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에도 신세대론이 있었다
<아니 저게 누구냐? 아무래도 우리집 애 같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낯선 사람같이 느껴진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아, 이런 사람도 있었나” 하고 놀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느 나라 사람이며 누구집 자식이냐, 어디서 무엇을 보고 배운 사람이기에 이럴 수가 있냐고 아연실색해본 경험 말이다.
멀쩡하게 공부 잘하던 학생이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고 휴학을 하겠단다. 병? 천만에, 그는 건강하고 착한 모범생이다. 휴학 사유가 걸작이다. 한라산에 새로운 등산로를 개발해 보겠다는 것이다.
당신 아들이, 후배가, 제자가 이 말을 했을 때 당신의 다음 반응이 궁금하다.
어렵게 입사를 하고도 상사가 까다롭게 군다고 휴직을 해야겠다는 청년도 있다. 양가집 총각이 사창가 아가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우긴다. 그런가 하면 유남규가 중공 탁구를 꺾던 순간에도 차분히 담배만 피우고 앉은 청년도 있다.
산더미처럼 일이 밀렸는데도 사규에 따라 정시 퇴근, 그리고 휴가를 가겠다고 나서는 신입사원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꾸하렵니까? 얌체, 아니면 조금 돌았다고 하겠습니까? 데려다 야단이나 칠 작정입니까?>
윗 글을 읽으면서,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윗세대가 새로운 신세대를 접하면서 느낀 충격을 진솔하게 서술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2008년도에 작성된 것이 아니다. 신세대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1995년도의 글도 아니다. 바로 민주화 항쟁이 결실을 맺던 1987년 정신과의사 이시형 박사의 책 『신인간, 무서운 신세대의 정신풍속도』(집현전, 1987)의 서문 중 일부이다.
윗 글에서 묘사된 신세대는, 1995년도의 신세대론이나, 2004년도 중앙일보가 기획한 포스트 386세대론,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십성 언론에 보도되는 젊은 세대에 대한 행태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이시형 박사의 서문이 시사하는 바는, 신세대라 불리는 세대의 일상적 행태가 생각보다 윗 세대와 그리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1987년도의 이시형 박사가 당시 신세대의 직장 생활까지 언급한 것으로 봐서 그들은 아마도 80년대 초반 학번, 즉 386의 선두세대였을 것이다. 그들이나 신세대나 행태로 봐서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것이다.
10대, 20대, 30대의 모든 세대론은 386세대가 만들었다
92년도의 신세대, 2007년도의 88만원세대, 그리고 이제 촛불을 들고 나온 10대들에 대한 개별적 특징은 큰 차원에서 차이가 없다. 지금 2.0세대라 부추기며 촛불을 든 10대들에 대한 예찬성 기사들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한 특징이다.
첫째, 자기 주장과 표현력이 강하다.
둘째, 인터넷과 핸드폰의 소통에 능숙하다.
셋째, 댓글 하나로 수만명을 모으는 등 사이버 공동체에 익숙하다.
넷째, 불합리성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이런 특징들은 92년도의 신세대 논쟁 당시 나왔던 것과 단 하나도 차이가 없다. 다만 그 당시는 인터넷과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아, PC통신으로 사이버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만 다르다.
오히려, 신세대, 88만원세대, 2.0세대 등은 그 세대론을 만든 주체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세대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며 담론을 만들지 못하고, 모두 언로를 장악한 386세대가 일방적으로 그 아랫세대 담론을 끌고 갔다는 점이다.
92년도의 신세대론은 정치투쟁 방식을 문화투쟁으로 바꾸려는 386신좌파 세력과, 광고업계 등에 종사하는 상업형 386세대가 쌍끌이로 여론을 모아갔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저항적 문화전사로 묘사되다, 갑자기 소비의 제왕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세대의 정체성과 관계없이, 정치적 상업적 목적으로 윗 세대가 깊이있는 시대적 성찰없이 세대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88만원세대론 역시 386세대 신좌파인 우석훈 박사가 만든 담론이다. 88만원세대론은 신세대라 불렸던 30대와 20대를 기계적으로 나누며, 20대를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대안은 짱돌과 바리케이트를 치고 나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20대들이 386세대의 기대 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이번에 미친소 파동 때 극소수의 10대가 거리로 나오자, 386세대들은 20대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모두 10대로 몰려가고 있다. 역시 깊이있는 시대적 통찰없이, 정치투쟁 목적으로 2.0세대라는 급조된 세대명을 일방적으로 붙여놓고 있다.
이번 10대들의 촛불시위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그 특징은 2002년 월드컵의 붉은악마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도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소통하며 사이버 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붉은악마 때는 인터넷과 핸드폰에 익숙한 2-30대가 모두 포함되었다.
이 당시 신좌파들은 이러한 세대적 특징을 설명하기 보다는 이들을 극우파시스트로 몰아버리는데 집중했다. 똑같은 공동체 문화 현상이라도, 운동권 386의 입맛에 맞으면, 화려한 수식어로 띄우다가, 자신들의 입맛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어느새 철퇴로 내려치며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에 나선다.
단적인 예가 바로 2007년 <디워>논쟁이다. <디워>논쟁 당시 10대, 20대, 30대는 한국의 문화가 미국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심형래 감독을 응원했다. 지금 10대들의 댓글을 예찬하는 좌파386들은 <디워>팬들에 대해서 우익 파시스트라 공격했다. 정치적 목적에 눈이 어두운 좌파 386들은 PC통신 시절의 사이버 공동체, 붉은악마, <디워>, 그리고 이번 10대들의 촛불이 같은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상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결과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10대들이 좌파386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이버공동체를 만들어나가면, 그들은 언론권력을 동원해 또다시 무슨 살벌한 비판을 퍼부을지 모른다.
운동권 386세대는 아랫세대를 투쟁도구로 삼는 일을 중단해야
이제껏 386세대가 만들어낸 세대론은 단 한 번도 현실에 적합한 적이 없었다. 마치 세상을 엎을 듯 호들갑을 떨었던 신세대론의 대상인 현재의 30대는 여전히 386패거리 권력에 눌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386들이 보호하겠다던 88만원세대라는 20대는, 단지 10대들보다 촛불집회에 참여율이 적었다는 이유로, 자기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무능한 세대록 낙인찍혔다. 그리고나서 또다시 10대들을 선동하기 위해 2-30대와 별다른 세대적 차이도 없는 그들에게 2.0세대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386세대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은 386세대의 위대성이다. 88만원세대론을 주장하는 우석훈은 20대를 위한 책에서조차 386세대에 대해 "세계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지금의 젊은 세대보다도 현실적응력이 뛰어나다"며, 자화자찬한 바 있다. 386의 정권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이다. 또 다른 낡은 386 지식인 진중권 역시 "386세대는 많은 독서량과 체제를 엎어버리려는 발상을 했다. 그러나 그 아래 세대는 체제순응적이어서 미래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촛불 한 번 들었다가 새로운 위대한 세대가 되고, 촛불 한 번 안 들었다고, 무능세대로 낙인찍는 비인간적 작태를 멈춰야 한다. 그러한 정치적 목적의 세대론은 이제 우리세대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그야말로 역사와 시대 전체를 포괄하여, 우리세대에 맞는 세대론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퇴물로 전락한 좌파 386세대들이 더 이상 아랫세대를 놓고 투쟁 도구로 삼는 일을 100%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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