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은 먼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니.."
북한 핵폐기를 위한 실천적 문서로 평가되는 2.13합의 채택 100일을 하루 앞둔 22일 정부 당국자들은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른바 `방코델타아시아(BDA) 악령'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 불능화와 중유 100만t 상당의 경제.에너지 지원, 북.미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한 2.13합의가 우여곡절 끝에 채택되자 전 세계는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과 그런 북한을 정상국가로 맞이하려는 미국의 행보에 주목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듯 3월 초 미국 뉴욕에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보내 미국과 협상하도록 했다.
그러자 올해 안에 북.미 양측이 수교할 가능성이 있다거나 북한이 핵을 정말로 포기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와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한 과감한 행보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우후죽순 처럼 제기됐다.
그리고 3월14일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시작된 5개 분과 실무그룹회의와 이어 열린 제6차 6자회담은 2.13합의 이행을 위한 세부계획이 도출될 것이란 기대와 함께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희망은 갑자기 허망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BDA 문제 때문이다. 북.미 베를린 회동에서 양측이 해결책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조만간 해결된다'던 한국과 미국 당국자들의 장담은 거듭 허언이 됐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가시적 진전 없이 2.13합의에서 정한 60일 시한(4월14일)은 물론 어느덧 2.13합의 채택 100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아직도 "BDA문제가 막바지 터널을 벗어나고 있으며 이것만 해결되면 쾌속선을 타게 될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런 낙관론은 합의 이행에 대한 북한의 정치적 의지가 확고해 보인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15일 외무성 대변인의 언급을 통해 '2.13합의' 이행 의지를 재천명했다.
앞서 북한은 지난달 13일 외무성 대변인의 기자회견과 리제선 원자력총국장이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2.13합의의 중요성과 자신들의 약속이행의지를 확인해왔다.
따라서 현재 논의 중인 미국의 대형은행인 와코비아은행이 BDA 북한자금의 중계역할을 맡는 방안이 잘 진전되면 2.13합의 이행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정부 당국자들은 `BDA 이후의 북핵 로드맵' 작성에 주력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미국과도 이미 충분한 협의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한 계획표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BDA 문제가 최소한 이달내 해결되는 것을 전제로 하면 미국은 조만간 제3국에서 북한과 양자회담을 통해 6자회담 프로세스 복원을 위한 세부사항을 논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외교가는 보고 있다.
특히 해외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이번주말 동남아를 순방할 예정이어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의 만남이 성사될 지가 관심사가 되고 있다.
비록 시간이 흘러가면서 가능성이 점차 낮아지고는 있지만 북.미 양자회담이 성사되면 2.13 합의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초기조치를 신속히 이행하고 2단계 조치에 해당하는 핵시설 불능화를 위한 구체적 논의와 함께 핵 프로그램 신고, 중유 100만t 지원 등이 로드맵으로 명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지난 3월초 뉴욕에서 열린 양자회담에서 연내 불능화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를 비롯한 양자 관계정상화에 양측이 의견을 모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열릴 양자회담에서 보다 극적인 조치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미 양자회담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입북에 이어 차기 6자회담이 열리고 6자회담이 끝난 직후 힐 차관보의 북한 방문 및 영변 핵시설 폐쇄현황 확인, 나아가 6자 외무장관 회담이 가까운 시일내에 열릴 가능성도 높다.
다만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선순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는 2.13합의 이행이 지연되면서 또 다른 고민을 안게 됐다.
BDA문제로 답보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6자회담과 달리 경의선.동해선 철도시험운행이 성사되는 등 남북관계가 상대적으로 급진전되면서 오는 29일로 예정된 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과 이후 곧바로 시작될 대북 쌀 지원이 당면 고민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달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13차 회의에서 쌀 차관 40만t을 5월 말부터 지원하기로 하면서 "북한의 2.13합의 이행 여부에 따라 쌀 차관 제공시기와 속도를 조정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결국 2.13합의 이행이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쌀 지원에 적극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자칫 BDA문제로 인해 6자회담의 협상 동력 소모는 물론 남북관계의 진전이 허사로 돌아갈 위기가 조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국면이다.
정부 당국자는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하고 있지만 북한의 협상의지 등 전체 변수를 조망해보면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다"면서 "미국 내부에서 BDA 문제를 풀기 위한 협의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기에 조만간 BDA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정부는 그 이후에 대비한 준비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lwt@yna.co.kr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