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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 쓰토무]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문제

“일본의 허위세력이 한국의 허위세력을 도와줌으로써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끝내기 위해서는 한일 진실세력이 손을 잡는 수밖에 없다”


※ 본 발제문은 일본 레이타쿠대학 특임교수이자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가 2023년 9월 5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2차 위안부문제 한일 합동 심포지엄: 위안부 문제의 실태와 한일 교과서 서술’에서 발표한 것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문제


글을 열며

1992년, 위안부 문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하던 필자에게 조선일보 전 편집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 위안부가 강제연행됐다는 이야기는 바보 같은 소리다. 당시 조선인 모집업자가 가난한 농촌 집안을 찾아가 부모에게 돈을 주고 그 딸을 위안부로 만들었을 뿐이다. 나도 젊은 기자들에게 강제연행 운운하는 이상한 기사를 쓰지 말라고 야단은 치는데 기자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전 야당·신민당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니시오카 군, 일본에서도 2・26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나. 당시 일본 육군 장교들은 자신들의 부하 병사들이 고향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 내용 중에 도호쿠 지방에서 다수의 젊은 여성들이 가난 때문에 매춘부로 팔려 가고 있다는 내용이 있음을 알고서 이 사실에 분개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궐기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 내지의 도호쿠 지방보다 더 가난했다. 그런데 일본 관헌이 강제연행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남로당 출신의 재일교포 공산주의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일본인에게는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실은, 나의 고향 제주도 마을에서는 일찍 남편을 잃은 과부가 마을의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위안소를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집안의 딸도 위안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그 여자에게 부탁했고 다수가 돈벌이를 위해 위안부가 돼 돈벌이를 했다.

12세 국민학교 학생까지 정신대로 동원됐다는 기사를 처음 썼다는 연합통신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대의 동원처는 군수공장이지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는 건 취재해서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걸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문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는 암흑이 있다. 전직 위안부 할머니 여러 명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위안소에서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만 어떤 과정으로 위안소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조선인 모집업자가 등장한다. 빈곤으로 인해 위안부가 된 것이다. 취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전쟁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취재를 진행하다가 전쟁이 나면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얘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지막의 기자를 제외한 세 사람은 유창한 일본어로 말해줬다. 모두 일본통치기(한국에서는 ‘식민지기’라고 일컫는데, 이 글은 일본인의 관점에서 쓴 글이므로 일본에서의 표현을 그대로 쓰겠다.)를 살았던 세대였다. 한국에서 일본통치기를 아는 세대가 다수인 시기에는 일본군이 전쟁터에 위안부로 불리는 매춘부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또한 위안부는 강제연행되어 성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가난의 결과, 조선의 공창(公娼)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매춘업에 종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일정책을 앞세운 이승만 정권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단 한 번도 위안부 보상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반면 비슷한 시기 일본의 연장자 세대에서는 한국에 대한 강한 혐오가 일어났다. “정신대는 군수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고 나도 대원이었다. 매춘부인 위안부와는 전혀 별개다. 그걸 똑같다는 거짓말을 하며 일본을 탓하는 한국인은 용서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다수였고 이 목소리가 한반도문제 전문가인 필자에게도 들려왔다.

내버려두면 위안부 문제 때문에 한일관계가 엉망이 되고 만다는 위기감을 갖고 1992년 초 필자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외교 안건으로 만들었는지를 조사해 월간 문예춘추(文藝春秋, 분게이슌주) 92년 4월호에 ‘위안부 문제란 무엇이었는가 ― 신문이 건드리지 않으려는 대소동의 의외의 진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의 첫머리부분에 필자는 이렇게 썼다.

먼저 결론을 말하자면, 이번 종군위안부 문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한국인 태평양전쟁 피해자’ 소송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인이다. 소송 원고 찾기든, 절차든, 언론 접근이든, 시위 계기 마련까지 일본인들이 한몫하고 있다.

피해자인 한국인의 아픔을 가해자인 일본인이 대변하고 호소하는 이런 출발점에서의 왜곡된 구도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활발한 보도활동을 펼친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언론들이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편드는 한편, 오보를 거듭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본 발표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한국 양국 간 외교문제로 만든 요소 중 첫째, 전직 위안부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실태와, 둘째, 아사히신문이 오보를 남발하면서 전개한 대캠페인의 범죄성을 다룬다. 

이어 세번째로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윤정옥 씨와 정대협의 위안부운동도 역시 당초에는 일본인의 지원을 받았음을 지적한다.

