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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칸세이론] 사도금광, ‘강제노동’ 주장하는 이들은 1차 자료부터 보라

“사도킨잔에서 조선인이 강제노동을 강요받았다는 한국 측 주장의 근간은 사실에 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일본)로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 본 칼럼은, 일본의 유력 시사잡지 ‘겟칸세이론(月刊正論)’ 2022년 4월호에 게재된, 모라로지 연구소(モラロジー研究所) 교수이자 레이타쿠(麗澤) 대학 객원교수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의 기고문 ‘‘강제노동’ 주장하는 이들은 1차 자료부터 보라(「強制労働」派は 一次史料を読め)’(원제)를, ‘겟칸세이론’ 측의 허락을 얻어 완역게재한 것이다. (번역 : 요시다 켄지)



사도금광, ‘강제노동’ 주장하는 이들은 1차 자료부터 보라

(「強制労働」派は 一次史料を読め)



지난해 12월 28일, 일본 문화심의회가 ‘사도킨잔(사도금산)’(니가타 현)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 후보로 선정했다. 그러나 일본 문화청은, 이 선정이 추천을 결정한 것이 아닌 향후 일본 정부 내에서 올해의 추천 여부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그 전후로 한국에서는 문재인 정권, 언론, 학자 및 반일 운동가들이 사도킨잔은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이었으므로 세계문화유산에 적합하지 않다며 일본 정부의 추천신청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권도 좀처럼 추천을 결정하지 않았고, 일부 일본 언론은 올해 추천은 보류하는 방안을 조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니가타(新潟) 현과 사도(佐渡) 시,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양심파 정치인, 그리고 필자를 포함한 학자 및 언론인이 추천 결정을 강력히 요청했고, 기시다 총리는 결국 제출기한 직전인 1월 28일에서야 올해 안으로 등록신청을 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미처 추천을 결정하지 못한 이유가 “한국에 대한 외교적 배려는 절대 아니다”(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상, 1월 2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의원에 대한 답변)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국이 국가 차원에서 등록을 반대할 것이라는 점은 애초부터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정부, 그리고 니가타 현과 사도 시가 한국발 사실무근 주장에 대항하여 국제적인 정보 발신을 할 수 있을는지 현실적인 문제를 검토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본건 등록에 있어서는 다양한 논의나 의견이 있는 것은 주지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한국의 주장이 부당하다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하야시 외상은 “사도킨잔에 대한 한국 측의 독자적인 주장에 대해 일본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한국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 “한국 내에서 사실에 반하는 보도가 다수 나오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고, 지속해서 우리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설명할 것”이라며 한국 측 주장에 반박한 사실을 강조했다.


다만, 이것만으론 부족한 측면이 있다. 총리도 외상도 한국 측 주장의 어느 부분이 구체적으로 사실에 반하는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명확하게 발신한 전력이 없는 것이다. 작년 4월 27일, 스가 요시히데 내각은 “‘모집’, ‘관 알선’ 및 ‘징용’에 따른 노무에 대해서는 일제히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상의 ‘강제노동’에는 해당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들을 ‘강제노동’이라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각의결정을 내린바 있다. 


태평양전쟁 이전에 일본도 가맹했던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Forced Labour Convention)’에서도 전시노동동원은 동 조약이 금하는 ‘강제노동(Forced Labour)’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기시다 총리와 하야시 외상은 “사도킨잔에서 조선인이 강제노동을 강요받았다는 한국 측 주장의 근간은 사실에 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일본)로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라고, 짧아도 좋으니 확실하게 대외 발신을 했어야 했다.  


