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4년 연임제’ 개헌추진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는 가운데 진보적 성향의 헌법학자를 중심으로 “대통령이 명백히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주장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앞으로 개헌안을 둘러싼 위헌 소지 논란은 더욱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청와대가 발표한 ‘4년 연임제 개헌안’과 관련, 대통령 궐위 시 잔여임기 등을 두고 허점이 지적된 바 있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하고, 새 대통령의 4년 임기가 시작되지만, 이는 청와대가 당초 제시한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키는 ‘원포인트 개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급기야 정부 헌번개정추진지원단은 8일 개헌시안을 발표하고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의 임기를 전임자의 잔여임기로 제한하고, 잔여임기가 1년 미만인 경우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했으나, 이는 '원포인트 개헌'을 위한 끼어 맞추기 식으로 더욱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 연구원을 역임한 대표적 헌법학자인 연세대 김종철 교수는 이날 ‘프레시안’의 기고문을 통해 “‘직선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하는 정부형태의 체계정합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제의 특징이자 목적은,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 대통령에게 절대임기를 보장함으로써 안정적인 국정수행을 도모하기 위함인데, 이론적으로 1년 정도의 짧은 임기를 가진 대통령을 따로 뽑는다는 것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또 김 교수는 “아주 짧은 임기의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대통령선거를 반복하여 치르는 것은 선거의 빈발을 이유로 임기일치를 추구하는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임기가 1년 미만인 경우 국무총리나 관계국무위원들이 순차적으로 대행하도록 하는 제안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면서 “직선 대통령제의 본질상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은 완벽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원포인트 개헌’을 위해 이런 순리를 배척하는 것은 소를 위하여 대를 희생하고 예외를 위하여 원칙을 훼손하는 잘못이라는 것. 그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임대통령과 민주적 정당성을 동급으로 획득하고 있는 ‘부통령제’를 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김 교수는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으로서의 헌법상의 지위를 갖는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의 훼손은, 아무리 헌법에 근거하더라도 최소한에 그쳐야 하는 것이 대통령 지위나 정부 형태를 포함한 헌법상의 권력구조를 지도하는 기본원리인 국민주권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개헌발의 과정에 대해 “국가기본법인 헌법을 개정함에 있어 헌법개정권력자인 국민의 충분한 숙의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아니하고, 밀어붙이는 대통령의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헌법에 의한 지배는, 헌법 제정의 주체이자 그 헌법의 지배를 받아 헌법을 지켜야 하는 국민의 주도와 합의로 형성된 헌법에 의해서라야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또 김 교수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1987년 헌정이 불안하고 비효율적으로 된 근본원인이라고 진단한 것은 원인진단의 착오이며, 그 대안으로 ‘4년 중임제’를 제안한 것 역시 착시현상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5년 단임제’의 문제점으로 거론되는 것들은 오히려 우리 정치문화의 후진성과 헌법하위적 제도의 불완전성 탓”이라며 “합의정치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정치권의 정치력의 부재, 정치적 자율성이 약한 정당조직, 스스로 정치세력화하고 있는 주요 언론의 여론 동원체제, 과도한 정치화와 탈정치화가 공존하는 정치문화 등이 문제”라고 밝혔다.
한편 김 교수는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키는 제안에 대해서도 “동시선거 혹은 근접선거로 기대하는 효과가 반드시 발생한다는 실증적 보장도 없지만, 그러한 효과가 발생하더라도 문제”라며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주기의 일치에 의한 여대야소는 대통령제의 독재화 경향을 강화시킬 위험이 크다”고 주장했다.
“딜레마에 빠진 노무현”
한편 손우정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연구자도 같은 날 ‘헌법개정시안, 노대통령의 자충수가 될 것인가?’라는 '오마이뉴스' 기고문에서 “대통령 궐위 시 오로지 선거주기를 맞추기 위해 서로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은 최소 일 년여의 임기밖에 수행할 수 없고,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한 국무총리가 최대 일 년의 국가수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손 연구원은 “국가수반을 포함한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국민소환 제도’의 도입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언제나 대통령 궐위 상황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제든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의 실정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의 정책방향에 대한 소환임에도 잔여임기가 1년 이내라서 소환된 대통령과 같은 정책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한다는 것은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합법적인 것이든 불법적인 것이든 이제까지 국가수반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당시 야당 간사로 실무책임을 맡았던 박찬종 전 의원도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지난 1월 성명서를 통해 “국민은 헌법상 최고기관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만큼, 국민이 결단하면 언제든지 개헌할 수 있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도 단축할 수 있다”며 “노 대통령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의 기득권을 ‘불가침적 권리’로 착각한 듯”고 지적했다.
박 전 의원은 또 “헌법은 국가기본법으로서, 절박한 개헌 필요성이 있고, 국민이 합의할 때 비로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께서 정부조직까지 동원하여 개헌발의를 강행한다면, 그 의도에 정략이 있음을 단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은 국가원수, 행정부수반, 국군통수권자이며, 헌법 수호의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상의 책무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언행함으로써 헌법을 지속적으로 위반해 왔다”고도 했다
한편 손 연구원은 “‘헌법개정시안’에서 논의의 ‘전제’로 강조하고 있는 대통령·국회의원 임기일치는 새로운 문제들을 파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예로 ‘대선과 총선 선거주기를 일치시키고 2년마다 열리는 지방선거를 정부운영의 중간평가로 삼자는 견해’에 대해 “지방자치제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의 지방정치는 작년부터 정당의 공천권을 허용하면서 중앙정치의 축소판으로 전락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를 정부운영의 평가 잣대로 삼겠다는 것은 지방선거를 중앙정치의 완전한 종속물로 고착화 시키게 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손 연구원은 “노대통령의 4년 연임을 중심으로 한 ‘원 포인트 개헌’ 제안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일치 문제와 연관되면서 논리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며 “4년 연임만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개헌할 필요가 없고, 임기일치를 위해서는 ‘원 포인트’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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