1. 전직 위안부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실태

한국인 위안부, 일본군 군인・군속, 징용공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본 재판소(법원)에서 제기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다. 이미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이 체결된 지가 25년이 넘어 있었고 한국 정부의 과거 청산이 끝나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무상자금 3억 달러를 받은 박정희 정권은 그 약 10%를 사용해 징병이나 징용으로 동원돼 사망한 자의 유족에게 30만원, 미불임금이나 예금잔액 등 미청산 금전관계가 있는 자에 대해서도 청산을 했다. 일본엔화 1엔을 30원으로 환산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유족 원호(援護) 확충 등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려는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1989년 11월 일본사람이 소송을 제기하자는 전단을 들고 소송 원고를 찾으러 한국에 온 것이다. 소송 원고를 찾으러 방한한 사람은 오이타 현에 사는 주부 아오야기 아츠코(青柳敦子)라는 이로 ‘조선과 조선인에게 공식 사과를 - 100인 위원회(朝鮮と朝鮮人に公式謝罪を・百人委員会)’라는 시민단체의 멤버였다. 이 위원회는 1995년 5월부터 12월까지 아사히신문사가 당시 발행하던 좌파 주간지 아사히저널(朝日ジャーナル)에 격주로 “일본국은 조선과 조선인에게 공식 사과하라”는 의견광고를 냈다. 아오야기 아츠코는 그 의견 광고와 한국어 번역문을 들고 원고를 찾으러 왔다.

아오야기 아츠코가 귀국한 뒤 해당 광고의 한국어 번역문이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손에 넘어갔다. 유족회 간부가 아오야기 아츠코의 자택에 국제전화를 걸어 꼭 협력하자고 제의했다.

유족회는 박정희 정권이 유족에 대한 보상을 위해 신고를 받던 1972년 발족한 조직으로 가족 생사 확인과 유해 조사, 원호(援護) 충실화 등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름 그대로 유족들만의 모임이었던 것이지, 무사히 귀국한 전직 위안부이나 전시노동자, 군인 군속 등은 회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정부가 사망자 유족에 한해서 보상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 대상 범위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당시 유족회 상임이사로 1992년도에 회장이 된 사람이 아사히신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의 장모인 양순임(梁順任)이었다.

1990년 3월 소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아오야기 아츠코는 재방한했다. 유족회는 설명회장으로 주한일본대사관 바로 옆에 있던 한국일보 대강당을 빌려 1,000여명의 회원을 동원해 아오야기 아츠코 등을 맞았다. 이때 비로소 한국인이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아오야기 아츠코 등의 왜곡된 구상이 현실화된다. 설명회의 정식 명칭은 대일 공식 배상 청구 설명회였다.

아오야기 아츠코는 거기서 “요구하는 배상금액에 따라 재판에 필요한 경비가 다른데 원고 한 명당 최소 10만엔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외, 방일해서 증언을 해 주시는 경비를 생각하면, 처음에는 10명을 원고로서 재판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10명의 배후에는 많은 원고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위임장을 가능한 한 많이 받고 싶습니다. 재판에 필요한 비용은 지금 일본에서 400만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1992년 2월 필자가 아오야기 아츠코를 면회하여 들은 내용)

일본 측이 모든 준비를 하고 비용도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인 400만엔이나 낸다고 하니 모인 유족회 회원들은 기뻐했다. 흥분 속에 회원들은 옆에 있는 일본대사관에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 시위가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일본대사관에 대한 조직적 시위의 첫 번째였다.

반일시위 1호마저 일본인이 선동한 것이었다. 92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는 정대협(현・정의연) 주도의 반일시위의 원류가 이것이었다.

그해 유족회는 활발한 활동을 거듭한다. 5월 노태우 대통령 방일에 즈음해 2주간 일본대사관 앞에서 농성을 벌인다. 이어 6월부터 7월까지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까지 숨진 가족들의 영정을 목에 건 도보 행진을 벌였다.

일본에서는 아오야기 아츠코 등이 소송 준비를 했지만 이들 활동의 특이한 점은 변호사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에 부실한 소장이 준비됐는데 어쨌든 그해 10월 29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유족 2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제소 직후부터 유족회와 아오야기 아츠코 등의 관계가 이상해진다. 제소를 위해 일본에 온 유족회 간부들이 귀국하자 유족회는 아오야기 아츠코에게 앞으로 조직 차원에서는 협력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유족회는 필자에게 아오야기 아츠코 등이 변호사를 쓰지 않은 것 등을 관계를 끊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아오야기 아츠코 등과 관계가 멀어진 뒤 유족회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우스기 케이코(臼杵敬子)등이 1990년 12월에 만든 ‘일본의 전후 책임을 분명히 하는 모임(日本の戦後責任をハッキリさせる会)’과 제휴하고 전후 보상재판을 대대적으로 맡는 변호사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와 상담을 하게 된다.

