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좌파진영의 자아성찰이 필요하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와 서강대 원용진 교수 등이 좌우 언론 간의 소통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권 이후, 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좌우 언론들은 제 살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살생적 싸움을 지속해왔다. 그 결과 신문시장은 OECD 국가 중 가장 빠르게 위축되었고, 전문 잡지 시장은 초토화되었다. 인터넷신문 역시 당파적으로 갈라져, 거의 대부분이 포털 기생매체로 전락하였다. 국민통합을 위해 힘써야할 방송은 이러한 좌우갈등을 확산시키는 역할에만 골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좌파 학자들이 좌우 소통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언론계 내에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특히, 강준만 교수는 ‘소통을 가로막는 10가지 이유’로 △승자독식주의 △연고주의 △초강력 중앙집권주의 △서열주의 △지도자 추종주의 △극단주의 △이념의 사유화 △각개약진 △압축성장 △높은 대외 의존도 등을 제시했다.
강 교수는 또 개혁·진보 세력의 ‘자아 성찰’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개혁·진보는 적과의 관계만 염두해 둔다. 이의를 제기하면 ‘조중동 보수 프레임’에 있다고 반발한다”며 “분노 어린 독설을 이명박 정부에만 쏟으니까 민심이 안 움직이는 것이다. 3자 내지 4자의 소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권 내내 진보좌파 진영의 자아성찰은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보수신문을 죽이기 위해 시장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보좌파 매체가 제대로 성장이나 했으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포털 권력을 두둔해온 진보좌파 진영
나는 2005년도부터 언론시장을 탈취하려는 거대 재벌 포털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희한하게도 나는 어느새 보수우파 진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 봐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거대 자본의 언론장악을 비판한 측은 진보좌파였기 때문이다.
신문의 질로써 경쟁하자며 무가지를 규제한 측도 진보좌파였다. 그러나 매일 아침 300만부가 뿌려지는 지하철 무료신문을 규제하는 법안을 제시한 측은 진보좌파가 아닌 보수우파 인터넷미디어협회였다. 언론시장을 살리기 위해 포털과 무료신문과 싸운 사람의 입장에서 엽기적인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포털하고만 싸우기도 버거운데, 시종일관 포털 비판자들을 음해하는 보도를 내보낸 미디어오늘, 자타가 공인하는 포털 관련 전문가 임에도, 민언련, 언개련 등이 주최하는 포털 관련 토론에는 단 한번도 초청받지 못한 일, 최근에 포털 보호하기 위해 인미협의 발언을 왜곡하고 편파보도를 자행한 KBS <미디어포커스>, 구성안까지 조작하여 편파 진행을 강행한 MBC <100분토론> 등등, 진보좌파진영의 공격은 집요하고도 조직적이었다.
그러다보니, 포털 규제 문제를 중심으로 나는 진보좌파를 공격하는 보수우파 진영의 최전방 공격수가 되어버렸다. 나는 진정으로 진보좌파 진영의 핵심 인물들에 묻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언론개혁의 과정과 결과가 바로 이런 것들이냐고. 인터넷 거대재벌을 옹호하고, 신문 잡지 시장을 파괴하는 지하철 무료신문을 모른 체하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을 왜곡보도를 통해 음해하고, 이런 짓을 하는 게 과연 언론개혁이냐는 말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변명거리는 바로 절대 악인 조중동과의 싸움이다. 조중동과의 싸움을 위해라면 포털도 놔둬야 하고, 신문시장 전체를 죽여서라도 조중동을 무력화시킬 것이며, 그 과정에서 진보개혁매체가 죽더라도, 그건 알 바 아니라는 태도만을 고집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논리를 제시해보라며 아무리 물어도, 그들은 대답한 바가 없다.