역사전쟁(歴史戰)에 대한 정부의 대응


기시다 총리는 올해의 신청을 밝히는 한편, “타키자키 시게키(滝崎 成樹) 내각관방부장관보를 필두로, 관련 성청(省庁)이 참여할 세계문화유산 등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설치하여, 역사적 경위를 포함한 다양한 논의에 대응하기 위해 성청을 넘나드는 대처를 강화하겠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민간 전문가의 지견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가고자 합니다”라고 언급하면서 사도킨잔의 등록 실현을 위해 일본 정부가 일체가 되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본지(‘겟칸세이론(月刊正論)’) 1월호에서 소개한 국가기본문제연구소(国家基本問題研究所)의 정책제언 “수상 관저의 부장관보실에서 전개해 온 ‘사실관계에 입각한 체계적인 역사인식 국제홍보’를 지속 및 강화하라”에서도 언급한 바, 제2차 아베 정권과 스가 정권에서는 총리관저의 외정(外政)을 담당하는 내각관방 부장관보실이 이른바 역사전쟁을 담당하여 역동적인 활동을 추진해 왔다. 


제도권 영역에서 역사전쟁을 담당하는 총리 보좌관(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기하라 미노루(木原稔) 중의원 의원)이 배치되어, 부장관보실과 함께 정권이 일체가 되어 싸워 왔다. 기시다 정권 출범 후 부장관보실은 유지됐으나, 역사전쟁을 담당할 보좌관이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필자는 앞서 언급한 제언에서 아베 정권과 스가 정권이 구축한 정부 차원의 대응 체제를 유지 및 강화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기시다 총리는 1월 2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의원이 “제2차 아베 내각에서는 총리의 지시로 내각관방 부장관보실의 역사 홍보가 시작됐고, 스가 내각도 이를 계승했습니다. (중약) 기시다 내각에서도 내각관방 부장관보실은 역사인식의 국제 홍보를 맡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제 내각에서도 역사인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아베 내각 이래의 체제를 계승하고 있으며, 내각관방 부장관보실을 중심으로 정부 차원에서 국제 홍보를 포함, 역사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고자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해당 답변으로 기시다 내각에서도 역사전쟁을 치를 일본 정부내 체제가 확고히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다키자키 내각관방 부장관보를 필두로... 태스크포스를 설치해, (사도킨잔의) 역사적 경위를 포함한 다양한 논의에 대응한다”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기시다 정권에서 추천 결정을 보류하던 1월 26일, 산케이신문의 ‘정론(正論)’에, 민간 전문가로서 사도킨잔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한국의 주장은 사실에 반하므로 반박을 하라는 졸문을 기고했다. 아울러,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올해 2월 2일자에 산케이신문, 3일자에는 니가타일보에 동일한 논지의 의견광고를 게재했다. ‘정론’과 의견광고에서는 향후의 논쟁에 미리 대비하여 근거로 삼은 자료를 명확히 제시했다.


조선인 전시노동의 전체상(全体像)


여기서 우선, 조선인 전시노동의 전체상에 대해 설파하고자 한다. 조선인 노동자의 전시동원은 1939년 9월부터 시작됐다. 실은 그 5년 전인 1934년 10월에 ‘조선인의 일본 내지(內地) 도항을 한층 감소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각의 결정이 내려졌었다.  


이 무렵에는, 조선에서 일본 내지로 도항(여행)을 희망하는 자는 거주지 관할 경찰서나 경찰관 주재소에 출두하여서, 취직처의 확실성 여부, 또 여비 이외 10엔 이상의 여유금 소지 여부, 그리고 브로커에 의한 모집이 아닌 것을 증명한 후에, 부산 수상경찰에 제출할 ‘소개장’까지 받아야 했다. 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일본 내지로의 도항은 불가했다. 하지만 각의결정이 내려지고 이 ‘도항 소개장’의 취득이 어려워졌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6년간 무려 72만 7,094명의 일본 내지 도항 출원이 불허되었다. 전시동원이 시작되기 전, 조선에서는 다수의 타관벌이 희망자가 도항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규 절차를 밟지 않은 부정 도항자도 다수 있었다. 내무성 통계에 따르면, 1930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일본 내지에서 부정 도항자로 발각된 자는 3만 9,482명, 그 중 3만 3,535명을 조선으로 ‘강제송환’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전시동원이 시작된 1939년부터 1942년까지의 4년간, 2만 2,800명이 일본 내지에서 부정 도항으로 적발돼 1만 9,250명이 전시동원 시기였음에도 조선으로 강제송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또한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1939년 9월에 시작된 ‘모집’ 형식의 조선인 전시동원은, 1934년의 ‘조선인의 내지 도항을 한층 감소시킨다’라는 각의결정을 예외로 실행된 것이다.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이 공표된 것을 받아 일본 내지에서는 징용에 따른 노동동원이 시작됐으나, 조선에서 아직 발동되지 않았고, 1939년 7월에 내무성과 후생노동성의 차관연명(次官連名)으로 1934년 10월의 각의결정을 예외로, 조선인 노무자를 일본 내지에 이입하는 방침이 나온 것이다.