1991년 8월 다카기 겐이치 등이 중심이 돼 전후 보상 국제 포럼이 도쿄에서 열리자 유족회 멤버가 무려 53명이나 참가해 일본에서 시위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 언론이 전후 보상 문제를 크게 다루는 것은 이 포럼 이후다.

같은 8월 한국내 최초로 전직 위안부 김학순(金学順)이 등장했다. 김학순은 당초 유족회가 아닌 정대협에 연락했으나 이후 유족회 양순임 등과도 연락이 닿아 소송에 참여하게 됐다. 유족회는 유족 뿐만 아니라 살아 귀국한 피동원자 본인도 회원으로 추가하게 된다.

1991년 12월 6일, 전직 위안부 3명을 비롯한 유족회 35명이 원고가 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의 제소가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이루어졌다. 변호사는 다카기 겐이치를 비롯해 현재 사민당 국회의원인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穂) 등이었다.

이 제소를 위해 김학순 등 원고가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언론은 그 당시 유일하게 실명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온 전직 위안부 김학순에 대해 크게 보도했다. 다카기 겐이치 등도 김학순을 일본 각지로 데려가 증언을 시켜 여론을 자극했다.

소장에서는 ‘직업적 허위 증언자’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의 강제연행 증언이 장황하게 인용되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뒤에서 얘기할 아사히신문이 1991년 1년에 걸쳐 전사적으로 벌인 위안부 강제연행 캠페인의 효과도 있고 해서, 91년 12월부터 92년 1월 시점에서 일본통치시대를 모르는 세대의 대다수 일본인들은, 김학순 등 전직 위안부는 요시다 세이지가 말한 것과 같은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강제연행의 피해자라고 믿게 되고 말았다.

문예춘추 논문에서 필자는, 김학순은 강제연행 피해자가 아니라 어머니가 40엔에 기생 수련생으로 판 것이고, 그녀를 산 양아버지(기생집 관리인)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녀를 데리고 중국의 일본군 주둔지로 간 것이라고 썼다. 필자의 논문을 읽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교수가 다카기 겐이치에게 전화해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위안부는 없느냐”라고 물었더니 다카기 겐이치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한국에 찾으러 다녀왔습니다. 새로운 추가분은 좋은 것뿐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필자는 2007년에 출판한 졸저 ‘알기 쉬운 위안부 문제(よくわかる慰安婦問題)’(한국어판 ‘한국 정부와 언론이 말하지 않은 위안부 문제의 진실’)에서 다카기 겐이치 변호사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다카기 겐이치 변호사다. 그가 만든 소장에도 적혀 있으니 그는 김학순 씨가 가난 때문에 어머니에 의해 40엔에 기생으로 팔린 슬픈 경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점에 변호사로서 김 씨에게 당신은 재판에 적합하지 않다. 경력을 공개함으로써 또 망신을 당하게 된다고 설명했어야 했다.

처음으로 나타난 전직 위안부인 그녀는 다카기 변호사 등의 반일 운동에 이용되었음은 물론, 우에무라 기자와 아사히신문에도 이용되었고, 그 결과, 나와 같은 전문가로부터 경력을 지적받아 일회용으로 쓰이고 버림받고 말았다. (중략) 다카기 변호사는 그녀의 인권을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다카기 겐이치는 이러한 기술 등을 이유로 필자에 대해 명예훼손 민사소송을 제기했으나 2015년 1월 최고재판소 판결로 필자가 승소했다.

2. 아사히신문의 조작보도

다음으로 아사히신문의 조작보도가 1992년 1월 이후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 외교 현안으로 몰아간 큰 요인이었다는 문제를 검토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잘못된 보도를 하면서 일본의 명예가 현저히 훼손했다는 비판을 참지 못하여 아사히신문은 2014년 8월 자사의 위안부 보도에 관한 검증을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매우 불충분했고 무책임했다.

