하여, 도쿄광산감독국(東京鉱山監督局) 등이 전국의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광산의 노무 담당자들을 모아 개최한 조선인노무자관리협의회(朝鮮人労務者管理協議会)에 사도광업소가 제출한 보고서다.


이 자료는 재일조선인사(在日朝鮮人史)를 연구하는 나가사와 시게루(長沢秀)라는 연구자가 나라토 시즈오(楢戸静雄)라는 인물로부터 받은 것이다. 1983년에 나가사와 시게루가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12호’에서 발표했으며, 연구자 등이 널리 이용해 왔다. 사도광업소의 내부 자료에 의거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히라이 에이이치의 기술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단, 1943년 6월 이후의 상황은 당연히 적혀있지 않다. 




이 자료로 1940년부터 1942년에 걸쳐 6회, 모두 모집형식으로 합계 1,005명의 조선인 노동자의 이입이 행해졌음이 밝혀졌다. 계약기간은 1940년에 있었던 3번의 모집에서는 3년,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3번에 걸친 모집에서는 2년이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421명이 다양한 이유로 사도광산을 떠났고, 1943년 5월 말에는 584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남아있었다. 떠난 이유도 정리되어 있다. 사망 10명, 도주 148명, 공상소환(公傷送還) 6명, 사상소환(私傷送還) 30명, 불량소환 25명, 일시소환 72명, 전출 130명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불량소환자 25명이다. 쉽게 말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는 조선에 돌려보낸 것이다. 강제노동이었다면 그런 소모적인 일에 신경을 안 썼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일본 내지에서 일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귀환(帰還)’은 일종의 제재(制裁)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평균과 최고, 최저 월수입도 밝혀졌다. 1943년 4월에는 평균 83.88엔, 최고 169.95엔(가동 28일), 최저 4.18엔(가동 1일), 5월 평균 80.56엔, 최고 221.03엔(가동 28일), 최저 6.75엔(가동 2일).  성과급으로 임금이 계산되었기에 최고치와 최저치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당시 도쿄의 공립초등학교 교원의 초봉이 50엔에서 60엔 정도였으므로, 이는 꽤 높은 임금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과연 이것을 두고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3 니가타 현과 아이카와 마치의 ‘강제연행’ 기술에 대하여 


덧붙여, 일본 국내에서도 사도킨잔이 ‘강제노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언론이나 정당, 또는 학자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도록 하겠다.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은 2월 2일, 필자의 산케이신문 ‘정론(正論)’ 기고문을 공개 비판한 고가 고(古賀攻) 전문편집위원의 칼럼 “‘필사’의 사도킨잔(「捨て身」の佐渡金山)’”을 게재했다. 고가 고 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도킨잔이 ‘강제노동’의 피해지였다는 한국측 반발에 대해, 조선 연구자인 니시오카 쓰토무 씨는 1월 26일자 산케이신문을 통해 킨잔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해 “응모가 쇄도했다”,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는 옛 아이카와마치(相川町)가 편찬한 ‘사도아이카와의 역사・통사편(佐渡相川の歴史・通史編)’(1995년)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은 1월 29일 담화를 통해 같은 책에 있는 “사도광산의 비정상적인 조선인 연행”이라고 쓰인 부분을 인용하며, 부(負)의 역사에도 눈을 돌리라고 설파했다. 아이카와마치사(相川町史)에 앞서 간행된 ‘니가타 현사·통사편 8·근대 3(新潟県史・通史編8・近代3)’ (1988년)에는 더 직접적인 기술이 있다. “쇼와 14년에 시작된 노무동원계획은, 명칭이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변화한 반면,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에 있어서는 동질”이었다고 한다. 지자체의 자체적인 편찬물인 만큼,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일본 정부로서는 불편한 공적 통사(公的通史)인 것은 분명하다.“


칼럼에서 언급된 일본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은 1월 29일자 담화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 사도킨잔에서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조선인의 강제노동이 행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니가타 현이 편찬한 ‘니가타 현사・통사편 8・근대 3’은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을 지적하고, 사도의 옛 아이카와 초가 편찬한 ‘아이카와의 역사 통사편・근현대(相川の歴史 通史編 近・現代)’는 킨잔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을 상술한 뒤, “사도광산의 비정상적인 조선인 연행은 전시산금국책(戦時産金国策)으로 시작되어, 패전으로 겨우 끝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용서받지 못한다.“