이를 방기하면 다수의 조선인이 타관벌이를 위해 일본 내지로 도항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의결정을 내렸으나 예외의 조치로서 조선인 전시동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알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단 한 번 예외의 조치로 실행됐으나, 문이 열리자 지금까지 엄격히 제한되어 일본 내지로 못 건너간 잠재적 도항 회망자들의 눈사태와 같은 도해(渡海)가 발생한 것이다. 


일본 내무성 통계에 의하면, 전시동원 시기(1939년부터 1945년)에 통합 약 240만 명 (정확히는 237만 8,232명)이 일본 내지로 도항했으나, 그중에 불과 4분의 1의 약 60만 명(60만 4,492명)만이 전시동원(모집, 관 알선, 징용)되었고, 나머지 약 180만 명(177만 3,740명)은 자발적 개별 도항자였다.  


사도킨잔의 조선인 전시노동


다음으로 사도킨잔에서의 조선인 전시노동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1차 사료, 즉 전시노동이 실시되고 있던 당시와 그 직후에 현지에서 작성된 자료, 당시 관계자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존재한다. 




우선 히라이 에이이치(平井栄一) 1편 ‘사도광산사 제2(佐渡鉱山史 其ノ二)’는 1950년에 정리된 원고로 다만 출판은 되지 않았다. 히라이 에이이치 씨는, 전 사도광산 채광과장이며, 사도광업소를 경영하던 미쓰비시금속(三菱金属)의 의뢰로 사도광산의 역사를 에도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2권으로 정리했다. 필자는 최근 이 사료를 열람할 기회를 얻었다. 원본과 복사판이 현존하나 양쪽 모두 비공개 처리되어 있다. 필자가 회장을 맡고 있는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1월 26일에 모 루트를 통해 목차와 844쪽부터 846쪽에 있는 ‘(9(九)) 조선노무자사정(朝鮮人労務者事情)’이라는 항목의 사진을 입수하여 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하지만, 사도킨잔의 세계유산 등록에 반대하며 현지조사와 연구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동일 사료의 일부 복사본을 1월 14일에 ‘익명의 일본인 연구자’로부터 입수했다고 한다. 그 연구자는 2015년 9월, 니가타 현 교육청 문화행정과 세계유산등록추진실에서 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상은 해당 재단이 1월 27일에 진행한 웹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자료집에 수록된 정혜경(아르고(ARGO) 인문사회연구소)의 ‘새로운 자료 소개: 히라이 에이이치 ‘사도광산사’‘에 따른 것이다. 


사도광업소의 내부 자료를 활용하여 쓰여진 ‘사도광산사(佐渡鉱山史)’에서는 지금껏 몰랐던 조선인의 총 동원자 수 및 각 연도별 동원자 수, 그리고 종전시의 잔류자 수가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쇼와 15년 2월 조선노무자 98명을 모집하여, 5월에 248명, 12월에 300명, 쇼와 16년 270명, 17년에 79명, 19년에 263명, 20년에 251명, 합 1,519명이 이입하였으나, 전쟁과 동시에 잔류인원 1,096명을 송환했다.”


