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荒野)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무대는 허허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황야다. 욕망의 공간으로 치면 골드 러시로 표현되는 헐리우드식 서부고, 이념이나 정치적 공간으로 보면 무정부주의적이고 탈이념적인 만주다. 비록 시대적 배경은 근대지만 굳이 문예사조나 이념의 지점으로 보면 근대라기보다는 탈(脫)근대 즉 포스트 모더니즘적이고 탈이념적이다. 욕망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끝없이 달리지만 의식은 멈춰진 열차처럼 정지된 공간이다. 영화 '놈놈놈'에는 무겁고 불편해서 거북하고 버겁기보다는, 가볍지만 상쾌하고 의미심장한 김지운 감독 특유의 영상화법이 돋보인다. 몇 군데 옥에 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세련미가 돋보인다. 탈 이념적 성향은 극중 윤태구(송강호 분)가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 놈 밑에 사나 양반치하에서 사나 그게 그거지 뭐“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김지운의 ’놈놈놈’은 한국판 웨스턴의 전형을 제대로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황야(荒野)라는 배경만 그런 게 아니다. 내용도 전형적인 서부영화다. 서부영화에서 황금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만주벌판에서 보물지도로 인생역전을 꾀하려는 ‘놈놈놈’의 욕망은 동일하다. 황야는 법
피겨 요정 김연아 日 언론, "김연아는 강했다!" 2006년 12월 18일, 미모의 아나운서 박혜진씨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김연아 선수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MBC 뉴스의 헤드라인이다. 이 시원한 동영상 뉴스는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의 김연아를 보면서 일본 언론들이 칭찬하는 꼭지들로 짜여 있다. 일본 언론들은 김연아 선수가 강한 근성과 냉정함을 지녔다고 인정한 반면, 미라클 마오라는 애칭을 가진 일본의 히어로는 강한 마음이 부족했다고 냉정하게 자평했다. 여기에 "내가 우승한 것은 아사다 마오가 실수했기 때문" 이라는 김연아의 말을 전하면서, 일본 언론들은 김연아에게 냉정함에 겸허함까지 갖춘 선수라고 칭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대목을 보면서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일본의 문화를 또 한 번 확인했다. 한국 언론이라면 어땠을까? 김연아 선수가 빙판에서 엉덩방아를 찍어서 금메달을 놓쳤다면 한결같이 ‘아깝다! 김연아’ '사소한 실수로 우승을 일본인에게 넘겨줬다'고 아쉬움을 타전하는 내용으로 뉴스를 구성했을 것이다.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이 동영상 뉴스 끄트머리에 나오는 일본 전문가의 냉정한 평가다. 전문가 그는 아사다 마오의 실수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얼마 전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라는 작은 책을 만났다. 데이비드 폰더라는 주인공이 링컨 나폴레옹 솔로몬 등 세계 역사상의 위인들을 만나는 가상현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었다. 특히 솔로몬 왕을 만나는 대목에서 필자는 자못 흥미진진해졌다. 분명히 솔로몬의 그 유명한 재판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새삼 이 대목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주 어릴 적부터 품은 작은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과연 솔로몬이 아기의 친모를 찾아 준 판결이 완전무결하고 흠이 없었느냐 하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다투는 광경을 목도한 후, 한참을 고민하던 솔로몬왕은 해결책이 없으니 칼로 두 아이를 잘라서 반반씩 가지라고 명한다. 그때 한 여인은 울면서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아이를 반대편 여인에게 주라고 한다. 하지만 다른 한 여인은 절반의 아이라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솔로몬은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생모가 아니라며 죄를 자청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라고 판결한다. 이 판결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판결로 회자되고 있고, 동시에 이 에피소드는 솔로몬이 얼마나 지혜로
