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과 김정은의 지난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반짝했던 NL식 민족통일론이 조만간 소멸할 것으로 보인다는 청년시민단체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20~30대 청년들로 결성된 ‘시민통일퍼스트(김송현, 오종택, 장한용, 한대의)’는 통일 관련 시민의식 조사인 ‘Z세대에게 통일인식을 물어보다- 전국 1000km 여정과 젊은시각의 자문들 20선’를 지난 31일 발표했다. 조사대상인 ‘Z세대’에 대해서 조사진은 “1995년 이후 태어난 이들을 의미하며, 2020년 기준으로 전체 노동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시민통일퍼스트는 2020년 9월 01일부터 11월 30일까지 Z세대이거나 Z세대에 가까운 90년대생 시민운동가 5명을 초청하여 진행한 정책 검증(policy review) 및 추가 15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했다. 국내 결과, 국내 사회문제의 본질에 관하여 15인 가운데 10인은 권력형 비리(서술자: 정부에 의한) 약자에 대한 권리 침해가 본인이 관심 갖는 사회문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Z세대는 ‘자신이 바라는 대한민국의 통일’에 대한 질문에는 통일로 인한 사회적 여파와 경제적 비용을 우려하는 응답자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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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검증보고서는, 2014년 아사히(朝日)신문의 자체적인 검증과 아사히 측이 의뢰한 ‘제3자위원회’를 통한 자사 위안부 문제 오보에 대한 검증, 철회 사건에 이어서, 2015년 아사히신문 위안부 문제 오보의 문제점을 독립적으로 보다 상세히 조사, 확인한다는 목적으로 일본 보수 논단의 대표적인 관련 전문가인 나카니시 테루마사(中西輝政) 교토대 명예교수,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레이타쿠대 객원교수, 시마다 요이치(島田 洋一) 후쿠이현립대 교수 등 ‘독립검증위원회’가 작성·공개한 것이다. 본 ‘독립검증위원회’ 검증보고서는, 1990년대부터 30여 년에 걸쳐서 이뤄진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문제 조작 보도의 문제점을 면밀히 검증해 밝히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 기간 동안의 해당 위안부 문제 조작 보도가 일본내 여론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여론과 미국 여론, 또 국제사회(기구)의 여론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도 세세히 드러내고 있다. 검증위원들이 개별 챕터를 따로 집필·편집한 관계로 일부 주제와 소재가 계속 반복되는 감은 있으나, 소위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로 회자되는 위안부 문제의 모든 쟁점들이 조목조목 반박되어 있는 등, 이 분야에서는 가히 종합백과사전과도 같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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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 ·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서울 남산 기슭에는 국권 상실기 총독관저가 있던 자리에 2016년 조성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있다. 이 터에 들어서면 이 땅에서 일어난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 지켜보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대지의 눈을 먼저 만나게 된다. 중앙에는 247인의 위안부 명단과 함께 강제로 끌려갔을 때의 상황, 위안소 생활, 해방 후 귀국 과정과 정부에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침묵해야만 했던 상황을 적고 오른쪽 끝에는 김순덕 씨의 ‘끌려감’이라는 그림을 새겨놓았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이기도 한 이 그림은 공포에 질린 소녀의 눈망울과 소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고 있는 또 다른 손이 눈길을 끈다. 이 손에 대하여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위안부 미술치료를 담당하면서 김순덕 씨에게 이 그림을 지도했던 이경신 씨는 자신의 책 ‘못다 핀 꽃’에서 “소녀를 끌고 가는 일본군의 구체적 형상을 생략하고 우악스러운 손만 그린 것은 더 자세히 그리기 어려워서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되레 그 선택이 매우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며 일본군의 손이라고 분명히 적시하였다. 이 씨는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12월 26일판, 번역 : 황철수).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항목은 지금껏 한국에는 전혀, 또는 거의 소개된 바가 없는 관련 일본인들(군인, 종군기자, 외교관)의 반박 증언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관련해서는 앞서 번역된 ▲ ‘난징사건(南京事件)’(한국어 번역), ▲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한국어 번역), ▲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은, 난징사건과 관련한 여러 증언들에 대해 설명하는 항목이다. 목차 1 일본인에 의한 증언 1.1 도쿄재판 1.2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 1.3 ‘대학살’은 없었다는 증언 2 중국인의 증언 3 구미인의 증언 4 참고문헌 1 일본인에 의한 증언(日本人による証言) 1.1 도쿄재판(東京裁判) 도쿄재판에 출두한 일본인 증인들의 증언은 선서가 이뤄진 증언이며 검사에 의한 반대 심문이 이루어졌다. 반면, 중국인 증인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반대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은 23일 수요일 오후 1시 명동에 위치한 ‘남산 위안부 기억의 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민행동 측은 최근까지 세종대 정문 앞에서 ‘호사카 유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지만, 앞으로는 ‘일본군 위안부의 성지’인 기억의 터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 거짓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2월 23일 0시부터 수도권 전역에서 5인 이상 집회가 금지되면서 이번 국민행동 기자회견은 김병헌 국민행동 대표와 박세원 국민행동 간사만 주최자로 참석하고, 기자회견 이후 현수막 펼침 행사에서만 일부 인원이 함께 했다. 다음은 국민행동 기자회견 사진과 성명서. [제16차 국민행동 성명서] 누가 이 손을 일본군의 손이라 했는가?? 현재 남산 기슭에는 국권 상실기에 총독관저가 있던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조성되어 있다. 기억의 터에 들어서면 이 땅에서 일어난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 지켜보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대지의 눈을 먼저 만나게 된다. 중앙에는 247인의 위안부 명단과 함께 강제로 끌려갔을 때의 상황, 위안소 생활, 해방 후 조국으로의 귀국 과정과 정부에 강요