두 분의 주장에 반론하고자 한다. 역사에 대해 논의할 때 우선 중요한 것은 1차 사료, 즉 해당 시기에 작성된 문헌, 또는 그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이다. “강제노동” 혹은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은 당시에는 없었다. 일본의 조선 통치가 끝나고 20년 정도가 더 지난 1960년대부터 일본의 좌파 학자들이 “강제노동” 혹은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해, 1990년대경 한국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이 표현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의한 ‘역사적 평가’인 것이다. 학설(学説)이라고 해도 좋다.


고가 고 씨와 시이 가즈오 씨가 인용한 ‘니가타 현사’와 ‘사도아이카와의 역사’ 중,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갔다”, “비정상적인 조선인 연행”이라는 기술은, 어디까지나 해당 저서를 집필한 학자의 학설에 불과하다. 그것도 80, 90년대라는, 해당 문제의 연구가 좌파 진영에 의해 장악됐던 시절의 낡은 학설인 것이다.




이 낡은 학설에 대해 필자는 내무성 통계(内務省統計)라는 1차 사료를 인용하여 산케이신문의 1월 26일자 칼럼에서 “조선에서 마치 눈사태와 같은 타관벌이(出稼ぎ)의 도항이 이어졌는데, 이들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사업장에 질서있게 보내려 했던 것이 전시동원이었다. 이는 ‘강제연행’, ‘강제노동’ 등과는 상반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여 낡은 학설을 부정했다.


필자는 새로운 학설을 2005년에 출판한 ‘일한 ‘역사문제’의 진실(日韓「歴史問題」の真実)’(PHP연구소)에서 발표했고, 그 이후로도 연구를 이어가 2019년에 ‘날조된 징용징용공 문제(でっちあげの徴用工問題)’(소시샤(草思社))(한국어판 제목은 ‘날조한, 징용공없는 징용공 문제’), 2021년에 출간한 ‘조선인 전시노동의 실태(朝鮮人戦時労働の実態)’(산업유산국민회의)에서도 해당 학설을 거듭 전개했다. 학문은 새로운 연구를 통해 진보해 간다. 필자의 학설을 부정하기 위해서 단순히 낡은 학설을 재인용하여 가져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또한 필자는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만을 근거로 강제노동이 없었다고 서술한 바가 없다. “응모가 쇄도했다”라는 주장은,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에 수록되어 있던 조선에 노동자를 모집하러 간 스기모토 소우지(杉本奏二) 씨의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증언은 1차 사료다.


아울러 필자의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사도아이카와의 역사’가 아닌, 사도광업소의 ‘반도노무관리에 대하여(半島労務管理ニ付テ)’(1943년)를 근거로 들었다. 이는 1943년 6월에 사도광산에서 열린 ‘조선인노무자관리 연구협의회(朝鮮人労務者管理研究協議会)’에 제출된 것으로, 역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1차 사료다.


고가 고 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필자는 1월 26일의 산케이신문 칼럼에서 히라이 에이이치의 ‘사도광산사(鉱山史)’도 근거로 들었다. 이 또한 일급의 1차 사료다. 


즉, 필자는 1차 사료를 근거로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강제노동’을 주장하는 세력은 필자의 새로운 학설에 전면적인 반론을 피하고, 단지 낡은 학설이 니가타현과 사도 시의 서적에서 발견된 것을 두고 왈가왈부할 뿐이다. 이처럼 일본 국내의 무지한 세력을 상대로 확실하게 반박을 하고, 또 한국과 국제사회에도 사도킨잔은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사료를 통해 면밀히 홍보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어떻게든 쟁취해야 할 것이다.


4 한국의 전문가, 정혜경 씨의 ‘강제노동’설 검토 


현재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인 정혜경 씨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연구원으로 오래 근무하여, 전시동원에 관한 조사연구를 이어왔다. 한국 측의 강제노동파를 대표하는 연구자라고 할 수 있다. 