더불어 대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임금은 일본 내지인과 동일

- 채굴량에 따른 성과급 지불 

- 가동성적에 따른 정근상여와 연 2회의 근로상여를 지급

- 가족 소유자는 사택이 무료. 쌀, 된장, 간장 등 생필품은 저렴하게 제공

- 독신자는 기숙사, 공연비, 목욕비 무료. 하루 50전(실비 부족분은 회사가 부담)으로 식사 제공, 회사 직영의 농원에서 야채 보급

- 전액 회사 부담으로 생명보험에 가입

- 영화 시사회, 강연회, 소풍, 운동회 개최 

- 기숙사에 잡지, 조선장기, 축음기, 라디오 등이 배치


신경 써서 좋은 대우를 한 것을 가늠할 수 있다.   


두 번째 소개할 1차 자료는 사도광업소 ‘반도 노무관리에 대하여(半島労務管理ニ就テ)’이다. 이는 1943년 6월 7일에 사도광업소를 회장으로 하여, 도쿄광산감독국(東京鉱山監督局) 등이 전국의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광산의 노무 담당자들을 모아 개최한 조선인노무자관리협의회(朝鮮人労務者管理協議会)에 사도광업소가 제출한 보고서다.


이 자료는 재일조선인사(在日朝鮮人史)를 연구하는 나가사와 시게루(長沢秀)라는 연구자가 나라토 시즈오(楢戸静雄)라는 인물로부터 받은 것이다. 1983년에 나가사와 시게루가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12호’에서 발표했으며, 연구자 등이 널리 이용해 왔다. 사도광업소의 내부 자료에 의거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히라이 에이이치의 기술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단, 1943년 6월 이후의 상황은 당연히 적혀있지 않다. 


이 자료로 1940년부터 1942년에 걸쳐 6회, 모두 모집형식으로 합계 1,005명의 조선인 노동자의 이입이 행해진 것이 밝혀졌다. 계약기간은 40년에 있었던 3번의 모집에서는 3년, 41년부터 42년 사이 3번에 걸친 모집에서는 2년이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421명이 다양한 이유로 사도광산을 떠났고, 43년 5월 말에는 584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남아있었다. 떠나간 이유도 정리되어 있다. 사망 10명, 도주 148명, 공상소환(公傷送還) 6명, 사상소환(私傷送還) 30명, 불량소환 25명, 일시소환 72명, 전출 130명이다. 


여기서 주시해야 할 부분은 불량 소환자 25명이다. 쉽게 말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는 조선에 돌려보낸 것이다. 강제노동이었다면 그런 소모적인 일에 신경을 안 썼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일본 내지에서 일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귀환(帰還)’은 일종의 제재(制裁)가 아니었을까 싶다.    


‘강제노동’설은 인정할 수 없다   


한편, 전출은 1943년에 금 채굴이 정지되면서 전쟁물자인 구리의 채굴만 허용되었고, 이에 노동자가 남아돌아 사이타마(埼玉) 현과 후쿠시마(福島) 현 공사현장에 조선인 노동자를 보낸 것이다. 


또한 평균과 최고, 최저 월수입도 밝혀졌다. 1943년 4월, 평균 83.88엔, 최고 169.95엔(가동 28일), 최저 4.18엔(가동 1일), 5월 평균 80.56엔, 최고 221.03엔(가동 28일), 최저 6.75엔(가동 2일).  


성과급으로 임금이 계산되었기에 최고치와 최저치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당시 도쿄의 공립초등학교 교원의 초봉이 50엔에서 60엔 정도였으므로, 이는 꽤 높은 임금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과연 이것을 두고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두 사료에 따르면, 조선인 근로자들은 주로 갱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위험한 갱내에 조선인을 배치한 것이 ‘강제노동’의 증거라고 한국과 일부 일본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현지에서 확인한 결과, 암반이 단단하여 낙반이 일어나지 않았고, 탄광과 달리 가스폭발의 위험성도 없었으며, 사고라면 발이 미끄러져 낙상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성과급 임금제도하 조선인 근로자는 갱내에서 일했기 때문에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수익을 수령했던 것이다. 


