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 34명의 '한예종 학생 비상대책위원회 발족식 및 기자회견' 관련 기사를 보고 무언가 메시지를 던져야할 듯하여 글을 적습니다. 저는 지난해 6월 제보를 받아 한예종의 심광현 교수, 진중권 객원교수 등이 주도한 30억대 통섭교육사업 부실 의혹에 대해 심층취재를 해왔습니다.
이것은 취재 기자 입장에서 또한 대중문화평론가로 활동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명백한 부실사업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국민의 혈세 낭비는 물론, 이 교육에 참여한 학생들 자체가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건을 취재하면서, 다양한 제보를 더 받게 되었고, 이른바 예술교육 전문가들과도 한예종 전반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진 연락처조차 공개하지 않은 한예종의 폐쇄성
취재 과정에서 저는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어떻게 국립대학이면서 담당 교수진의 연락처 하나 명기되어있지 않고, 과 사무실로 연락해도 교수진과 연결 하나 시켜주지 않습니까? 국립대학을 떠나 한번 그 어떤 대학에서 이런 식으로 학교를 관리하는지 학생들이 직접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30억대라는 거액의 국민세금을 들인 사업을 하면서 변변한 홈페이지 하나 만들지 않아 외부에서 알아볼 수 없도록 해놓았고, 예술창작 솔루션 개발사업은 외부 접근마저 차단했습니다. 한예종은 지난 10년 간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될 수 없을 정도로 자폐화의 길을 걸었고, 한예종의 일부 권력형 교수들은 이런 한예종을 사유화하며 마음껏 자신들의 이득을 취해온 것입니다.
저의 판단은 결론적으로 한예종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특히나 예술영재와 전문가를 위한 교육기관 한예종의 교육을 담당하기에는 자격이 미달되는 교수들도 있습니다. 취재 기자 차원에서, 시민운동가의 차원에서 이런 상황을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한예종은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바는 한예종의 학생들입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해 무분별하게 국민세금을 끌어들이고 한예종을 기능에 맞지 않게 비대화시킨 교수들에 대한 응징은 분명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수들의 잇속을 미처 따지지 못하고 한예종에 입학한 이른바 이론과 학생들의 피해를 어떤 방식으로 구제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문화예술이론은 자발적으로 다양한 학습과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이론과를 전공하는 여러분들과 유사한 미학을 학부에서 전공했습니다. 미학과 재학 시절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미학과는 학부에 분과되어서는 안 되고 최소한 철학, 종교학과와 합쳐져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벽을 완전히 허물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학부를 마친 뒤 자기 분야에 따라서 심화된 전공공부를 하려면 대학원에 진학하면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그리스 역사도 모르면서 플라톤 미학을 공부하고, 독일 철학도 모르면서 칸트 미학을 공부합니까?
한예종의 영상이론과의 홈페이지에는 “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영상 문화현상에 대해 연구하고 현재의 문화지형을 분석하여 새로운 문화생산물을 기획하는 인력을 양성하는데 목표를 둔다”로 설립 취지가 나와있습니다.
대중문화평론가로서 영상이론과 학생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철학과 문학,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문화지형을 분석하고 문화생산물을 기획할 수 있습니까?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에 대한 이해없이 문화이론가가 양성될 수 있습니까? 한예종 영상이론과 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 이런 기초적인 인문과 사회과학을 모두 마스터하고 입학했다는 말인가요?
영상이론과는 한예종을 떠나 애초에 학부과정에 설립되면 안 되는 과입니다. 문화이론이라는 것은 각자 알아서 다양한 학습과 경험을 하고, 대학원에서 세부전공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영상이론과가 예술영재교육을 위한 한예종에 설치되었으니, 이에 대해서 바로잡을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겁니다.
이론과 실기 병행 교육을 주장하는 한예종 교수진은 스스로 실기부터 배우십시오
한예종의 이론과 교수들은 실기와 이론을 병행해서 교육시켜야 예술전문가가 양성된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예술이론이든 인문사회과학이든 예술가 지망생들이 알아서 교양과목으로 들으면 되는 것이지, 왜 모든 커리큘럼을 예술 비전문가들이 짜서 학생들을 가르치냐는 겁니다. 그렇게 이론과 실기의 병행이 중요하다면 본인들부터 실기 교육을 받아야지요.