정혜경 씨는 2019년 12월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미쓰비시(三菱)광업(주) 사도(佐渡)광산을 중심으로 -’(이하 [정1]라 한다)를 출간했다.


또한, 동 재단이 1월 27일에 개최한 학술 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佐渡)광산과 강제동원 역사 왜곡’에서는 ‘자료를 통해 본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이하 [정2]라 한다)라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세미나의 자료집에도 이를 게재했다. 


정혜경은 일본 좌파 연구자인 히로세 테이죠(広瀬貞三) 씨의 2000년도 논문 (‘사도광산과 조선인 노동자 1939~1945(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 1939~1945)’, ‘니가타 정보대학 정보문화학부 기요(新潟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2000년 3월에 게재, 이하 [히로세])에 대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필자가 분석한 결과, 정혜경은 ‘강제노동’설의 근거로서 이하의 ①부터⑬을 내세우고 있다. 


① 일본인의 규폐감염을 막기 위해 조선인을 동원했다

② 위험한 갱내 노동은 조선인이 담당했다

③ 도급제도(성과급여제)는 조선인에게 불리했다

④ 공제가 많아 실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다

⑤ 계약 종료 후에도 계속 취업시켰다

⑥ 도주가 많았다

⑦ 동원된 조선인의 증언

⑧ 사도에서는 전시동원정책이 실행되기 전부터 강제동원이 이루어졌다

⑨ 모집도 일종의 강제동원

⑩ 모집, 관 알선, 징용 모두 ILO조약 위반

⑪ 조선인 사망률이 높았다

⑫ 공탁받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⑬ 임금, 대우 및 지급방법을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정했다


이런 주장들 모두가 기반 사실관계부터가 흐리멍덩하여 쉽게 반론이 가능한 내용이거나, 또는 개념 정리도 안 된 것이 대다수다. 필자가 간단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하 ①~⑬을 소개한다.


한편, 이중에서 ①~⑤는 아예 히로세 테이죠의 논문에 기재된 주장을 거의 고스란히 베낀 것이기도 하다. 일본인 좌파 연구자의 주장이 한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필자의 주장이 이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히로세 테이죠는 연구자로서 그래도 신중한 표현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혜경은 난폭한 단정적 어조로 히로세 테이죠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가령, 히로세 테이죠는 ①에서 “만약 그렇다면”이라는 유보를 두었고, ③, ④에서는 “여겨진다”라고 하면서 단정을 회피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정혜경은 그러한 부분을 모두 삭제하고서 마치 사실인 마냥 적고 있다. 




① 일본인의 규폐감염을 막기 위해 조선인을 동원했다 


[히로세] “사도 광업소가 조선인 ‘모집’을 실시한 이유에 대해서 당시의 노무과원은 ‘내지인 갱내 노무자 중 규폐 환자가 많아 출광 성적이 원활하지 못 했고, 일본 내지의 젊은이들이 줄줄이 군대로 징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노동력 부족을 메우는 것이 아닌, 일본인 규폐 감염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7쪽) [밑줄은 니시오카 쓰토무. 이하 동일]


[정1] “일본인의 규폐 감염을 방지하고 징병으로 인한 인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이유로 조선인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96쪽) [이하 쪽수는 정혜경 보고서 [정1] 한국어판의 쪽수임.]


히로세 테이죠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이라고 하면서 유보하고 있지만, 정혜경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아예 단정을 하고 있다. 히로세 테이죠는 ‘아이카와마치사’에 수록되어 있는 모집 담당자 스기모토 소우지 씨의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스기모토 소우지 씨의 증언은 최초의 모집 시기의 기술이 불투명하다는 점, 동원 총수가 올바르지 않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사업소에는 규폐 감염을 막기 위해 방진(防塵)대책을 실행한 병원도 있었다. 규폐는 일반적으로 5년 이상 분진을 지속적으로 흡입했을 경우 발병되며, 조선인 근로자 다수가 규폐에 감염됐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② 위험한 갱내 노동은 조선인이 담당했다