[김병헌 ·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는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위안부 바로 알기 ‘학습자료’가 실려 있다. 그 중 고등학생용 ‘학습자료’에는 1937년 9월에 개정된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定)’에 관한 자료를 소개하며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군은 일본군 위안소를 전쟁 지역의 병참시설인 야전주보(물품 판매소)로 설치했는데, 이는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로 취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週刊金曜日’에 게재한 ‘위안부의 전체상(像)’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일본군위안소는 1937년 9월 29일, 일본의 육군대신이 제정한 陸達제48호 ‘野戰酒保規定改正’에 의하여 야전군의 후방시설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군위안소가 야전군의 후방시설이었기 때문에, 군 ‘위안부’들은 전투지의 방면군이나 파견군의 동원계획에 의하여 징집되고, 징집된 위안부들은 특정의 군부대에 배속되어,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군 ‘위안부’는 야전주보(매점)의 병참품의 지위에 놓여 져 있었던 것이다. (안병직, ‘週刊金曜日’ 2014년 9월 12일) 이 두 글을 종합하면 ‘주보규정’의
[김병헌 ·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지난 11월 말,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대표 김병헌)’이 세종대 앞 집회를 예고 한 웹포스터에 ‘호사카유지, 일본군 위안부가 어째서 성노예인가?’라는 제목과 함께 ‘위안부 월 1,500엔, 일본군 대장 월 550엔, 이등병 월 6엔’이라는 내용을 실었다. 그러자 호사카 유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안부는 거액을 받았다’는 (것은) (일본)극우세력이 항상 하는 주장이다. 비슷한 주장은 사이트와 유튜브 에도 나와 있다. 이런 사이트나 유튜브에 의하면 1943년 일본의 육군 대장의 월급은 550엔, 이등병은 9엔~6엔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위안부의 수입이 월 1,500엔이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위 사이트나 유뷰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는 월수입이 아니라 가불금으로 300~1,500엔을 받았다고 나와 있다.”며 일본군 위안부가 월 1,500엔의 수입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필자는 이 글을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사카가 요구한 1,500엔의 근거는 멀리도 아닌 바로 호사카가 자신의 페이스북과 책에 인용한 “많은 포주들은 식료, 기타 물품의 대금으로 그(=위안부)들에게 높은 금
서울 강북구청 앞에 세워진 불법 위안부상의 철거를 촉구하는 한일우호 시민단체의 정기 수요 기자회견이 16일 오후 3시, 수유역 8번 출구 근처 위안부상 앞에서 열렸다. 영하 10도를 넘는 매서운 한파 속에서 열린 이날 기자회견에는 정희일 정희일TV 대표, 박진우 2020새마을운동TV 대표(전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사무국장), 정지만 동기부여아카데미 대표, 곽은경 무궁화TV 대표 등이 참석했다. 정희일 대표는 외투와 귀마개를 쓴 위안부상 조형물을 가리키면서 “나는 귀마개도 못했는데 저 소녀상은 귀마개도 하고 외투도 입고 있다”며 “거기다가 KF 마스크까지 씌워주고, 담요도 덮어줬으며 핫팩까지 가져다 놓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다가 큰절까지 하고 있으니 완전히 우상숭배”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이 불법 소녀상을 설치한 자들에 대해 도로법 75조 위반, 기부금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발장을 냈으며, 이미 참고인 조사까지 끝났다”며 “조만간 검찰로 송치될 것이고, 이 조형물의 설치를 방관한 강북구청 공무원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곧 세계 최초로 이 불법 조형물 소녀상이 철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이 16일 오후 1시 영하 10도의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세종대 정문 앞에서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 규탄 집회를 열었다. 지난 3주 동안 국민행동 측은 집회를 방해하는 백은종 ‘서울의 소리’ 대표를 비롯한 반일좌익 괴한들의 맞불 집회로 인해 예정된 시간과 다르게 집회를 진행했지만, 이번 집회는 예정된 시간에 열렸다. 김병헌 국민행동 대표는 “당분간 예고한 대로 집회를 진행하되, 또 집회를 방해하는 세력들로 인해 우리의 목소리가 묻힌다면 다시 집회 일정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박세원 국민행동 간사는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는 것을 틀어막기 위해 호사카 유지 측에서 아무리 집회금지가처분신청과 같은 방법을 이용하고 온갖 그럴싸한 이름의 단체들을 동원한 맞불집회로 애를 쓴다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대한민국 국민들과 아니, 전 세계인들을 향해 지난 30년 동안 잘못 알려진 위안부에 관한 기가 막힌 진실들을 하나하나 전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영하 10도의 칼바람 속에서도 이곳에 나온 우리 모두의 바람이자 역사적 사명”이라고고 말했다. 김병헌 국민행동 대표는 자유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이른바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라는 역사적 판결로서 일본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을 제소한 한국의 원고 네 사람에게 해당 피고 회사의 배상을 명령했다. ‘징용 판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원고들은 일제시대 당시 징용공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원고들 중에서 실제 징용공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책은 이처럼 일제시대 징용공 문제와 관련 우리들이 원천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실관계부터 바로 잡으며 시작한다. 원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모라로지연구소 및 레이타쿠대학 교수는 1977년부터 한일 양국을 넘나들며 각종 교류활동을 해왔고 이제는 어지간한 한국인보다도 한국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친한파(親韓派)’를 넘어 ‘애한파(愛韓派)’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넘어서 징용공 문제로 극한 대치로 치닫고 있다. 양국의 국민감정도 이제 더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다. 이에 그는 일단 자신의 ‘제 2의 고향 사람들’에게 징용 문제와 관련 자신의 ‘제 1의 고향 사람들’의 입장부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오직 진실만이 두 고향 사람들을 화해시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