통섭교육사업도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예술과 인문과 과학의 결합이 21세기의 예술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예술가 지망생들이 알아서 예술과 인문과 과학을 공부하면 됩니다. 이를 주도한 교수들은 일단 예술도 모르고 과학은 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본인들도 모르면서 함부로 통합을 운운하며 마구잡이로 커리큘럼을 짭니까? 예술과 인문과 과학을 한꺼번에 가르칠 수 있는 석학은 제가 알기론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통합적 인재는 짜여진 틀로는 양성할 수 없고 최대한 학생들의 자율권을 보장해주며 학생들이 알아서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한예종 개혁안을 구체화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 전문가가 아닙니다. 오는 27일 문화미래포럼에서 개최하는 토론회에서는 그간 취재과정을 상세히 공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의 알려진 감사결과를 토대로, 진짜 예술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발제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다만 저의 개인 소신은 한예종의 이론과는 물론 민간대학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영상원, 연극원, 협동과정 등도 모두 한예종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울 음대의 양해엽 교수나 문화미래포럼의 정진수 대표의 주장대로, 한예종은 예술실기와 영재 교육을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학생들과 삶과 예술을 함께 하는 헌식적인 코치들이 강사로 들어와야 합니다. 교수 직함 걸고 외부활동에 골몰하는 정치 교수들이 대체 어떻게 예술영재를 교육합니까?
현 정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예종에 대한 개혁의 여론은 점점 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한예종에 불어닥친 개혁의 바람은 정부의 의지가 아닙니다. 수많은 예술가와 예술 전문 학자들이 그간 한예종의 심각한 문제점을 인식해왔고, 통섭교육 부실 사업 건이 단초가 되어 이러한 개혁의 힘이 터져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즉 한예종의 일부 정파적 교수들이 선동하는 대로 이명박 정부가 물러난다고 이 개혁의 흐름이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예종 개혁의 답을 내는 학생이야말로 문화예술 전문가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문화예술이론을 공부하는 한예종의 학생들이 보다 더 냉철히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랍니다. 문화예술이론을 공부하고, 진로를 찾는 학생들은 바로 지금의 한예종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문화예술이론가들의 전문적 능력입니다.
지금 당장 학과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나의 학과가 축소되고 없어진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식의 비분강개는 금물입니다. 냉철한 제 3자의 입장에서 한예종이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며, 대한민국의 예술정책이 어떻게 변해야하는지 따져보십시오. 이에 답을 낼 수 있는 학생들은 설사 한예종 전체가 사라져도 충분히 자기 진로를 개척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일부 교수들의 이기주의에 휘말려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학생들이라면 한예종이 지금보다 100배 커져도 문화예술이론가의 꿈은 실현되지 못할 겁니다. 문화예술이론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 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판단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예종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책임을 엄중히 교수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피해자라면 교수들이 가해자입니다. 그런 교수들이 이제 학생들을 담보로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 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 커뮤니티를 알려주고 학생들은 이를 구성하였고, 학생 한 명이 자살하였습니다. 키팅 선생은 학교로부터 문책을 당합니다. 학생들은 키팅 선생을 도와주고자 하지만, 키팅 선생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고 떠납니다. 학생들의 잘못을 선생이 대신 책임진 겁니다.
지금의 한예종 교수진들은 명백히 본인들의 부실운영의 잘못을 놓고 학생들과 투쟁을 함께 하자고 합니다. 키팅 선생과 너무나 비교되는 행태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투쟁으로서 해결할 수 없고, 한예종을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며, 한예종을 진짜 주인인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고, 학생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한예종의 교수들이 이런 의지가 없다면 하루빨리 다들 물러나야 합니다.
저는 그간 대한민국의 기득권을 장악해온 386세대와 맞서 창의적 능력을 갖춘 새롭고 젊은 실크세대운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한예종의 현재의 틀은 여러분들이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문화미래포럼의 토론회에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이에 저는 한예종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첫째, 한예종 부실에 책임을 져야하는 교수와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마십시오.
둘째, 예비 문화예술 전문가들로서, 제 3자의 시각으로, 한예종의 주인인 국민의 시각으로 한예종 문제를 분석해보십시오.
셋째, 지금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을 생산적으로 승화시켜보는 노력을 하십시오. 위기는 문화예술가가 성장할 수 있는 큰 토양이 됩니다.
넷째, 문화미래포럼 주최의 토론회 때 열린 자세를 갖고 참여하십시오. 학생들이 참여한다면 저도 최대한 낮은 자세로 대화를 하며 학생들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 변희재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