[히로세] “조선인의 비율이 높았던 분야는 ‘운반부’, ‘반암부’, ‘외부 운반부’, ‘지주부’이며, 주로 갱내노동이다. 일본인의 비율이 높았던 곳은 ‘기타’, ‘공작부’, ‘잡부’, ‘제광부’이다. 일본인이 100% 맡은 ‘기타’ 분야는 선광부를 의미한다. 이로써 운반부, 착암부, 지주부 등 위험한 갱내 노동을 조선인들이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10쪽)


[정1] “조선인은 착암부와 운반부, 외 운반부 등 기술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위험한 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99쪽)


조선인 근로자들이 갱내 노동을 한 것은 징병으로 일본 내지 젊은 남성들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며, 차별의 결과가 아니다. 또한 성과급 제도하 갱내공은 의욕만 있으면 높은 보수를 받았기에, 단기간에 돈을 벌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조선인 근로자들에게도 이익이었다.


③ 도급제도(성과급여제)는 조선인에게 불리했다


[히로세] “이전에 농민이었던 조선인에게 있어 기술이 요구되는 ‘도급제도’는 일본인에 비해 불리했다고 여겨진다.” (11쪽)


[정1] “농민 출신의 조선인들에게 기능을 요구하는 청부제도(도급제도)는 일본인에 비해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101쪽)


히로세 테이죠는 “여겨진다”라고 하고 있지만, 정혜경은 “...다른 점이다”라고 하며 역시 아예 단정을 짓고 있다. 평균 월수입은 80엔 이상, 최고 월수입은 200엔을 넘는 달도 있었으므로 불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④ 공제가 많아 실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히로세] “임금에서 노동에 필요한 도구비용 등이 공제됐기 때문에 실제로 손에 남는 임금은 극히 적었다고 여겨진다.” (11쪽)


[정1] “임금이 노동에 필요한 도구비용 등으로 공제되었으므로 실제 손에 들어온 입금액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101쪽)


히로세 테이죠는 “여겨진다”라고 하고 있으나 정혜경은 “...다는 점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사료적 근거가 없다. 사도광산에서는 공제에 관한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일본질소에무카에탄광(日本窒素江迎炭鉱)에서는 평균 월수입 100엔이었고, 각종 공제를 빼고도 실수령액이 42엔이었다(이우연 씨가 집필한 ‘반일종족주의’ 제1부 7장 90~91쪽)


⑤ 계약 종료 후에도 계속해서 취업시켰다


[히로세] “‘모집’ 기간은 당초 3년이었기 때문에, 사도 광업소에서는 1942년 1월부터 ‘모집’ 기한이 종료되는 조선인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도 광업소의 방침은, 유무(有無)를 불문하고 ‘여하튼 전원 계속 취로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후 각각 조선인의 현지 가정 상황, 병약자 등 귀선(帰鮮) 또는 일시 귀선이 불가피한 자들에 대해서는 조선 현지의 관변 및 관할 경찰서와 타협하여 적시 송환할 것’이라고 했다. 사도광업소에서는 ‘지속 취로 절차를 수료한 자에게는 적당한 시기에 각 개인에게 표창장과 상응하는 장려금을 수여’함으로써, 조선인의 취로 ‘지속’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집’ 형식이면서도 실체는 강제노동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12쪽)


[정1] “1939년 2월에 할당모집으로 사도광산에 들어와 3년의 기한을 채운 광부들은 1942년 1월에 기한을 채웠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광산 측에서는 ‘전원계속취로’ 방침을 정하고 ‘조선 현지 가정 사정이나 병역자 등 일부 일시귀선이 부득이한 경우는 조선 현지 관청과 경찰서와 협의한 후 송환’하기로 했다. 일부 일시귀선대상자가 아닌 경우에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계속취로수속수료자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개인 표창과 상당하는 장려금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조선인을 사도섬에 묶어두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 바로 강제이다.” (111쪽)


지속 취업은 강제가 아니라 이익 유도에 의해 실현되고 있었다. 포상금, 가족 부양, 조선아동을 위한 전문교사 배치 등 사업장은 지속적인 취업을 권장하기 위해 다양한 이익 유도를 하고 있었다. 사도광업소는 조선인 1,500명을 동원해 종전 시 1,000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3분의 1인 500명은 지속 취업하지 않았다. 이 통계야말로 강제성이 없었다는 증거다.