단기간에 큰 벌이를 원했던 조선인과, 갱내에서 일하던 젊은 일본인들이 징병되어 일손이 부족해진 광산 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 조선인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강제노동’이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한 견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료는 아이카와마치사 편찬위원회 편집(相川町史編纂委員会編)의 ‘사도아이카와의 역사·통사편·근현대(佐渡相川歴 史・通史編・近現代)’(1995년)에 수록된, 조선에 모집을 하러 갔던 전 사도광산노무과원 스기모토 소우지(杉本奏二)의 증언이다. 


여기서 스기모토 소우지 씨는 “1촌락 20명의 모집 할당에 약 40명의 응모가 쇄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응모한 사람 중에는 광산업 종사를 희망하지 않고, 일본 내지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 시모노세키나 오사카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 또한 모집이 강제연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모집 제도를 악용해 도항 수속을 업체에 맡기고, 도항비도 회사가 지불하게 하고, 일본 내지에 도착 후 도주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타 기록에서도 밝혀졌다. 


스기모토 소우지 씨는 조선인 모집이 시작된 이유에 대해 “내지인 갱내 노무자 중 ‘규폐’를 앓는 자가 많아 출광 성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또한 일본 내지의 젊은이들은 속속들이 군대로 징병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규폐(珪肺)’는 결정성 이산화규소의 흡입에 의해 일어나는 폐질환으로, 현재도 전 세계 채굴노동자들이 직면하는 직업병이다. 단, 통상적으로 수십 년의 노출 후에 서서히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측과 일부 일본 학자들은 규폐에 관한 스기모토 소우지 씨의 증언을 조선인 학대의 증거로 채택하고 있으나, 이러한 단편적인 증언으로는 실체를 알 수 없다. 광산소(鉱山所)는 자체 병원을 만들어 치료하고, 분진(粉塵) 대책도 강구했었다. 당시 사도광산 전체에서 규폐 환자가 얼마나 발생한 것인지, 조선인 근로자의 발생률은 어땠는지 등의 조사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스기모토 소우지 씨는 “쇼와 14년 2월에 제1진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전시동원 모집이 시작된 것은 동년 9월부터이며, 앞서 살펴본 사도광업소의 사료에서도 제1진 모집은 이듬해 1940년 2월로 되어 있어, 당시 증언을 한 스기모토 씨의 기억이 확실치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상, 1차 사료에서 살펴본 바 사도킨잔의 조선인 노동은 ‘강제노동’과 같은 비인도적 노동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이니치신문의 고가 고 씨와 일본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씨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일본 내에서도 ‘강제노동’설을 주장하는 언론과 정당, 학자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들 주장에 반박하고자 한다.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은 2월 2일, 필자의 ‘정론(正論)’ 기고문을 공개 비판한 고가 고(古賀攻) 전문편집위원의 칼럼 “‘필사’의 사도킨잔(「捨て身」の佐渡金山)’”을 게재했다. 고가 고 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도킨잔이 ‘강제노동’의 피해지였다는 한국측 반발에 대해, 조선 연구자인 니시오카 쓰토무 씨는 1월 26일자 산케이신문을 통해 킨잔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해 “응모가 쇄도했다”,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는 옛 아이카와마치(相川町)가 편찬한 ‘사도아이카와의 역사・통사편 (佐渡相川の歴史・通史編)’(1995년)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은 1월 29일 담화를 통해 같은 책에 있는 “사도광산의 비정상적인 조선인 연행”이라고 쓰인 부분을 인용하며, 부(負)의 역사에도 눈을 돌리라고 설파했다. 아이카와마치사(相川町史)에 앞서 간행된 ‘니가타 현사·통사편 8·근대 3(新潟県史・通史編8・近代3)’ (1988년)에는 더 직접적인 기술이 있다. “쇼와 14년에 시작된 노무동원계획은, 명칭이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변화한 반면,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에 있어서는 동질”이었다고 한다. 지자체의 자체적인 편찬물인 만큼,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일본 정부로서는 불편한 공적 통사(公的通史)인 것은 분명하다. 