그래서 필자를 비롯한 그동안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를 비판했던 전문가가 모여서 독립검증위원회를 만들어 2015년 2월에 보고서를 내놓았다. 여기에서는 보고서에서 필자가 집필을 담당한 총론 부분의 요지를 중심으로 아사히의 조작 보도를 고발하다.

조작보도라는 표현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인다. 필자는 1997년경부터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 구체적으로는 당시 오사카 본사 사회부 소속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가 쓴 1991년 8월과 12월 기사를 날조 기사라고 계속 고발했다. 그에 대하여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가 2015년 1월 10일 명예훼손이라며 필자에게 민사 재판을 걸어왔다.

1심 도쿄지방재판소 판결은, 우에무라 다카시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고 인정되어 니시오카 씨의 논문의 기술은 중요한 부분에 대해 진실성의 증명이 있다”라고 명기했다. 2심의 도쿄고등재판소도 그 판단을 유지해, 최고재판소가 우에무라측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필자의 완전 승소가 확정되었다. 우에무라 다카시는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 즉 조작 기사를 썼다고 일본 최고재판소가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서도 조작이라는 표현을 당당히 사용하겠다.

아사히는 198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규탄하는 보도를 시작해 1991년부터 1992년 1월까지 집중적으로 수많은 허위보도, 조작보도를 벌여 결과적으로 일본군이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조선의 여성을 위안부로 만들기 위해 강제연행했다는 사실무근의 프로파간다(정치 선전)를 국내외에 확산시켰다.

아사히는 91년 한해에 무려 150편의 위안부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이는 요미우리신문 23편, 마이니치신문 66편에 비해서도 현격하게 많다. 또 한국 신문과 비교해서도, 동아일보 90편, 조선일보 79편, 한겨레신문 90편에 비교해도 역시 많다.

필자가 아사히신문이 전사적으로 위안부 조작 캠페인을 벌였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독립검증위원회는 이를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라고 이름 붙였다.

아사히는 92년 1월 12일 사설 ‘역사를 외면하지 마라’에서, “‘정신대’의 이름으로 권유 혹은 강제연행되어 중국에서 아시아 태평양 각지에서 병사 등을 상대시켰다고 하는 조선인 위안부”라고 썼다. 일본의 일간지 중에서 사설에서 이런 허위를 쓴 것은 아사히 뿐이었다.

이 사설이 나오기 전날인 1월 11일 아사히는 1면 머리 기사로 크게 ‘군 관여 나타내는 자료’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여기에서 거론된 자료는, 일본 국내에서 민간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할 때 유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도록 통제를 강화한다는 내용으로 조선인 위안부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사히는 같은 기사 중의 용어 해설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주로 조선 여성을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했다. 그 인원은 8만이나 20만이라고도 한다”고 쓰고 다음날 사설과 함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완성시켰다.

이 프로파간다를 떠받친 허위 보도에 대해서 개요를 적어 둔다.

요시다 세이지 증언에 대해서 아사히는 35년 만에 이를 허위로 인정하고 취소했다. 아사히가 취소한 것은 18개 기사다. 아사히가 처음에 요시다를 다룬 것은 1980년 3월 7일자 카와사키 요코하마 동부판이었다. 거기에서는 위안부 사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뒤 1982년 9월 2일 오사카 본사판에서 오사카 시내에서 열린 집회에서 요시다 세이지가 “조선인 위안부를 황군 위문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내보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1983년에 3편, 84년 1편, 86년 1편, 90년 1편의 간격으로 요시다 세이지에 대한 기사가 나왔지만 기사 내용의 중심은 노동자에 대한 연행으로, 82년 기사, 그리고 83년에 요시다 세이지가 펴낸 책에 적힌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사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91년에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사냥을 자세히 다루는 기사가 2편 실렸다. 뒤에 언급할 오사카 본사 기획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기사이다. 92년 1월 논설위원 칼럼이 위안부 사냥을 거론하고, 그 해 3월에 해당 논설위원이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의 투서를 꾸짖는 칼럼까지 쓰면서, 아사히는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사냥을 완전히 보증하는 증명서를 써주었다. 91년의 오사카 본사 보도와 92년 1월 논설위원 칼럼은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지탱하는 기둥이 됐다.

다음으로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위안부 연행”이라는 오보를 검토한다. 아사히는 적어도 31개 기사에서 이러한 오보를 했다. 처음에는 1982년 9월 2일 앞서 언급한 요시다 세이지 강연회 기사이다. 그 뒤 83년 1편, 84년 1편, 88년 1편, 89년 1편, 91년 12편, 92년 13편, 95년 2편, 97년 1편이다. 그것이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이었다.