⑥ 도주가 많았다


[히로세] “조선인은 도망을 통해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전술한 표2와 같이, 1940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3년 4개월 사이에 도망자는 148명으로, 전체의 14.8%에 달했다. 1939년 2월 1진 조선인은 사도에 오기 전 ‘시모노세키와 오사카에 도착한 뒤 도망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4쪽)


[정1]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왜 이렇게 탈출을 시도했는가. 그리고 회사 측은 경찰과 직업소개소 등 촘촘한 색출 시스템을 가동해 잡아들였는가. 이 점이 바로 강제동원 부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점과 차이점이다. 2019년 현재 일부 경제학자들은 ‘조선인 강제동원은 없었다’ ‘조선인은 자유로운 취업 을 했고, 돈을 벌었다’는 주장을 출판물과 개인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그런데 강 제동원 부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로운 상태의 조선인들’은 이렇게 늘 탈출을 시도했고, 회사와 일본 공안당국은 탈출자들을 잡아들이려 노력했다. 고노마이광업소에서도 사도광산에서도 하시 마광산에서도 어디서도 있었다. 잡아들인 탈출시도자들에게는 린치와 폭행을 가했다. 서류에는 ‘도주’라고 기재했다. ‘퇴사’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 상이다. 바로 인신적 구속, 강제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는 사례이다.” (52쪽)


[정1] “[표 16]에서 ‘도주’라는 항목을 볼 수 있다. 도주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도주가 입산 전후 어느 과정에서 이루어졌는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탈출’은 부관연락선을 태워서 일본에 도착하기 전,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사도가 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입산 이후에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위 ‘도주’ 사례를 입증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1939년 2월 제1진이 입산할 당시에는 ‘시모노세키나 오사카에 도착한 후 도망한 자가 많았’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퇴사’가 아닌 ‘도주’라는 의미는 조선인 광부들이 마음대로 현장을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강제성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97쪽)


모집 도중에 달아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도망의 이유를 가혹한 근로환경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더 나은 대우를 추구하여 이직 목적의 도주가 많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①~⑥은 히로세 테이죠 씨의 주장을 정혜경이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다. 특히 ①~⑤는 히로세 논문의 주장을 [정1]에서 거의 고스란히 옮겨 쓰고 있다. 다만, 히로세 테이죠 씨는 ①에서 “만약 그렇다면”이라고 유보를 붙였고, ③,④에서 “여겨진다”라고 하면서 단정을 피해 기술하고 있지만, [정1]에서는 그 부분이 모두 삭제되고 마치 사실이었던 것처럼 단정되고 있다.


이하 ⑦〜⑬은 히로세 테이죠의 논문에 없는 주장으로, 정혜경이 독자적으로 강제노동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이다.


⑦ 동원된 조선인의 증언


[정2] “‘강제연행의 문서가 있다면 내놓으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둘러싼 공박에 늘 빠지지 않는 가해자 측의 수사이다. 그들은 ‘실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피해자는 공적 문서를 남길 수 없다’는 점을 약점으로 삼고 공격의 빌미로 활용한다. 이런 전략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해오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실행했다면 히틀러의 명령이 남긴 문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문서는 한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피해자는 공적 문서를 남길 수는 없으나 기록을 남길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한국 정부가 생산한 기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험자의 구술이다.” (26쪽)


정 씨는 근거 없이 조선인 전시동원을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는 사실에 반하는 용납할 수 없는 비방중상(誹謗中傷)이다. 또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도 홀로코스트를 유일무이한 악독한 범죄로 여기기에, 조선인 전시동원이나 위안부 제도 등에 대해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명하고 있다.