2008년 4월 13일 즈음부터 촉발되기 시작된 촛불 시위가 벌써 달 포 째 접어들고 있다. 필자의 솔직한 심정은 장맛비가 내려서 며칠이라도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약간이나마 스스로 자성의 시간을 가져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충분히 의견을 피력해서 이젠 뉴욕 타임즈 등 세계적인 신문에도 나고, 미국 영국 등 서구 유럽에 까지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또 이에 힘입어 한미간에 소고기 재협상까지 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한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촛불시위 자체에 대한 다소간의 냉각기를 가진 후에 다음 행동을 해도 손해 보거나, 더구나 먼 후일에 후회할 일이 없으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진한 어린 학생들까지 참여하고 있는 판국이니 더욱 그렇다. 자칫 잘못하면 중국 역사를 수 십 년이나 후퇴시켰던 1960년대 중반의 역사적 참화였던 문화혁명기의 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작 열병처럼 회오리에 빨려 들어갔던 그 당시 십대의 청소년들이 두고 두고 후회하고 참회를 하고 있는 문화혁명 때의 홍위병(紅衛兵) 사건처럼 그들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빵을 훔친 소년불과 몇 개월 전, 이슬람
스티븐 킹 기독교적 원죄의식, 안락사 논쟁, 총기소유논란, 선택에 따른 책임, 공포에 처한 인간행동의 양상, 자살, 사이비 광신도의 문제, 종말론, 심판과 구원의 문제, 불가지론, 불확정성의 원리와 구제예정설 등 미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많은 주제들이 한 영화에 다 녹아 있다면 실로 놀랍지 않은가? 스토리 구성상 너무 동떨어진 낙태문제와 너무 단순하거나 복합적인 요인인 테러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스티븐 킹은 역시 구성의 마술사답게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한 가지 이야기 줄기에 다 살렸다. 하지만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안개라는 제목에서 의미하듯 수많은 메타포(은유), 모파상의 소설인 ‘목걸이‘ 같은 아이러니, 그리고 부조리와 기막힌 반전이 나타난다. 그래서 영화 미스트는 사실 괴수영화인 듯 하지만 괴수영화라는 외투만 살짝 걸쳤을 뿐 실제로는 매우 심오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영화다. 과연 'T.S. 엘리엇, J.R.R 톨킨, 셰익스피어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작가-'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경지를 넘어섰다- '는 수사에 걸맞는 작가가 스티븐 킹이었다. 그의 단편집『스켈레톤 크루』의 대표작인 미스트(The Mist, 1
국보 제 1 호인 숭례문이 한 방화범의 소행에 의해 불탔다. 토지보상금과 2년 전 창경궁 문정전 방화사건에 대한 재판판결에 불만을 품은 70대 노인이 용의자로 밝혀졌다. ‘오호 통재라!’ 많은 시민이 애도의 념(念)을 표하면서 쓴 말이다. 610년을 지켜온 겨레의 숨결이 한사람의 광기에 잿더미로 변한 참화를 보고 고은 등 많은 시인조차 이런 상투적인 표현을 쓴 까닭은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일거다. 어디 그 뿐이랴? 전 국민의 가슴이 벌건 인두에 지져진 듯, 통증을 느끼다 전소 소식에 마침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약간의 손상이 있었으나 숭례문의 현판만은 건져냈고 1층 건물과 기둥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재하다고 한다. 복원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을 보는 듯 하다. 풍수지리설 삼봉 정도전의 삶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저서 불씨잡변 뿐 만아니라 풍수지리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조선이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나무(木)의 기운이 흐르는 땅이다. 그래서 나무에 상극인 쇠(金)와 불(火)의 기운이 한양의 기운을 침범할까 극히 경계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꿈을 꾸었다는 몽금척(夢金尺) 설화를 안고
좋은 소재 영화 '중천(조동오 감독)'에 나오는 중천(中天)은 저승과 이승의 중간계이자 환타지적 세계다. 참 좋은 소재다. 49재(四十九齋)라는 우리의 전통 의식을 단초로 활용한 점은 매우 탁월한 발상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타지적 요소를 살린 점도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화려한 CG를 사용하고 또 2007년 청룡영화제에서 를 제치고 기술상을 받았기에 랑 비교하고 싶을 것이다. 영화 '중천'을 종합적인 견지에서 제대로 분석하려면 가 아니라 무려 20년도 넘은 홍콩 SF영화 촉산(蜀山- 신촉산검협, 1983)과 천녀유혼(?女幽魂, 1987)과 비교해야 더 많은 점을 얻을 수 있다. 중천과 촉산의 마계(魔界)는 모두 이승과 저승의 중간계라는 점이 닮았고 이곽과 소화의 러브 스토리는 천녀유혼의 영채신과 섭소천의 이야기와 닮았기에 더욱 그렇다. 대사의 어색함 '중천'의 전반기에 표현된 극중 인물들의 대사는 너무 정보전달에만 치중하다 보니, 극적 리얼리티가 많이 떨어졌다. 몰입을 방해했다. 마치 여자가 쥐를 보고 "어맛! 쥐, 쥐, 쥐!"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냥 "쥐 한 마리가 나왔네요" 라고 담담