그 안에 용어 해설 기사가 3편 있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독자는 용어 해설을 바탕으로 기사와 사설을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보의 책임이 무겁다.

처음에는 1983년 12월 24일 ‘메모’라는 제목의 용어 해설이다.

‘여자정신대’ 의 이름으로 전선에 보낸 위안부는 5~7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약 3 분의 1이 패전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요시다 세이지가 방한하고 사과비를 세운 것을 서울발로 전한 기사에 붙어 있었다.

다음이 문제의 1991년 12월 10일 ‘종군위안부(말)’란 용어 해설이다.

제2차 대전 직전부터 ‘여자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전선에 동원됐다가 위안소에서 일본 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한 여성들의 속칭. 공식 조사는 없지만 10만 명이나 20만 명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조선반도 식민 지배 속에서 대부분이 조선 여성이었다고 한다.


3편이 1992년 1월 11일 ‘종군위안부<용어>’이다.

주로 조선 여성을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했다. 그 인원은 8만이나 20만이라고도 한다.


이 2편의 용어 해설도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 됐다.

마지막으로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91년 8월 11일과 91년 12월 25일 날조 기사에 대해서 살펴보자. 앞의 기사에서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일본 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한 ‘조선인 종군위안부’ 중 한 사람이 서울 시내에 생존해있다는 것이 판명되어”라고 하면서 최초로 실명을 걸고 나선 위안부 피해자가 마치 요시다 세이지가 주장한 ‘여자정신대’로 연행된 피해자인 것처럼 허위 경력을 썼다.

게다가 그녀 본인이 가난의 결과로 어머니에게 기생으로 팔려 자기를 산 양아버지가 위안소까지 데려갔다고 재판의 소장과 회견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말했는데도, 그 중요한 사실은 적지 않아 강제연행의 피해자인 듯한 이미지를 조성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전직 위안부 등이 제기한 재판의 이해관계자였다. 그는 재판을 제기한 유족회 간부의 딸과 결혼했다. 지면을 이용해 자신의 장모가 제기한 재판에 유리할 수 있는 조작보도를 한 것이다.

다음으로 왜 아사히가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많은 오보, 조작을 집중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아사히는 2014년 8월 검증 특집에서 요시다 증언 기사를 허위라고 취소했고 위안부와 여자정신대를 혼동했던 것도 정정했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과 자료가 적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뿐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뒷받침 취재가 미흡했다고 인정했지만 비슷한 오류는 당시 일본 국내 다른 언론과 한국 언론의 기사에도 있었다고 변명하면서 아사히의 책임이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사설에서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이라는 허위를 쓴 것은 아사히뿐이다. 뿐만 아니라, 요시다 증언을 가장 빨리 다루었고, 1991년에 위안부 캠페인 중에서 2번이나 크게 다룬 것은 아사히였다. 1991년부터 92년 1월 문제사설에 이르기까지 위안부에 관한 기사를 일본과 한국에서 가장 많이 게재한 신문도 아사히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고노 담화가 나온 1993년까지의 일본 신문들의 위안부 보도는 다음과 같다.


1985년부터 89년까지의 기간을 보면 전체 42편 중 아사히가 31편으로 전체의 4분 3을 차지하고 있다. 90년에 아사히는 위안부 보도를 늘려 1년간 23편 게재했다. 91년에야 대캠페인을 벌여 무려 150편의 기사를 냈다. 92년부터 각 신문사가 아사히를 뒤쫓아 가서 일거에 많은 위안부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언론의 위안부 보도를 보자.


아사히의 91년 150편 기사 중 오사카 본사 기사가 60편 있었다. 이는 같은 해 아사히 기사의 40%, 전체의 25%를 차지한다. 오사카 본사에는 외신부나 정치부는 없다. 그런데도 위안부 보도를 이렇게 많이 한 것은 의도적인 캠페인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60편 중 절반이 넘는 35편은 오사카 본사의 기획인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특집 기사였다.

아사히신문 가운데 위안부 캠페인을 주도한 것은 오사카 본사였다. 1991년 오사카 본사는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이라는 대형 기획 특집을 하면서 전쟁을 겪은 여성들의 수기를 연일 게재했다. 이 특집 안에서 2회에 걸쳐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노예사냥 증언을 상세히 보도했다(“종군위안부, 목검 휘둘러 억지로 동원”, “종군위안부 가해자로부터 다시 증언 … 젖먹이로부터 엄마를 떼어놓았다”). 또 우에무라 기자의 조작 기사 중 한 편(12월 25일)도 이 기획이었다.