[정1] “1919년 12월 20일 충남 논산군에서 태어나 1940년 11월 사도에 동원되었던 임태호가 주인공이다. 1997년 9월 사망할 때까지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川崎市)에 살았던 임태호는 1997년 5월 사망하기 직전에 길지 않은 구술을 남겼다. 이 구술은 현재 유일한 사도광산 생존자의 구술 기록이다.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 ‘조선인강제연행조사의 기록-관동편(朝鮮人強制連行調査の記録-関東編)’ 카시와쇼보(柏書房) 2002년)” (81쪽)


정 씨가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일본에서 2002년에 출판된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조선인강제연행조사기록-관동편(朝鮮人強制連行調査の記録-関東編)에 수록된 임태호(林泰鍋) 씨의 증언이다. 이 임태호 씨의 증언에는 의문점이 많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하 그 의문점을 정 씨의 기술에 입각하여 지적한다. 


우선 첫 번째 의문은 1940년 모집 시기에 사도로 건너간 임태호가 '징용'으로 동원됐다고 증언한다는 점이다. 정 씨가 요약한 임태호의 증언부터 살펴보자.


[정1] 임태호는 1940년 11월 ‘모집’이라는 형태로 젊은 동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 땅을 밟았다.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좁은 배에는 조선인으로 넘쳐났다. 니가타현 사도섬에 도착하니 산속 오지의 산 정상에 함바(飯場. 노동자숙소)가 있었다. 아이카와(相川)라는 곳이었다. 갈 때는 ‘모집’이라고 해서 ‘자유 모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해서 ‘징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역시나 정 씨도 이 증언은 고스란히 믿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다음과 같은 억지 해설을 덧붙였다.


[정1] “임태호는 ‘자유 모집’으로 알고 갔는데, 현지에서 ‘징용’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으나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임태호가 동원된 1940년 11월에 입산한 조선인 광부들은 모두 ‘할당모집’이라는 경로로 동원되었다. 임태호의 구술은 ‘자유로운 상태의 노동자’로 알고 갔으나 ‘강제적 상태의 노무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법적인 경로는 할당모집이었으나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강제동원은 ‘징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81쪽)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시작됐다. 1940년 11월의 시점에서는 모집이었다. 정 씨의 해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두 번째 의문은 숙소에서 작업장까지 걸어서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점이다.


[정1] “함바에서 일하는 곳까지는 걸어서 1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르내리는데 고생스러운 거친 길이었다.” (80쪽)


필자의 현지 조사 결과, 조선인 기숙사와 작업 현장의 거리는 걸어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애초에 그렇게 먼 곳에 숙소를 왜 짓는다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기술이다.


[정1] “매일 같이 낙반 사고가 있어” (80쪽)


매일 낙반사고가 있었다면 당연히 기록이 있을 텐데, 그런 기록은 없다. 사도킨잔은 단단한 암반으로 이뤄져 있어 낙반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로 숨진 조선인 근로자가 1943년 5월까지 10명이 있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정중한 절차를 거쳐 유골은 가족의 품에 돌아갔다. “근속 3개월 이상 및 그에 상응하는 자는 단체 생명보험에 가입시켜 재적 중 보험료는 일체 회사가 부담하고, 만일 불행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 보험금 3백엔을 증액한다”(사도광업소의 반도노무 관리에 관하여)고 되어 있으며, 사망했을 시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한편, 임 씨 본인도 사고로 크게 다쳤는데 병원에 가지 못한 채 방치됐다고 말했다.


[정1] “그도 지하에서 작업 중에 하시고(발판)가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지하에서 밖으로 실려 나갈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든 곳은 병원이 아니라 함바의 이부자리였다. 허리를 강하게 맞아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열흘 정도 누운 채 지냈다. 간신히 일어날 수 있게 되자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병에 걸려도 이틀 이상은 쉴 수 없는데, 열흘이나 일하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80~81쪽)


광업소는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해서 병원까지 두고 있었다. 일손이 모자라 조선인 노동자를 불렀으므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병원 이용을 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도광업소의 앞의 자료에 따르면 한 달에 며칠밖에 일하지 않는 조선인 노동자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고, 보합제(歩合制) 때문에 급료는 나오지 않지만 쉬고 싶으면 쉴 수 있었던 것이다.