칼럼에서 언급된 일본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은 1월 29일자 담화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 사도킨잔에서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조선인의 강제노동이 행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니가타 현이 편찬한 ‘니가타 현사・통사편 8・근대 3’은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을 지적하고, 사도의 옛 아이카와 초가 편찬한 ‘아이카와의 역사 통사편・근현대(相川の歴史 通史編 近・現代)’는 킨잔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을 상술한 뒤, “사도광산의 비정상적인 조선인 연행은 전시산금국책(戦時産金国策)으로 시작되어, 패전으로 겨우 끝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용서받지 못한다.


두 분의 주장에 반론하고자 한다. 역사에 대해 논의할 때 우선 중요한 것은 1차 사료, 즉 해당 시기에 작성된 문헌, 또는 그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이다. “강제노동” 혹은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은 당시에는 없었다. 일본의 조선 통치가 끝나고 20년 정도가 더 지난 1960년대부터 일본의 좌파 학자들이 “강제노동” 혹은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해, 1990년대경 한국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이 표현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의한 ‘역사적 평가’인 것이다. 학설(学説)이라고 해도 좋다.



고가 고 씨와 시이 가즈오 씨가 인용한 ‘니가타 현사’와 ‘사도아이카와의 역사’ 중,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갔다”, “비정상적인 조선인 연행”이라는 기술은, 어디까지나 해당 저서를 집필한 학자의 학설에 불과하다. 그것도 80, 90년대라는, 해당 문제의 연구가 좌파 진영에 의해 장악됐던 시절의 낡은 학설인 것이다.


이 낡은 학설에 대해 필자는 내무성 통계(内務省統計)라는 1차 사료를 인용하여 산케이신문의 1월 26일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여 낡은 학설을 부정했다.


조선에서 마치 눈사태와 같은 타관벌이(出稼ぎ)의 도항이 이어졌는데, 이들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사업장에 질서있게 보내려 했던 것이 전시동원이었다. 이는 ‘강제연행’, ‘강제노동’ 등과는 상반되는 역사적 사실이다(자세한 내용은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편집 ‘조선인 전시노동의 실태(朝鮮人戦時労働の実態)’ - 산업유산국민회의(産業遺産国民会議) 참고)


학문은 새로운 연구를 통해 진보해 간다. 필자의 학설을 부정하기 위해서 단순히 낡은 학설을 재인용해 가져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또한 필자는 ‘사도아이카와의 역사’만을 근거로 강제노동이 없었다고 서술한 바가 없다. “응모가 쇄도했다”라는 주장은, ‘사도아이카와의 역사’에 수록되어 있던 조선에 노동자를 모집하러 간 스기모토 소우지(杉本奏二) 씨의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증언은 1차 사료다.


아울러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사도아이카와의 역사’가 아닌, 사도광업소의 ‘반도노무관리에 대해(半島労務管理ニ付テ)’(1943년)를 근거로 들었다. 이는 1943년 6월에 사도광산에서 열린 ‘조선인노무자관리 연구협의회(朝鮮人労務者管理研究協議会)’에 제출된 것으로, 역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1차 사료다.


고가 고 씨는 언급한 바 없지만, 필자는 본인이 회장을 맡고 있는 역사인식문제연구회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히라이 에이이치(平井栄一) 편집의 ‘사도광산사(佐渡鉱山史)’를 근거로 들고 있다. 해당 저서는 전 사도광산 채광과장이 미쓰비시금속의 의뢰로 사도광산 내부자료를 바탕으로 1950년에 펴낸 미공개 고본(稿本)으로, 일급 1차 사료에 해당한다.


즉, 필자는 1차 사료를 근거로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강제노동’을 주장하는 세력은 필자의 새로운 학설에 전면적인 반론을 피하고, 단지 낡은 학설이 니가 타현과 사도 시의 서적에서 발견된 것을 두고 왈가왈부할 뿐이다. 이처럼 일본 국내의 무지한 세력을 상대로 확실하게 반박하고, 또 한국과 국제사회에도 사도킨잔은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사료를 통해 면밀히 홍보하여,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등재를 어떻게든 쟁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도 민간의 입장에서 전력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다.



관련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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