이 대형 기획은 전직 군인들에 대한 상당히 편향된 인식 아래 이뤄졌다. 그 기획 책임자가 오사카 본사 기획보도실장 기타바타케 키요야스(北畠清泰)였다. 기타바타케 키요야스의 사고방식을 소개하고 그 편향된 인식을 확인해보겠다. 그는 기획연재 마지막 회(12월 31일자)에서 일본의 전직 군인들이 여성의 성을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을 그리워한다며 이렇게 썼다.

대전쟁 당시의 이상함을, 은근히 그리워하고 있는 자가, 이 사회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일반사회의 계층질서가 통하지 않는 군대여야 사람을 거리낌 없이 구타할 수 있었던 자. 평시의 윤리가 무시되는 전시라야 여성의 성을 유린할 수 있었던 자. 통상적인 권리가 무시되는 비상시가 돼야 잘 처신해 포식(飽食)의 특권을 얻은 자. 그런 사람들이 있어, 전시에 향수의 마음을 품으면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현저하게 편향된 반일 인식이 있기 때문에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연행해 강간했다는 등의 황당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사실로 믿었던 것이다. 기타바타케 키요야스가 봤을 때 많은 일본의 전직 군인들은 과거에 요시다 세이지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면서 그것을 은근히 그리워하며 침묵하고 있는 극단적인 악인들이다.

이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1992년부터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 시작됐다. 아사히는 1993년 일본 정부 조사에서도 강제연행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프로파간다를 고집하여 “조선반도 노동자 강제연행이 있었는데 위안부에 대해서만 강제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패전시 소각된 문서는 적지 않을 것이고, 문서에 ‘강제징용’ 사실을 명기하는 것은 피했을 수도 있다”(1993년 3월 20일 사설) 등으로 강변하고 있었다.

1996년경부터 아사히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아사히는 1997년 3월 31일자 특집기사에서 ‘좁은 의미의 강제’와 ‘넓은 의미의 강제’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군에 의한 강제연행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고 모집 이송 관리 등을 통해 전체적으로 강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주장으로 돌아섰다. 이때도 아사히는 자신들이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내외에 강력하게 발신해 온 책임을 회피하고 요시다 세이지 증언기사에 대한 취소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는 1997년 이후 군에 의한 강제연행론은 거의 논파됐지만 아사히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외무성도 사실에 입각한 반론을 피한 결과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오히려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계속 확산됐다.

글을 닫으며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문제라는 주제로 자세히 논의해 보았다. 물론 위안부 문제를 부각시킨 또 다른 요소는 한국 측에도 있었다. 1990년부터 이화여대 교수 윤정옥이 중심이 되어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윤정옥은 1990년 1월 한겨레신문에 네 차례 ‘정신대 원한의 발자취 취재기’라는 기사를 연재했다. 홋카이도, 오키나와, 태국,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해 그 기록을 기사화했다. 기사에는 일본에서 이미 관계자들이 다루었던 내용만 있고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반일 좌파를 자극한 듯하다.

윤정옥은 여성운동가들을 모아 그해 5월 노태우 대통령 방일에 맞춰 일본 정부에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일본에서도 호응해 사회당 의원들이 6월에 위안부에 대해 질문했고 노동성 국장이 위안부는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업무인 징용과는 무관하며 민간업체가 데리고 다녔다는 경솔한 답변을 해 문제를 꼬이게 했다. 

그 흐름에 따라 윤정옥은 여성단체를 규합해 90년 11월 정대협을 결성했다. 정대협이 이후 위안부 문제로 한일 정부가 나름의 해결을 모색해보려고 할 때마다 이런 시도를 깨부수며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윤정옥은 물론이고, 윤정옥이 초대 대표였던 정대협도 그 발족에서부터 사실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윤정옥 자신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연재 마지막회(1990년 1월 24일)에서 양심적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이 연재를 쓸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위안부나 징용공을 생각을 하면 일본에 대한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지만 일본인 중에도 과거를 뉘우치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들의 도움으로 이만큼이나마 위안부들의 고통 자취를 밟아볼 수 있었다.


일본의 허위세력이 한국의 허위세력을 도와줌으로써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끝내기 위해서는 한일 진실세력이 손을 잡는 수밖에 없다. 오늘 심포지엄은 큰 전진이다. 거짓말을 상대로 함께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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