⑧ 사도에서는 전시동원정책이 실행되기 전부터 강제동원이 이루어졌다


[정1] "사도광산은 ‘조선인 동원 개시에 앞서, 1939년 2월부터 조선인 동원을 시작했다. 그 이유는 사도광산 측이 조선인을 도급제도에 따라 동원하여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도광산에서는 정부 당국이 정책을 내기 전부터 강제동원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17쪽)


’아이카와마치사‘에 수록되어 있는 스기모토 소우지 씨의 발언을 근거로 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그의 발언은 사도광산소의 사료가 부정하고 있다.


⑨ 모집도 일종의 강제동원


[정1] “할당모집은 강제동원이 아닌가. 강제동원에 해당한다. 당국이 실시한 강제동원은 인적·물적·자금동원이고, 인적동원은 노무자와 군인·군무원·일본군위안부피해자가  있다. 할당모집은 노무자의 동원 경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강제동원에 해당하는 피해유형이다.” (96~97쪽)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근거가 희박한 낡은 학설이다.


⑩ 모집, 관 알선, 징용 모두 ILO조약 위반


[정1]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라는 법적 근거에 따라 총동원시스템을 마련하고 제국 일본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인적·물적· 자금을 총동원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스스로 비준한 국제노동기구의 노동 협약 29호를 위반한 것이다. ” (97쪽)


ILO 29호 조약에서는 전시노무동원은 강제노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동 조약 2조는 다음과 같이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제 2 조

1. 이 조약에 있어 ‘강제노동’이라 함은 어떠한 이가 처벌의 위협하에서 강요받거나 또는 임의로 제공하는 것이 아닌 모든 노무를 말한다. 

2. 다만, 이 조약에서 ‘강제노동’이라고 할 경우에는 다음 각호는 포함되지 아니한다.

(a) 전적으로 군사적 성격의 작업에 대해서 병역의무법에 의해서 강요되는 노무

(b) 완전 자치국 국민의 통상적인 공민의 의무를 구성하는 노무

(c) 법원 판결의 결과로 강요되는 노무. 다만, 공공기관의 감독 및 관리하에서 행해지며, 사인, 회사 또는 단체에 고용되거나 또는 그 지휘에 복종하는 경우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d) 긴급한 경우, 즉 전쟁의 경우나 화재, 홍수, 기근, 지진, 심한 전염병이나 가축 전염병, 짐승이나 곤충류 혹은 식물류 등 해로운 물질에 의한 침입과 같이 재해나 그러한 우려가 있는 경우 및 일반적으로 주민의 전부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행복을 위태롭게 하는 일체의 사정에 의해 강요되는 노무.”


2조 (d)항의 전쟁의 경우...강요되는 노무에 조선인 전시노무동원은 물론 포함된다.


⑪ 조선인 사망률이 높았다


[정1] “10명의 사망피해는 당시 일본지역 탄광과 광산 노무자의 사망률과 비교해보면 높은 비율이다. 제2장 제2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전 지역 조선인 노무자 사망률은 0.9%(1939.10~1942.10 기준)이고,” (97쪽)


1,005명 중 10명은 1%, 평균인 0.9%와 거의 유사하다.


⑫ 공탁받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정1] “사도광산 조선인 1,140명의 공탁금액 231,059엔 59전이다. 이 기 록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최소한 1,140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의 급여와 저축, 각종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고 공탁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공탁기록에 는 개인별 정보가 없어서 개별성도 확인할 수 없다. 조선인 광부들이 저축통장에 돈이 쌓일 것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졌던 노동의 대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103쪽)


1965년의 일한(日韓)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은 한국 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서 미지불 급여와 저금 등을 환급했다. 


⑬ 임금, 대우 및 지급방법을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정했다


[정1] “임금 수령 여부나 임금의 과다 여부는 강제성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전시체제기 노무자들은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 국가권력이 제정한 법에 따라 자본가와 계약 관계에 따라 노동조건을 확보하거나 노동자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임금을 비롯한 모든 처우는 부리는 자들이 일방적으로 정했고, 지급 방식도 일방적으로 운영했다. 그런데도 2019년 현재 국내 강제동원 부정론자들은 임금을 받았다는 점을 강제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당시 체제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주장이다.” (103쪽)


어느 나라의 전시노무동원에 있어 노동 조약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는가. 합법적인 전시노무동원은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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