반면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 정권 내내 지금까지 언론현안의 민감한 사안에 개입한 적이 없다. 나는 한때 강준만 교수가 언론학자로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린 적도 있었다. 어떻게 언론학자가 언론을 죽이는 포털과 지하철 무료신문 등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왜곡보도를 자행한 진보좌파 매체를 비판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것도 하나의 역할 분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언론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당파성을 관철시키겠다는 진보좌파 진영의 정치꾼들이야말로 좌우소통을 막는 주범들이라 지목한다. 아무리 소통과 대화를 하고자 해도, 이들과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내가 일찌감치 KBS <미디어포커스>와의 대화를 포기했듯이 말이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최전방 공격수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안티조선이 진보좌파 진영의 자아성찰을 막는다
나는 강교수가 다른 방법으로 언론계의 좌우의 벽을 허물어주기를 바란다. 좌우의 벽을 허문다고 해서 모두의 정체성을 다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원칙을 지키되, 당파성과 관계없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보다 확대해나가자는 것이다. 나는 좌우가 함께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안이 포털의 언론권력 분쇄라고 보지만, 포털을 옹호하는 진보좌파 언론인들과 내가 대체 어떻게 좌우 소통을 할 수 있을지 솔직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교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소통의 흐름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나는 강교수와 함께 소통포럼에 참여한 교수들 중, 소통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언론죽이기에 가담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좌우 언론 간의 소통을 주장하냐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입장이고, 자격을 따지는 것이 통합이라는 생산적 결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자격을 따지지 말자.
다만 나는 강교수가 이것 하나만큼은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내 개인적으로 매우 부정적 의미로 진보좌파 매체들이 '젊은 보수 논객'이라 비아냥거리게 된 계기는 조선일보 기고였다. 그러나 2005년 1월부터 포털과의 싸움을 시작한 뒤 무려 1년 간 진보좌파 진영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했으니 이제 당신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건 구실에 불과하다. 이미 포털을 비판하는 순간부터 나는 진보좌파 진영의 적이 되었다. 단지 거대재벌 포털을 진보좌파에서 옹호할 명분과 논리가 없으니 1년 간 음해만 하다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순간부터 공격을 시작했을 뿐이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강교수가 이야기하는 진보좌파 진영의 자아성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포털을 옹호하는 진보좌파 진영에 아무리 자아성찰을 호소하려 해도, 이를 받아주는 매체가 한 곳도 없었다. 진보좌파 진영에서 그나마 나의 취지를 이해해주려는 사람조차도 "꼭 그렇게 조선일보에 글을 써야 했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진보좌파 진영이 아무리 잘못되었고, 이를 지적하는 사람의 입을 막아도 그대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에 기고와 인터뷰를 하지 말자는 안티조선운동의 방법론은 바로 진보좌파 진영의 비판과 성찰을 막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것이다.
강교수가 좌우소통을 주장하려면 최소한 조선일보 기고 거부에 대한 원칙을 다시 세워줄 필요가 있다. 98년도에 강교수가 내세운 조선일보 기고 거부 원칙은 지금과 같은 방식이 아니었다. 좌우와 관계없이 상식에 의거한 내용의 글은 얼마든지 조선일보에 기고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대 장하성 교수의 삼성 비판 칼럼이었다. 강교수 스스로 "장하성 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은 정당하다"고 고려대 강연회에서 발언한 바 있다.
아무리 올바른 내용이라도,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에 기고하면 적이 되어버리는 지금과 같은 언론계 풍토에서 대체 어떻게 좌우 소통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나는 강교수가 이 부분을 명확히 짚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게 만약 강교수가 그리고 있는 좌우통합의 큰 그림의 실천에 해가 된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조선일보 기고 거부도 이념이 아닌 하나의 방법론이었으니 말이다.
젊은 언론인들에 책임감을 가져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강교수 등 소통포럼에 참여하는 학자들이 20대와 30대의 젊은 언론인들의 미래를 염두에 두어달라는 것이다. 386세대 이상의 언론계 정치꾼들이 난장판을 벌이면서 언론시장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386 이상 세대는 도박 한판 하고 떠나면 되지만, 2030 언론인들은 30년 이상 언론인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미래 세대에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에 좌우를 넘어선 세대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었다. 언론계 내에 386 정치꾼들부터 내쫓아야지 소통이든 대화든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마 강교수 등 학자들이 해보면 알겠지만, 좌우소통을 막는 벽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서로의 방법이 다르더라도, 언론계 전체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므로, 강교수를 비롯한 소통포럼의 학자들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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