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에서 언급한 한국의 법치주의 붕괴는, 엄밀히 따지면 1995년 12월에 만들어진 소급입법에 따라 무리하게 전 전 대통령을 체포했던 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 후기에 하락하는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이미 사법적, 정치적 처리가 끝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 출범 때의 사건을 내란으로 간주하여 전두환 및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반법치적인 린치 형식으로 구속했다.
그 당시 전 전 대통령은 논리 정연하면서 역사의식과 애국심이 넘치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마땅한 발표 장소가 없었던 그는 본인 자택 앞 골목에서 성명문을 낭독하였고, 이는 이른바 ‘전두환의 골목성명’으로 불렸다.
체포극의 배경인 ‘반한사관(反韓史観)’
전 전 대통령이 발표한 성명 중에 특히 괄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 정부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운동 방향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과거 청산을 무리하게 앞세워 이승만 정권을 친일 정부로, 3공화국·5공화국·6공화국은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하여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이념적 투명성을 걱정하는 국민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김영삼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분명히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필자는 이 성명을 읽고서 김영삼 정권의 법치주의에 반하는 전임 대통령 체포극 뒤에 1980년대 급속히 한국사회에 침투한 ‘반한사관(反韓史観)’이 있음을 확신했었다.
필자는 96년 1월에 ‘전두환 및 노태우 대통령의 구속, 어떻게 볼 것인가(全斗煥、盧泰愚逮捕をどう見るか)’라는 논고를 한 월간지에 기고하며 이 사태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이 논고는 필자의 저서 ‘코리아 터부를 풀다(コリア・タブーを解く)’(1997년)에도 수록돼 있다. 또한 필자의 저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성명도 번역하여 참고자료로 수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대선에 당선된 직후 지지자들 앞에서 자신의 정권을 ‘제3기 민주정부’라고 칭했다. 즉,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을 제외한 한국의 역대 정권은 모두 비민주적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이는 필자가 주장하는 ’반한사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거한 현재, 95년도에 그가 발표한 성명을 재차 읽어 보는 것은 큰 가치가 있다. 당시의 오역 부분을 일부 수정하여 이하 전문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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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 체포 직전의 ‘국민에 대한 성명’ 전문 (1995년 12월 2일)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나라가 지금 과연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잘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6년 전인 89년 12월 15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야당 총재의 영수회담 결정에 따라 저는 소위 5공 청산정국의 정치적 종결을 위해 그해 12월 31일 국회의 증언대에 올라 과거 문제의 매듭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이미 정치적으로 완전 종결되었던 사안이 최근 또다시 제기되어 온 나라가 극도의 혼란과 불안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다시금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개별적인 시시비비는 앞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아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되풀이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회적 혼란과 불안에 직면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 이에 대해 현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의 명쾌한 설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11월 24일 김 대통령은 이 땅에 정의와 진실과 법이 살아있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5·18특별법을 만들어 저를 포함한 관련자들을 내란의 주모자로 의법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는대로 현재의 김영삼 정권은 제5공화국의 집권당이던 민정당과 제3공화국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야권의 민주당, 이 3당이 지난 과거사를 모두 포용하는 취지에서 ‘구국의 일념’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전임 대통령의 자격으로 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김 대통령이 저를 방문했을 때에는 조언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취임 뒤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김 대통령은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라 지목하며 과거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야합해온 김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현 정부의 통치이념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 정부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운동 방향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과거 청산을 무리하게 앞세워 이승만 정권을 친일 정부로, 3공화국·5공화국·6공화국은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하여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이념적 투명성을 걱정하는 국민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김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분명히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다음으로는 현재 거론되고 있는 검찰의 재수사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국민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이미 지난 13대 국회의 청문회와 장기간의 검찰 수사 과정을 통해 12·12, 5·17, 5·18 등의 사건과 관련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을 한 바 있고 검찰도 이에 의거하여 적법 절차에 따라 수사를 종결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검찰은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로 이미 종결된 사안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검찰의 태도는 더 이상의 진상규명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검찰이 저에 대한 사법처리를 하고자 한다면 이미 제출되어 있는 자료에 의거하여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가 내릴 조처에는 그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저는 수용하고 따를 것입니다. 끝으로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제5공화국을 책임졌던 저에게 모두 물어주시고 이 일을 계기로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