밀양의 삭제씬과 일상(日常) 밀양의 삭제씬을 묘사한 동영상을 보았다. 경남 산청에 있는 저수지에 신애가 뛰어들어 자살로 신에게 복수하려는 장면이다. 4분 4초 짜리인데 이(李)감독과 전도연의 설명을 제외하면. 1분이 채 안되는 장면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건 삭제되지 않았다면 갈등을 더 첨예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훨씬 좋았다. 단 물에 굴절된 이유인지 대사가 웅웅거려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은 있었다. 재 촬영을 하든지 아니면 이런 녹음상의 문제는 더빙을 사용해서라도 해결했으면 했다. 이창동 감독의 설명대로 일상을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상을 묘사한 한다는 것과 '일상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연출)'은 분명히 다르다. 때로는 연출과 특수효과를 사용해야만 더 일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생각은 공연한 고집이나 미망에 불과해 보인다. 나날이 영상 기술이 발전해 가는데 잘못하면 감독의 의도를 벗어나 퇴행에 그칠 수도 있다. 착시현상이나 교통사고 같은 큰 사건을 당했을 때, 인간의 뇌가 슬로 비디오처럼 기억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현상 등 인간 감각의 한계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거리유지의 실패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영화와 자신과의 거리 유지에 실패하는 대목이 문득문득 등장하고 있음은 아마도 그가 소설가적 시점에 익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시점이란 게 있다. 즉 작가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의 심리에 까지 뛰어들어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소설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 영화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문법을 '시각화'라는 과정을 통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영상언어 특유의 문법이 따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들이 유괴당한 사실을 알게 된 신애가 종찬을 찾아가서 되돌아오는 대목의 처리도 영상언어 문법으로는 좀 어색하다. 냉정하게 지적하면 이 대목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이 장면이 소설 속이라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신애의 속 마음을 상세히 묘사가능하다. '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이 절박한 순간임에도, 가라오케를 틀어놓고 신나게 노래를 하고 있는 저 미련한 인간에게 차마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순 없었다. 그래서 신애는 망연자실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와 밀양 2007년 대한민국 영화의 담론은 와 밀양이 이끌었다. 하나는 흥행영화로서 또 하나는 작가주의 영화로서의 관점에서다. 이 두 영화는 나름대로 공통점이 많다. 먼저 두 영화 다 소재가 탁월하다. 굳이 덧붙이자면 는 콘텐츠 자체가 특별했고 '밀양'은 소재에 대한 접근방식과 주제의식이 뛰어났다. 또 이창동, 심형래 감독 두 사람 다 소설가, 개그맨 출신으로 소위 영화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다. 이창동은 신작가주의 영화감독 즈음으로 자리매김했고 심형래 감독은 한국에서 불모지에 다름없던 SF영화를 개척한 감독이다 이 두 감독은 2007년에 각기 자기 분야의 영화를 선보였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영화 가 한국 평단에서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었는데 반해서 '밀양'은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점에 있다. 솔직히 영화 '밀양'을 작가주의 영화, 즉 순수 예술영화의 관점에서 평한다 해도 탁월한 주제의식과 빼어난 연기를 제외하곤, 종합적으로 작품성이 좀 떨어지는 영화다. 특히 기법과 구성에서 많이 부족하다. 이런 까닭에 이 두 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2007년 한국 영화 중 주목할 영화를 단 한편만 고르라고 누군가 필자에게 강제한다면, 주저 없이 를 꼽겠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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